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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16) 그 하나가 없어도 나는 내가 눈부시다 
 
프리랜서로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든 지 15년. 함부로 대해 온 몸, 마음, 영혼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요가와 명상을 시작한 지 10년. 명함에 글 쓰고 요가 하는 자야, 라고 써넣 은 지 6년. 도시를 떠나 시골을 떠돌기 시작한 2년 만에 맞춤한 집을 만나 발 딛고 산 지 또한 2년... 그렇게 쌓이고 다져진 오래된 삶 위로, 계속해서 뿌리 내리고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는 ‘지금 여기’의 삶을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일다> www.ildaro.com
 

언 땅이 풀리면서 왕성하게 잎을 뻗어가느라 서로 엉켜 있던 시금치를 솎아낸다. 덕분에 내 손엔 뿌리째 캐낸 여린 초록 잎들이 한 가득. 올해 첫 수확물인 그것들을 물에 흔들어 된장국을 끓이니, 아, 향기롭다. 한 숟가락씩 입에 떠 넣을 때마다 내 심장에까지 파랗게 물이 올라 촉촉한 봄기운이 온몸을 순환하는 느낌이다.
 
그녀와 나의 결정적인 차이
 
이 황홀함을 좀 더 깊이 누리기 위해 나는 냉이를 캐러 가기로 한다. 냉이는 봄의 전령사답게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물론, 아쉬울 정도로 빨리 사라진다. 그러므로 냉이 특유의 쌉쌀하고 아린 맛을 음미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면, 약간의 부지런을 떠는 정도는 기꺼이 감내하는 게 필요하다.
 
며칠 전 이와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이 생각나 뒷집에 사는 J씨에게 문자를 넣는다. 재작년 초겨울에 이사 온 J씨는, 나이는 나보다 몇 살 아래지만 우리 동네에서 명실상부 참한 새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일 잘 한다'고 소문이 돌 만큼, 집 안팎을 거두는 솜씨가 맏며느리감이라 할까.
 
실제로도 맏며느리인 그녀는 우리 집보다 훨씬 큰 규모로 농사를 지으면서도, 나름 안정된 일을 해서 돈까지 번다. 마을 행사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참여해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기도 한다. 그에 반해 나는 콧구멍만한 텃밭을 어쩌지 못해 늘 낑낑 매는 데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툭하면 며칠씩 집을 비우니 누가 봐도 비교가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어른들이 보기에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따로 있다. 그건 바로 J씨에겐 아이가 있고 나에겐 없다는 것이다. 남녀가 합을 이뤘으면 당연히 자식을 봐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점과는 별도로, 할머니 할아버지 말고는 사람이 드문 시골 마을에서 아이는 확실히 특별한 존재다. 그러니 젊은 부부가 귀농을 하겠다며 이사한 것만도 대견한데, 아이까지 하나 잘 키워서 데리고 왔으니 배로 예뻐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일 터.
 
확실히 아이는 특별하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물론이고 아이에 대한 갈망 자체가 없는 내게도, 그들 가족이(특히 모자母子가) 그려내는 어떤 풍경은 참으로 따뜻하게 느껴진다. 이를테면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논두렁 사이 길을 휘젓고 다니는 아이의 앙증맞은 몸짓과, 그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응시하는 엄마의 눈빛과, 때맞춰 그들의 머리 위로 드리우는 서늘한 산그늘 같은 것들.
 
더군다나 아이가 처음에 비해 한층 건강하고 활달해진 모습이 눈에 띌 때면, 왠지 모르게 내가 다 흐뭇해진다. 시골이어도 선행학습이니 뭐니 해서 아이를 닦달하려 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데, 가만 보면 J씨 부부는 아이가 자연 속에서 또래들과 맘껏 뛰노는 것에 만족하는 것 같다.
 
이번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를 두고 주변에서 다들 읍내의 큰 학교에 보내라고 할 때도 그들은 인원이 적으면 폐교될 위험에 처한 면 단위의 작은 학교를 선택했고, 나는 그 모습에서 아이와 부모 모두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가는 한 가족의 여유랄까 자연스러움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확연한 현실 너머, 또 다른 가능성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아이들은 특별하고 신비롭다.  © 자야 
 
그러고 보면 어디를 가든 무엇을 보든, 가장 마음을 빼앗기게 되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건 평범한 이들이 만들어 내는 조화로운 일상이 아닐까 싶다. 각 세대가 어우러져 노동과 놀이와 문화와 배움이 잘 결합된 삶을 구체적으로 펼쳐 보이는 일상 말이다.
 
그 속에 노인의 지혜나 부모 세대의 부지런함과 활력이 결여돼 있다면 뭔가 불완전하고 불균형하게 보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아이들은 어떤가. 만약 그들의 반짝이는 눈빛과 수줍은 미소와 까불대는 몸짓이 없다면 무엇보다도 생기가 덜하고 설렘이 덜하지 않을까.
 
간혹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시골 마을로 여행을 갈 때면, 그곳에 아이들이 있고 그들이 배우고 뛰놀 수 있는 학교가 있는 것만으로도 적잖이 위로가 되는 것을 나는 느낀다. 가난해도 행복하다든가, 아이들만이 희망이라든가 하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눈에 보이는 확연한 현실(어쩌면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너머에 누구도 알 수 없는 또 다른 가능성이 있음을 아이들이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게 묘한 안도감을 주는 것이다.

우짜노, 하나는 있어야 할낀데
 
그렇다면 당신은 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인지, 이쯤에서 묻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실제로 나는 시골에 이사 오고 나서 한동안은 동네 아주머니나 할머니들로부터 그런 질문을 종종 받았다. 그분들은 버스 정류장 같은 곳에서 우연히 나와 단 둘이 있게 되면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춰 이렇게 묻곤 하셨다. "아는 왜 안 낳는데?"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애가 안 생긴다고 내가 대답하면, 그분들은 또한 하나같이 연민이 담뿍 담긴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응수하시는 거였다. 우짜노. 아가 하나는 있어야 할낀데.
 
그와 같은 은밀한(?) 대화가 몇 번 오가고 난 뒤. 다행히 요즘은 아무도 내게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기에, 나 또한 나이가 많아서 애가 안 생긴다는,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진실도 아닌 대답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게 백퍼센트 진실이 아닌 이유는, 우리 두 사람 모두 아기를 그다지 원하지 않아 피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관심과 주의가 유독 나 자신에게 집중돼 있는 데다 정신마저 덜 성숙한 탓인지, 누군가를 최소한 일정 기간 동안은 무조건적인 자애로움으로 돌봐야 한다는 점이 못내 부담스럽고 두렵다.
 
더군다나 아기만 보면 환장해서 물고 빠는 성향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많은 여자들이 이모나 고모가 되면 갑자기 모성 본능이 치솟으며 아기에 대해 남다른 감정을 갖게 된다고 하는데, 나는 십여 명이나 되는 조카들이 태어나 자라도록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 "조카와 자기 애는 또 다르다"고 설득하는 이들도 있지만 과연 그럴는지 의문스럽기도 하거니와, 불확실한 가정에 의거해 일을 저지르기에는 무엇보다도 내가 너무 소심하다.
 
모성이 부족하고 돌봄의 품성이 결여되어 있는 듯한 이런 나 자신을 지금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한때는 무척 한심하게 여기기도 했다. 돌아보면 이혼을 할 즈음에 유독 그랬지 싶다. 힘들어도 다들 잘 맞춰 사는데 나는 왜 그걸 못하는 거지? 얼마나 이기적이면 아이 하나 낳아 키울 엄두를 못 내는 거지? 이런 질문들로 스스로를 공격했다고 할까.
 
특히 주변에서 '혼자면 좋지 뭐,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고' 라든가 '넌 애도 없으면서 뭐가 힘들다고 그러니?' 등의 소리라도 듣는 날이면, 그들이 딱히 나를 공격하거나 비아냥거린 게 아님을 알면서도 서운함에 자책감을 얹어 혼자 앓기도 많이 했다. 그에 비하면 아가 하나는 있어야 할낀데, 같은 걱정은 어찌나 다정다감하게 들리던지. 그때마다 내가 잠시나마 그분들에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전달되는 말의 체감온도가 달라서였으리라.
 
나의 선택과 그 영혼의 결정

▲ 저렇게 예쁜 아이들이 있어 삶은 눈부시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괜찮은 삶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 자야

 
아이의 특별함을 인정한다고 해서, 또한 이 세상에 아이들이 있음으로 어떤 면이 좀더 온전해진다고 해서 여성에게 일률적으로 임신과 출산을 강요할 수는 없다. 관련 정책이 나아져서 애를 낳고 키우기에 훨씬 좋은 사회가 된다고 해도, 설사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는 세간의 말이 진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그 문제는 무엇보다 당사자가 선택하고 결정할 사안이며, 제 가슴 깊은 곳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좀 더 행복해지는 쪽으로 나아가는 법이니까.
 
그런 점에서 나는 그게 어떤 이유에서든(모성결핍에서든 두려움과 이기심에서든) 임신을 원하지 않는 나 자신의 의견을 존중하고 지지한다. 사정이 이와 같음에도 아기가 안 생긴다고 한 나의 말이 순전히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기로 오는 영혼의 선택과 결정 또한 임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나의 몸을 빌려 세상에 내려오기로 결정한 영혼은 없다고 봐도 좋은 게 아닐까. 내가 임신의 가능성을 차단해서 못 오는 게 아니라, 영혼들이 나의 선택을 존중해서 스스로 다른 통로를 알아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냉이를 캐자는 내 말에 바깥으로 나온 J씨는 오늘도 아이와 함께다. 옆 동네 아이까지 합세해 네 명이 된 우리 일행은 마을의 좁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여느 때처럼 바람과 햇살을 가르며 자전거 바퀴를 굴리는 아이와, 그를 따라잡기 위해 부리나케 뛰어가는 또 다른 아이. 그리고 그들 뒤에서 눈으로 마음으로 아이를 품는 엄마라는 이름의 여자.
 
그 세 사람이 눈부신 만큼, 비록 내 아이는 없지만 그들과 함께 걷는 나 또한 충분히 눈부시다. 이런 나를 두고 누군가는 봄에 취한 것이 분명하다며 정신 차리라고 타박하겠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아니, 가능하기만 하다면 정신을 더 많이 놓고도 싶다. 적어도 이 계절엔 마구 취해 스스로를 눈부셔 하며, 그렇게 살고 말 테다.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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