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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은행나무의 수난 조안 말루프 "나무를 안아보았나요" 아르고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서 삶의 경이를 느끼는 사람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짚신벌레, 뱀, 나무에게서 누가 경이로움, 경외감, 존경 따위를 느낀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학생들에게 이들도 경이로운 존재이며 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조안 말루프 <나무를 안아보았나요> 아르고스, 2005)
그날 밤 나는 취침시간이 지났는데도 도저히 그냥 잠들 수 없었다. 그래서 책을 집어들고 천천히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혹감, 분노, 두려움이 뒤엉킨 복잡한 심리상태를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었다. 어쩌면 책을 읽고 싶었다기보다 기도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전날 심은 은행나무가 그렇게 처참한 꼴이 될 줄이야! 한번 심은 나무는 되돌아보지 말고 잊어버리라는 충고를 무시하고, 나는 짬짬이 주변에 심어둔 나무들을 순례하곤 한다. 그날도 늦은 밤 산책에서 돌아오던 길에 아파트 뒤편 화단 쪽으로 은행나무를 살펴보러 갔다.
나무는 심어둔 곳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황망히 땅만 바라보고 있는데, 함께 주위를 둘러보던 친구가 울타리 근처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나무를 찾아들고 나왔다. 햇살 잘 드는 곳을 골라 다른 나무에 방해되지 않도록 정성껏 심어둔 바로 그 나무였다. 나무는 뿌리를 휑하니 드러낸 채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가지들 일부는 잘려나갔고 비틀어 꺾어낸 흔적이 역력했다. 도대체 얼마나 그렇게 버려져 있었던 걸까? 잎은 물기를 잃고 축 쳐져 생기가 없었다.
나는 나무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묵묵히, 그동안 나무의 작은 집이었던 화분에 다시 심어주었다. 지친 나무에 물을 주면서, ‘부디 살아나라’고 빌고 또 빌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무를 꼭 껴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무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라는 생각이 들어, 눈길만 건네고 돌아섰다.
은행나무와의 인연
내가 이 은행나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4년 전 5월이었다. 평소 동네 산을 찾을 때면 한 아파트 단지의 울타리 옆을 지나게 되는데, 바로 그 울타리 아래서 어린 은행 싹들을 발견한 것이다. 다들 은행 알에서 힘겹게 싹을 내밀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지럽고 소란스러운 세상 구경에 어리둥절해 있는 듯했다.
그러나 매년 초여름, 풀과 어린 나무들로 무성한 그 울타리도 가혹한 제초제 세례를 피할 수 없으니, 그 푸릇푸릇 작은 생명도 누렇게 시들다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난 주저 없이 은행껍질도 채 떼어내지 못한 어린 은행의 싹들을 조심스레 집으로 데리고 왔다. 화분에 심은 어린 은행나무들은 분갈이를 한 만큼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자라, 어느덧 내 키만큼 자란 이 은행나무는 제법 의젓한 나무의 풍모를 갖춰가는 듯 해 바라만 보아도 흐뭇했다. 날로 자라는 이 나무를 볼 때마다 ‘화분에 키워서는 안 된다, 땅에 심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심어줄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 그러다 올해 아파트 주변을 둘러보다 은행나무가 돌아가면 좋을 듯 보이는 자리를 골라냈다. 오고가며 잘 있는지, 얼마나 자랐는지도 수시로 살펴볼 수 있으니, 나무를 심고 난 후 좋은 선택을 했다며 내심 만족하던 참이었다.
도대체 누가, 왜 나무를 죽이려 한걸까?
아니면, 화단을 제 것인양 하는 아파트주민이 은행나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뽑아버린 것일까? 아니면, 올봄에 조성한 화단 한 귀퉁이에 은행나무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불만을 품은 부녀회 사람의 소행일까? 아니면, 아파트 화단 조성계획에 적합하지 않은 나무라 판단한 관리소 직원이나 경비 아저씨가 저지른 것일까? 결말이 나지 않는 추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밤을 새워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CCTV를 확인해서라도 범인을 찾아야 하는 걸까?
나의 슬픔과 분노는 물론 숲이 사라져서 수천 년 된 나무들이 통째로 사라지는 경험으로 아파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 속이 상했고 ‘사람이 두렵다’는 생각을 또 한 번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사람 이외의 생명체는 큰 가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나무는 더 그렇다. 겨울만 되면 키우던 열대화초들을 화단에 내어놓고 죽이는 사람, 산행 중 몸에 좋다는 나무만 발견하면 나무가 죽건 말건 가지 잘라가기를 서슴지 않는 사람 등, 그들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가족이거나 주변의 이웃이다.
하지만 인적이 드문 곳에서 홀로 반격할 수 없는 어린 나무에게 그토록 잔혹한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비열하거나 정서적으로 왜곡된 사람일 수도 있겠다. ‘폭력적인 사람들은 지구와 나무들에 대해서도 폭력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조안 말루프의 말에 동의한다. 그런데 나무에게 그토록 잔인하게 폭력적인 사람이라면, 나무가 아니라 다른 동식물에게도, 사람에게도, 지구에게도 폭력적일 것이라 주장한다면 과장일까?
진정한 의미의 나무가 없는 도시
내가 더 두려운 것은 그것이 정서적인 결함이나 개인적 차원의 폭력성이 아니라, 소위 정원을 가꾼다는 명목 아래 이성적으로 이루어진 조직적 폭력일까 봐 두렵다. 지극히 인간적 관점에서 살리거나 죽이는, 생명체 선별작업이 이루어지는 인간중심적 폭력일까 봐 끔찍하다. 그래서 더 범인을 색출하는 것이 무의미한 지도 모른다.
사실 오래 전부터 은행나무를 땅에 심으려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느꼈던 것은, 계획된 도시 안에서는 나무 한 그루 마음껏 심을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무가 있어야 할 자리는 그 자리를 계획하는 인간의 잣대에 의해 정해진다. 도시에는 정해 둔 자리가 아니면 더 이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지금 지구에는 나무가 부족하다고들 하지만, 도시에는 질서 있는 도시경관을 해치는 나무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 도시에는 인위적인 ‘자연미’만 존재할 뿐 자연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도시의 나무도 도시의 장식품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 나무는 더 이상 아니다. 나무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와 공존할 때 생명체로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도시의 나무는 그냥 바라보기에 나무일 뿐, 곤충과 새, 박테리아, 세균과 공생하며 자라는 생명체는 아니다. 우리는 자연적인 숲과 인공적인 공원, 화단을 절대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결국 CCTV를 확인해보려 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무가 조금씩 살아나는 만큼 나의 분노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아니, 확인하기가 두렵기도 했다. 만약 평소 친하게 지내는 이웃이라면 그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할 건가. 설사 친하지 않는 이웃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어떻게 할 건가. 그 이유가 개인적인 것이든, 조직적인 것이든, 은행나무를 왜 뽑았느냐고 항의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나무를 예전으로 되돌릴 수도 없는데…. 그리고 어린 은행나무가 겪은 일은 지금도 도시의 나무들이 수없이 겪고 견뎌내는 일상이 아닌가.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인간들로 인해, 도시로 인해 죽어 사라지는 나무는 수없이 많다.
나무에게 경이감, 경외감, 존경심까지 느끼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나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헌신하는 나무의사와 같은 사람의 열정적 노력까지는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나무도 우리 인간과 함께 공존할 자격을 갖춘 생명체로서 그 존재를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최소한 그들의 생명을 빼앗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아, 이제 우리 은행나무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경신의 도서관나들이-> ‘일’이 나를 만든다 | ‘완전채식’은 인류생존의 문제]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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