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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장애여성 숨은그림찾기: 발레음악 「봄의 제전」 

“장애여성, 숨은 그림 찾기”는 5명의 장애여성들이 다양한 ‘매체 읽기’를 통해 비장애인, 남성중심 시각으로는 놓칠 수 있는 시선을 드러냅니다. www.ildaro.com
 
악명 높은 탄생
 
뜬금없이 가느다란 바순 소리로 조용하게, 또 불길하게 시작하는 이 음악은 정장을 입고 대공연장에 앉았어도 침착하게 들을 수가 없다. 그러라고 만든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오케스트라가 불규칙한 리듬을 타고 날 것의 거친 에너지를 뿜어내면 관객들의 심장도 쿵쾅쿵쾅 제멋대로 뛴다. 광포한 삶의 기운이 어두운 공연장을 채운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발레 음악인데 발레 없이 자주 공연된다. 카르멘은 ‘집시의 노래’에서 “La danse au chant se mariait(춤은 노래와 결혼한 사이)”라고 노래하지만, 봄의 제전에 맞춰 자발적으로 춤을 추고 싶은 무용수는 별로 없을 것 같다. 초연 안무가 니진스키는 당시로선 너무나 전위적이었던 이 음악을 발레로 구상하는 과정에서 작곡가와 서로 갈등을 빚었으며, 공연을 맡은 무용수들도 음악 못지않게 실험적인 안무 때문에 힘들어했다고 전해진다.
 
음악사에서 가장 큰 소동 중 하나로 꼽히는 봄의 제전 초연은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2009, 얀 쿠넹 감독)의 초반부에 실감나게 재현되어 있다. 스트라빈스키와 니진스키가 무대 위로 나갔다간 크게 다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객석은 수습할 수 없는 난장판이었다. 원시 부족이자 ‘이교도’들의 축제, 전통적인 발레의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춤, 괴상한 음악까지 여러 모로 당시 관객들에겐 자극적이었던 모양이다.

▲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2009, 얀 쿠넹 감독) 중.         
 
아름답고 연약하여 희생되는 제물들

 
초연 안무는 공식적으로 보존되지 않아서 당시 관객들의 증언으로만 전해지나, 핵심 플롯은 다음과 같다;

“봄, 상상 속의 원시부족은 대지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제물은 부족 중 가장 아름다운 처녀. 제사가 진행되고, 원로들이 둘러앉아 지켜보는 가운데 선택된 처녀는 죽을 때까지 춤을 추다 최후를 맞는다.”

 
이 사람들, 그냥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처녀를 왜 제물로 바쳤을까. 물론 이 이야기를 착안한 사람이 예술가이니만큼 예술가다운 환상으로 해석할 수 있고, 연출상 프리마 발레리나가 돋보이려면 당연한 설정일 수도 있다. 인간 중에 가장 완전한 그 처녀의 아름다움으로 부족 전체가 구원받을 수 있단 원시적 믿음을 나타낸 것일지도 모르지만, 남자들의 눈에 아름다운 여성이라면 다산성과 관련 있을 것이고 그러면 대지의 다산을 기원하는 제물로 아주 괜찮은 상징이다.
 
하지만 그 처녀의 희생은 어디서, 어떻게 보상 받을 것인가. 죽은 후 조상들이 보살펴 줘서 좋은 곳에 갔다 쳐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살아있어야만 가치를 발하는 덕목이다. 몸 좋고 힘 센 남자야말로 화수분의 상징일 텐데(그 땐 환경호르몬 같은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왜 남자는 제물로 바치지 않았을까? 혹시 그 완력으로 격렬하게 저항해서 제물로 바치는 게 힘들진 않았을까? 그래서 ‘젊음’과 ‘아름다움’을 다 갖춘 사람 중에서도 힘 센 청년보단 제대로 저항할 힘이 없는 처녀를 고른 건 아닐까?
 
현실에서 더 일반적인 제물은 어린 양이나 염소였다. 전체를 위해 희생하는 제물은 왜 이렇게,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연약한 존재였을까.
 
양이 스스로 희생을 선택하진 않는다

▲ 마티스의 <춤>      
 
예전에 광부들은 탄광에 내려가기 전, 유독가스가 차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카나리아를 먼저 내려 보냈단다. 조류는 사람보다 폐가 훨씬 약하기에, 카나리아가 살아있을 수 있는 공간이라면 광부들에게도 안전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는 바로 그렇게 리트머스 시험지의 역할을 한다.
 
한 사회의 성숙도는 사회적 약자들의 위치가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여성, 장애인, 아동, 그리고 동물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면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알 수 있다. 장애여성이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지금 상황에서 웬 동물의 권리 타령인가 싶겠지만, 이건 나와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약자들의 입장에서도 기꺼이 서 보려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다.
 
사회적 약자들에겐 제대로 저항할 물리적 힘이 없고 억압받아도 제대로 항의할 수 없단 공통점이 있다. 자기보다 힘이 센 곰이나 사자 같은 맹수들에겐 가까이도 못 가면서 작고 힘없는 동물은 함부로 대하고 착취만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보다 약한 장애인이나 아동도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식용으로 사육되는 동물들도 살아있는 동안은 안온하게 지낼 수 있게 규제하는 사회라면 여성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도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미 보장해 뒀을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보다 더 약하고 어려운 존재들이 살기 좋은 세상은 나도 살기 좋다. 당장 먹고 살기 바빠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가장 소외되고 약한 존재들을 신경 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자기보다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 중 하나가 이것이다.
 
그러니 봄의 제전에 묘사되는 장면은 “원시”부족이나 “야만”인들의 풍습이어야만 한다(사실 초연 때 이 작품의 야만적인 분위기에 야유를 보낸 크리스트교 신자들도,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무 죄 없는 희생’양’을 썼지만). 가엾은 처녀가 죽을 때까지 춤을 추는 모습을 지켜보는 원로들은 지위와 권력이 있는 남자들이고, 제사의 결과를 누리는 것도 그들이었다. 지금쯤은 누구의 희생도 없이 즐겁게 풍년을 기원하고 평등하게 그 수확을 누리는 사회가 왔어야 한다.
 
몇 번의 봄이 지나야 ‘성숙한 사회’가 올까?
 
하지만 약자들의 희생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하철역 휠체어 리프트 오작동으로 추락사하는 장애인이 있어야만 리프트 대신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사회적 이슈가 될 만큼 심한 체벌을 받는 학생이 나와야만 체벌이 엄격히 제한되고, 자살하거나 미쳐버리는 돌고래가 나와야 돌고래 쇼가 중단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사회는 조금씩 성숙해지지만, 이미 희생된 약자들은 어디서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그저 시대를 잘 못 타고나 희생양이 될 불운한 운명인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것일까. 아니, 우리 사회가 희생을 통해 성숙해지긴 했을까? 

부당 해고된 노동자들이 절망 끝에 자살해도 돌아보지 않고, 제3세계에서는 아직도 아동 노동력이 착취되고 있지만 대기업 프랜차이즈의 비싼 커피값 중 몇%가 그들에게 돌아가는지 신경 쓰지 않고, ‘마블링’이 좋은 소고기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소들을 한 발자국 떼기도 어려울 만큼 좁은 우리에서 사육하는데도 비싼 소고기를 찾는다.

 
다수를 위해, 대의를 위해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가(예를 들어, 복지제도)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럼 대체 그 우선순위는 누가 정하는 것인가? 역시 주류가, 다수가 정하는 것 아닌가? 여성의, 장애인의, 아동의, 동물의 차례는 언제가 좋겠다고 나와 있는, 내가 모르는 교과서라도 있단 말인가?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들이다. 모두가 답을 알고 있지만, 다수는 눈을 감기 때문이다.
 
19대 총선에 여러 소수 정당들이 등록하는 것을 보며, ‘내가 지지하는 당이 다수당이 됐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소수당이 소수자의 목소리를 꾸준히 대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하지만 지인의 말대로, 이 사회는 아직 그럴 만큼 성숙하진 않은 모양이다.

몇 번의 봄이 더 지나야 소수자가 소수로서 존중 받고, 약자의 희생이 없이도 사회가 잘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이 아니더라도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큰 그림을 봤을 때, 내가 바로 그 길목에 있는 거면 좋겠다.  (
쫄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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