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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라의 와이너리(winery) 5.만남 ③ 와인 
 

▲ 영화 내내 북부 스페인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길>(The Way, 2011)   
 
연말에 우연찮게 비행기에서 흥미로운 영화 한 편을 볼 기회가 있었다. <길> (The Way)이라는 미국영화다. 우리나라에도 한때 유행처럼 휩쓸고 지나간, 스페인 북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 이야기다.
 
전문직을 갖고 ‘성공적인’ 노년을 살아가는 아버지 (마틴 쉰)는 아들(에밀리오 에스테베즈/영화감독)과의 대화가 공회전을 반복한다. 박사과정을 그만두고 멀리 길 떠나는 아들을 공항까지 태워주면서도 둘은 티격태격 이다. 그러나 그렇게 길 떠난 아들은 산티아고 순례길 첫 날 악천후에 목숨을 잃는다. 아들의 유해를 거두러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에 있는 작은 도시로 날아간 아버지는, 결국 아들이 가고자 했던 길을 끝까지 걸어주기로 한다.
 
그리고 영화는 제목 그대로 그 길을 보여준다. 길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이런저런 일을 겪는다. 친구들은 꼭 마음에 드는 건 아니라서 오해도 생기고 다툼도 벌어진다. 그러나 각자 따로 또 같이 화해의 길을 함께 걷는다. 그 와중에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나는 그 영화 내내 펼쳐지는 북부 스페인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그들이 끼니마다 와인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다채로운 와이너리 여행이 가능한 캘리포니아
 
캘리포니아에 사는 동안 그렇게 와인으로 이어지는 풍경을 그려가며 여행할 기회가 자주 있었다. 어디를 가나 포도밭을 쉽게 만날 수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사실 그 보다는 내가 와이너리를 따라 여행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내게는 ‘캘리포니아=와인’이다.
 
캘리포니아 주는 가늘고 길다. 가로 폭은 400킬로미터니까 서울에서 부산 거리 정도고, 길이는 자그마치1240킬로미터이니 남북으로는 하루거리는 아니다. 뭐, 가기 위해서 간다면 하루에도 미친 척 주파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캘리포니아의 기다란 한 쪽 면은 태평양을 접하고 있고 다른 쪽은 시에라네바다를 포함하는 높은 산맥이다. 길이가 기니깐 다양한 기후와 토양을 상상해 그려볼 수 있다. 길이는 좁아도 바닷가에서 산맥까지를 아우르는 가로 폭에, 오리건 주와 맞닿은 산림지역에서부터 멕시코와의 국경지대 사막에 이르는 긴 세로 폭을 곱한 경우의 수 만큼. 포도밭을 품어주는 자연의 다양함은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캘리포니아 사람들을 만나 정말 지루하지 않은 와이너리 여행을 만들어준다.
 
2004년에 개봉되었던 <사이드웨이(Sideways)>라는 영화에서도 그 아름다운 일면을 볼 수 있다. <포레스트 검프> 만큼이나 알면 알수록 대사 한 마디 한마디, 장면 하나 하나가 재미있어서 몇 번을 봐도 볼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영화다. 아마도 배경으로 나오는 곳을 잘 알아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와인 자체보다는 나이 마흔 ‘생애전환기’를 맞는 두 친구 이야기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등장인물이 적어서 나에게는 축복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도 산타바바라는 내게 각별하고 아름다웠지만, 와인 이야기가 이어지니 더욱 좋아졌다.
 
피노 누아(Pinot Noir)로 유명한 산타바바라 여행의 추억
 
▲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주립대학에서 산타바바라 시내 쪽 (산기슭) 방향을 보았다. 이 학교에선 학생들이 공부는 안하고 열심히 논다는 소문이 있는데, 직접 와 보았을 때 난 그들이 노는 게 당연하다고 인정해주기로 했다.     © 여라 

 
<사이드웨이>의 배경이 되는 산타바바라 내륙은 피노 누아(Pinot Noir)가 유명하다. 꽤 남쪽임에도 불구하고 바다에서 만들어진 안개가 내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올 수 있는 특이한 지형 때문에 하루 중 꽤 긴 시간 동안 차가운 기운이 감돈다. 그리고 바위투성이인 토양까지 더해지니, 까다롭기로 이름난 이 포도품종이 자라기에 적합하다. (포도나무는 비옥한 곳에서는 잎과 가지만 무성히 자란다. 그래서 좋은 와인을 만들 포도열매를 위해서는 일부러 포도나무가 고생하게 해야 하는 포도밭 속 아이러니가 있다.)
 
어느 해 겨울 엘에이 다녀오는 길에 폭풍우를 만났다. 평소에 운전하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역시 드라이브의 정수는 비올 때다. 옷깃 하나 젖지 않고 비속을 휘젓고 다니면서 좋아하는 음악을 운치 있게 실컷 들을 수 있는 사치를 누리니 좋을 밖에.
 
그 날의 목적지는 산타바바라 근교에 있는 와이너리 두 곳이었다. 아침에 일을 보고 점심 먹고, 애초 계획보다 좀 늦게 출발하긴 했다. 하지만 거센 비바람이 내려치는 속에서도 만땅 충전되어있는 아이팟과 이런저런 간식도 충분히 갖고 있으니, 가는 길이 아무리 막히고 오래 걸려도 즐겁기만 했다. 두 시간 거리를 깜깜해진 다음에나 도착했다. 그런데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게 있었다. 계획했던 와이너리에 가지 못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산타바바라에 당도하니 시간이 너무 늦어서 음식점, 와인 테이스팅룸, 와인가게들이 이미 다 닫은 거다.
 
여행지의 맛난 저녁은 포기한다 해도 와인이라도 한 병 사서 숙소에 들어가야 할 텐데 슈퍼마켓도 다 닫았다. 한참을 헤매어 후미진 곳에 주류소매점을 하나 발견했다. 와인지역이라 해도 그런 가게는 주로 맥주와 도수 높은 술들이 주요상품이고, 구색을 맞추기 위해 와인은 그저 구석 한편을 지킬 뿐이다. 그날은 스스로 축하해줄 일이 있던 터라 평소 마시는 와인보다 두 배 정도 가격을 마다하지 않고 (그래봤자 한 30불 정도였던 거 같다.) 그 지역 꽤 이름난 와이너리의 피노 누아를 한 병 샀다.
 
숙소로 돌아와 설레는 마음으로 와인을 따서 잔에 따랐는데, 아아… 라벨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하필이면 내가 별로 사랑하지 않는 오크 향과 과일 맛이 진하고 느글느글한 스타일이었다. 밥 먹으면서 먹으면 괜찮았을 텐데, 가벼운 안주에 여리고 부드럽고 강한 신 맛을 기대했던 나는 쏟아지는 실망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낮에 가지 못했던 와이너리에서 맛보리라 기대했던, 만나지 못한 와인들이 더욱 아쉽게 머릿속으로 지나갔다. 하지만 어쩌랴. 낮에 즐거웠던 빗속 드라이브를 떠올리며 ‘집에 가면 동네에 제대로 된 와인가게에 가서 맛있는 피노 누아를 추천받아야지’ 두 주먹 불끈 결심한 후 공중파만 있는 내 집에선 볼 수 없는 케이블TV 채널들을 돌려가며 딩굴딩굴 놀았다.
 
와인의 맛을 풍성하게 하는 후각의 비밀
 
▲ 엘에이와 샌프란시스코 중간쯤에 있는 파소로블스 (Paso Robles) 깊은 구석에 숨어있는 아주 작은 와이너리의 포도밭. 와인포도와 함께 온갖 동식물을 모두 유기농으로 키우고, 오크통에서 숙성되고 있는 와인에게 하루 종일 음악을 들려준다.     © 여라 

 
본격적으로 와인공부를 시작한 후 즐거운 일 중 하나는 친구들이 와인에 대해 궁금했던 것들을 내게 물어본다는 것과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질문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덕분에 반복해서 만나는 질문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냄새에 관한 거다. 영화 <사이드웨이>에서 마일즈가 와이너리 가서 잭에게 와인 테이스팅하는 방법을 설명해주면서 와인 잔에 코를 박고 킁킁 거리며 줄줄 읊는다. “와인에서 감귤, 딸기, 패션프루츠, 아스파라거스, 치즈 향이 난다고 하는데, 그거 진짜야?” 이런 질문. 그리고 “어떤 와인은 심지어 헤이즐넛, 베이컨, 담뱃잎 향도 난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거야?” 이런 질문.
 
그게 참 신기한 일이다. 포도로만 만들었는데 말이다. 포도품종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과일 향과 자라난 기후와 토양이 반영되는데다가, 발효 과정에서 효모의 영향도 받고, 숙성시키는 과정에서 생기는 오크통 영향도 있다. 어쨌든 ‘와인 음료’가 아닌 이상 인위적으로 레몬, 블루베리, 피망, 베이컨 향을 더해 넣지는 않는다. (오크 향에 관한 이야기는 논란도 많은데, 여기서는 일단 논외로 치겠다.)
 
앞서 글에서 와인이 미각보다는 후각이라 한 이유는 후각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주어서다. 와인 테이스팅을 할 때 코를 와인 잔에 들이밀고 집중해서 냄새를 맡거나, 잔에 든 와인을 빙글빙글 돌리거나, 한 모금 입안에 넣고 후루룩 소리를 내가며 깊은 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은 다 냄새를 더 잘 맡아보려고 하는 노력이다. 감기 걸려 코가 막히면 뭘 먹어도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맛’을 형성하는 대부분은 사실 ‘냄새’다.
 
미각은 기껏해야 대여섯 가지다. 기본적으로 짜고 달고 시고 쓴 네 가지 맛에다 맵고 떫은 통각을 합치고, 여기에 요즘 독립적인 맛으로 더해지는 추세인 감칠맛까지 합쳐봐야 일곱 가지다. 여기에 비해 후각은 비교도 안될 만큼 다양하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숫자로 표현하자면, 세상에는 1만 종류가 넘는 냄새가 존재한다. 이 중 보통사람이 훈련을 통해 구별해낼 수 있는 냄새의 종류는 1천 종류라고 한다. 그리고 와인에는 대략 2백여 종의 냄새가 있다고 한다.

미각도, 후각도 맛의 일부분일 뿐
 

▲ 파소로블스 (Paso Robles) 지역은 기후가 더워 프랑스 론 지방 와인품종이 잘 자란다. 하룻밤 묵었던 호스텔은 교회 옆 사택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다. 문맥도 없이 어릴 때 기억이 튀어나오게 한 냄새가 있는 곳이었다.     © 여라  
 
후각은 가장 먼저 둔감해지는 감각이면서 제일 오래 기억할 수 있는 감각이다. 둔감해지는 이유는 이른 바 후각피로현상 때문인데, 자극을 계속해서 같은 강도로 받으면 신경이 피로해지니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작용을 한다고 한다. (오~ 인체의 신비!) 그래서 퇴근길 냄새나는 지하철도 좀 버티면 견딜 만 해진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도 잠시 다른 냄새를 맡게 되면 처음 지하철 안으로 들어섰을 때의 그 냄새가 다시 난다. 아마도 그래서 한 번 맡은 냄새를 잊지 않고 처음 맡았던 그대로 오래 기억할 수 있게 되나 보다.
 
게다가 냄새가 기억날 때엔 그 주변 정보를 몽땅 다 끌고 나온다. 이런 것들이 도대체 내 머리 속 어디에 다 들어있었을까 깜짝 놀라게 한다. 때론 그다지 달갑지 않을 때도 있다. 하여튼, 살다보면 익숙한 냄새에는 둔감해지고 낯선 것은 냄새로 다가온다. 그래서 나를 알기 위해서 낯선 곳에 가는 것도 효과적인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 뭐에 행복해하는지가 여행지에서는 보다 분명해진다. 정체성은 다른 것들 가운데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와인 수업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컵 속에 각종 과일, 채소, 저장음식, 가공식품 등을 한 가지씩 잘게 썰어 넣고 뚜껑을 닫아 구멍을 몇 개 뚫었다. 내가 냄새 맡았다고 생각한 것을 쓰고 실제로 컵 속에 들어있던 것을 나중에 맞추어보았다. 그리고 함께 수업 듣는 이들과 각자 옳고 그른 짝짓기를 이야기했다. 일치와 착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의 주관적인 경험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객관적인 약속이 교차하는 지점이 어슴푸레 잡혔다. 시고 단 맛에 대해 개인이 느끼는 정도가 다 다르지만, 산미와 당도를 객관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선 남들과 악기 조율하듯 주파수를 맞추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맛’이라고 했을 때 혀에 느끼는 미각보다 후각이 더 많은 숫자의 정보를 줄진 몰라도, 어쩌면 후각도 맛의 일부일 뿐이다. 분위기, 습관, 농부의 땀을 식혀주는 바람, 세월, 엄마의 손, 기억, 음식을 함께 나눈 그 사람의 환한 미소, 지금 여기, 친구들과 시시한 이야기 나누면서 낄낄거리는 목소리, 맛은 이 모든 것이다.
 
이번 주말, 와인이 나오는 영화 한 편을 보고자 한다면 <사이드웨이>(Sideways, 2004)를 포함하여 <와인 미라클> (Bottle Shock, 2008), <어느 멋진 순간> (Good Year, 2006), <구름 위의 산책> (A Walk in the Clouds 1995), <프렌치 키스>(French Kiss, 1995), <빅 나이트> (Big Night, 1996), <라따뚜이> (Ratatouille, 2007), <바베트의 만찬> (Babette’s Feast, 1996) 정도를 추천한다. 아, 그리고 마틴 쉰 나오는 <길>(The Way, 2011)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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