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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12) 지체장애 언니를 떠올리며
도서관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려면, 주차장을 가로질러야 한다. 공원길 입구로 이어지는 장애인 주차공간을 지날 때마다 주차차량을 뚫어져라 보는 습관이 있는데, 마치 감시인이 된 느낌이다. 가끔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뻔뻔스러운 차량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예전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다. 이렇게 장애인 주차공간과 같은 장애인 편의시설뿐만 아니라, 장애인과 더불어 살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체장애가 있는 언니를 알게 되면서였다.
도움은 필요하지만 타인의 짐이고 싶지 않다
처음 언니를 만났을 때만 해도 나는 장애인 친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언니가 주로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했기 때문에, 비장애인인 내가 다리 불편한 언니를 무조건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르기트가 손을 뻗어 막 우유를 집으려는데, 누군가 우유를 집어줍니다.
점원이 친절한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난 우유를 집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어요!” 마르기트는 화가 납니다.
과일도 어디 있는지 금방 찾았습니다.
마르기트가 손을 뻗어 사과를 집으려는데, 또 누군가 벌써 집어 줍니다.
점원이 친절한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마르기트는 화가 납니다.”
(프란츠 요제프 후아이니크 (글) & 베레나 (그림) <내 다리는 휠체어> 김영사. 2004)
<내 다리는 휠체어>라는 그림책을 보다가 바로 그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책 속의 점원처럼 난 부탁하지도 않은 친절을 베풀기에 급급했다. 언니도 마르기트처럼 화가 났던지, 때로는 내게 심술을 피우기도 하고 짜증도 냈다. 하지만 난 언니가 왜 그런 태도를 보이는지 금방 이해하지 못하고 성격 탓으로 돌렸다.
부탁하면 도와달라는 언니의 진지한 요구를 듣고 난 다음에야, 나의 지나친 친절이 불쾌할 수도 있고 언니에게 꼭 필요한 도움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에게 짐이 되고 항상 돌봄을 받는 의존적인 존재가 아니라 독립적인 존재로서 친구가 되고 싶었던 언니의 마음을 헤아리기에 난 경험도 생각도 부족했다. 나는 장애인 친구와 함께하기에 서투르기만 했다.
“그는 왜 나를 돌보아야 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는 걸까. 나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단지 도움이 필요할 뿐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타인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그도 나의 위로와 따뜻한 말들을 필요로 할 때가 있지 않았던가. 이제 다시는 누구에게 손을 내밀고 싶지 않다. 설사 이런 기분이 든다 하더라도, 앞으로도 도움이 필요할 때는 그 누구에게라도 서슴지 않고 도와달라고 청할 것이다.” (장미, “이 여름이 끝나면”, <나, 독립한다> 일다. 2007)
‘타인의 짐이 되고 싶지 않지만 도움은 필요하다’는 저자의 고백이 그녀만의 것은 아니리라. 세상 사람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의 두 부류로 나눌 수는 없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타인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다만 도움이 좀 더 필요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삶을 살펴보더라도, 타인의 보살핌이 많이 필요한 시기와 적게 필요한 시기가 존재한다.
이러한 인식은 진정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세상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누구 도움도 없이 살 수 있는 사람과 무조건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사람을 구별 짓는 생각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타인의 짐이자 사회적 부담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오히려 누구나 도움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청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할 때, 서로 돕고 사는 좋은 세상을 향한 길이 열린다.
하지만 나 역시 비장애인은 독립적 존재, 장애인은 의존적 존재로 간주하고, 둘의 관계를 한 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보살피거나 일방적으로 도움을 요구하는 불균형한 관계로 바라보았던 것같다. 그래서 언니 스스로 판단해서, 필요하다면 타인에게 도움도 청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그러다 보니 언니가 도움을 구하기까지 기다리지도, 도움을 주고 싶을 때 언니의 의향을 물어보지도 못했다. 이런 태도는 오히려 언니가 스스럼없이 도움을 청하는 데 방해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해를 거듭하며 우정을 쌓아가는 동안, 비록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언니가 얼마나 고집스럽게 독립적인 사람인지를 알아나갔다. 그리고 바로 언니의 이런 점이 우리의 우정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도 뒤늦게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우정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언니가 내게 자연스럽게 도움을 구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부재한 시설만큼이나 불편한 시선
언니의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정말 살기 힘든 곳이라는 것을 절절히 깨닫게 된다. 함께 여행을 하거나 외출을 할 때면 당장 화장실부터 불편하다. 평소 물을 거의 마시지 않는 습관을 가진 언니를 100% 이해하게 되었다. 화장실만이 아니다. 극장에 가기도 불편하고, 식당에 가기도 불편하고, 곳곳이 불편하다.
당장 내가 즐겨 찾는 도서관만 해도, 언니와 함께 서가 사이를 오가면서 책을 고를 수 없다. 비록 도서관 입구까지는 낮은 경사로의 휠체어 길이 있지만, 도서관 문을 열고 열람실에 들어서면 휠체어가 다닐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가의 높이가 너무 높아 휠체어에 앉아서는 책을 자유롭게 뽑고 꽂을 수가 없으니, 사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휠체어를 타는 지체 장애인에게 도서관의 문턱은 여전히 높기만 하다.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하지만, 지배적인 기준에 부합하는 신체와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세상은 여전히 온통 불편투성이다.
그런데 편의시설만큼이나 사람들의 시선도 장애인을 불편하게 한다. 불쌍하게, 이상하게 바라보는 그 호기심어린 시선. “제가 왜 불쌍해요? 저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아요.”라고 소리 지르는 마르기트처럼, 언니도 불편한 시선들 앞에서 얼마나 소리 지르고 싶었을까?
장애인도 비장애인처럼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가고 싶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분명히 차이가 나는 존재들이다. 다만 그 차이가 차별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제대로 알면 된다.
귀가 들리는 비장애인은 풀밭의 아주 작은 소리까지 들어낼 수 있고, 청각장애인은 ‘풀밭의 아주 작은 움직임까지 보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걸을 수 있는 비장애인은 두 발로 걸어서 산책하고, 휠체어를 타는 지체 장애인은 ‘타고 산책 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비장애인은 손으로 밥하고 먹고 설거지하고, 두 손 사용이 자유롭지 못한 장애인은 ‘발로 밥하고 먹고 설거지 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이렇게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다른 것만큼이나 장애인들끼리도 서로 다르다. 비장애인은 장애의 차이에 둔감하다. 그 차이가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눈과 마음을 활짝 열어두어야 한다.
언니는 이 땅을 떠난 후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언니가 지금 지내는 곳은 작게 움츠려들지 않아도 되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불편한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되는 곳,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두지 않는 곳에서야 비로소 평범하고 편안한 일상을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장애가 있건 없건, 주어진 대로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다른 점들이 다른 채로 존중받고, 다수와 다르다고 해서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을 만큼 불편해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세상에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비장애인이 만들어 놓은 기준과 잣대에 잘 적응하고, 거기에서 살아남아야만 남들 앞에서 회자될 만한 ‘칭찬거리’나 ‘극기’의 사례로” 유명해지는 것, “장애를 부정하는 것이 마치 장애를 딛고 이기는 것처럼 장애인들이 힘들게 좇아가고 있는”것에 대해 장미님이 느끼는 혼란스러움에 나는 공감한다.
진정으로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라면, 예외적인 개인을 추켜세우기보다 사회제도적 뒷받침에 눈을 돌릴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이경신) ⓒ일다 www.ildaro.com
[필자의 다른 글보기] 독립적인 여성을 키우는 자연 | 부자 되세요? 나누는 사람이 되세요
도서관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려면, 주차장을 가로질러야 한다. 공원길 입구로 이어지는 장애인 주차공간을 지날 때마다 주차차량을 뚫어져라 보는 습관이 있는데, 마치 감시인이 된 느낌이다. 가끔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뻔뻔스러운 차량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예전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다. 이렇게 장애인 주차공간과 같은 장애인 편의시설뿐만 아니라, 장애인과 더불어 살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체장애가 있는 언니를 알게 되면서였다.
도움은 필요하지만 타인의 짐이고 싶지 않다
▲프란츠 요제프 후아이니크(글) & 베레나(그림) "내 다리는 휠체어" 김영사. 2004
“마르기트가 손을 뻗어 막 우유를 집으려는데, 누군가 우유를 집어줍니다.
점원이 친절한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난 우유를 집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어요!” 마르기트는 화가 납니다.
과일도 어디 있는지 금방 찾았습니다.
마르기트가 손을 뻗어 사과를 집으려는데, 또 누군가 벌써 집어 줍니다.
점원이 친절한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마르기트는 화가 납니다.”
(프란츠 요제프 후아이니크 (글) & 베레나 (그림) <내 다리는 휠체어> 김영사. 2004)
<내 다리는 휠체어>라는 그림책을 보다가 바로 그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책 속의 점원처럼 난 부탁하지도 않은 친절을 베풀기에 급급했다. 언니도 마르기트처럼 화가 났던지, 때로는 내게 심술을 피우기도 하고 짜증도 냈다. 하지만 난 언니가 왜 그런 태도를 보이는지 금방 이해하지 못하고 성격 탓으로 돌렸다.
부탁하면 도와달라는 언니의 진지한 요구를 듣고 난 다음에야, 나의 지나친 친절이 불쾌할 수도 있고 언니에게 꼭 필요한 도움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에게 짐이 되고 항상 돌봄을 받는 의존적인 존재가 아니라 독립적인 존재로서 친구가 되고 싶었던 언니의 마음을 헤아리기에 난 경험도 생각도 부족했다. 나는 장애인 친구와 함께하기에 서투르기만 했다.
“그는 왜 나를 돌보아야 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는 걸까. 나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단지 도움이 필요할 뿐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타인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그도 나의 위로와 따뜻한 말들을 필요로 할 때가 있지 않았던가. 이제 다시는 누구에게 손을 내밀고 싶지 않다. 설사 이런 기분이 든다 하더라도, 앞으로도 도움이 필요할 때는 그 누구에게라도 서슴지 않고 도와달라고 청할 것이다.” (장미, “이 여름이 끝나면”, <나, 독립한다> 일다. 2007)
▲ 장미 외 "나, 독립한다" 일다. 2007
이러한 인식은 진정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세상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누구 도움도 없이 살 수 있는 사람과 무조건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사람을 구별 짓는 생각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타인의 짐이자 사회적 부담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오히려 누구나 도움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청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할 때, 서로 돕고 사는 좋은 세상을 향한 길이 열린다.
하지만 나 역시 비장애인은 독립적 존재, 장애인은 의존적 존재로 간주하고, 둘의 관계를 한 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보살피거나 일방적으로 도움을 요구하는 불균형한 관계로 바라보았던 것같다. 그래서 언니 스스로 판단해서, 필요하다면 타인에게 도움도 청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그러다 보니 언니가 도움을 구하기까지 기다리지도, 도움을 주고 싶을 때 언니의 의향을 물어보지도 못했다. 이런 태도는 오히려 언니가 스스럼없이 도움을 청하는 데 방해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해를 거듭하며 우정을 쌓아가는 동안, 비록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언니가 얼마나 고집스럽게 독립적인 사람인지를 알아나갔다. 그리고 바로 언니의 이런 점이 우리의 우정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도 뒤늦게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우정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언니가 내게 자연스럽게 도움을 구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부재한 시설만큼이나 불편한 시선
언니의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정말 살기 힘든 곳이라는 것을 절절히 깨닫게 된다. 함께 여행을 하거나 외출을 할 때면 당장 화장실부터 불편하다. 평소 물을 거의 마시지 않는 습관을 가진 언니를 100% 이해하게 되었다. 화장실만이 아니다. 극장에 가기도 불편하고, 식당에 가기도 불편하고, 곳곳이 불편하다.
당장 내가 즐겨 찾는 도서관만 해도, 언니와 함께 서가 사이를 오가면서 책을 고를 수 없다. 비록 도서관 입구까지는 낮은 경사로의 휠체어 길이 있지만, 도서관 문을 열고 열람실에 들어서면 휠체어가 다닐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가의 높이가 너무 높아 휠체어에 앉아서는 책을 자유롭게 뽑고 꽂을 수가 없으니, 사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휠체어를 타는 지체 장애인에게 도서관의 문턱은 여전히 높기만 하다.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하지만, 지배적인 기준에 부합하는 신체와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세상은 여전히 온통 불편투성이다.
그런데 편의시설만큼이나 사람들의 시선도 장애인을 불편하게 한다. 불쌍하게, 이상하게 바라보는 그 호기심어린 시선. “제가 왜 불쌍해요? 저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아요.”라고 소리 지르는 마르기트처럼, 언니도 불편한 시선들 앞에서 얼마나 소리 지르고 싶었을까?
▲ 프란츠 요제프 후아이니크(글) & 베레나 (그림) "내 다리는 휠체어" 김영사. 2004
귀가 들리는 비장애인은 풀밭의 아주 작은 소리까지 들어낼 수 있고, 청각장애인은 ‘풀밭의 아주 작은 움직임까지 보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걸을 수 있는 비장애인은 두 발로 걸어서 산책하고, 휠체어를 타는 지체 장애인은 ‘타고 산책 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비장애인은 손으로 밥하고 먹고 설거지하고, 두 손 사용이 자유롭지 못한 장애인은 ‘발로 밥하고 먹고 설거지 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이렇게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다른 것만큼이나 장애인들끼리도 서로 다르다. 비장애인은 장애의 차이에 둔감하다. 그 차이가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눈과 마음을 활짝 열어두어야 한다.
언니는 이 땅을 떠난 후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언니가 지금 지내는 곳은 작게 움츠려들지 않아도 되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불편한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되는 곳,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두지 않는 곳에서야 비로소 평범하고 편안한 일상을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장애가 있건 없건, 주어진 대로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다른 점들이 다른 채로 존중받고, 다수와 다르다고 해서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을 만큼 불편해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세상에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비장애인이 만들어 놓은 기준과 잣대에 잘 적응하고, 거기에서 살아남아야만 남들 앞에서 회자될 만한 ‘칭찬거리’나 ‘극기’의 사례로” 유명해지는 것, “장애를 부정하는 것이 마치 장애를 딛고 이기는 것처럼 장애인들이 힘들게 좇아가고 있는”것에 대해 장미님이 느끼는 혼란스러움에 나는 공감한다.
진정으로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라면, 예외적인 개인을 추켜세우기보다 사회제도적 뒷받침에 눈을 돌릴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이경신)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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