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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꽃들이 나에게 말했다
<일다> 여라의 와이너리(winery) 만남⑥ 죽음의 사막 
 
[삶이 담긴 독특한 와인 이야기! 필자 여라. 마흔이 되면서 '즐거운 백수건달'을 장래 희망으로 삼았다. 그 길로 가기 위해 지금은 와인 교육, 한옥 홈스테이 운영, 번역 일을 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산과 들로 놀러다니다 와이너리(winery: 와인 양조장) 방문이 이어졌고, 이내 와인의 매력에 빠졌다. 미국 와인교육가협회 공인 와인전문가이며, 현재 영국 Wine & Spirit Education Trust의 디플로마 과정 중이다.]  <일다> www.ildaro.com
 
미국 서부여행길에서 만나는 데스밸리(Death Valley)
 
매일매일 사막을 꿈꾸었다. 서른 살 무렵이었다. 공부, 일, 사람, 사랑, 진로, 모든 것이 출구 없이 막혀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절박했고 답답했다. 탁 트인 곳을 그렸다. 아마도 단순한 삶을 살면서 차근차근 매듭을 풀어 그 상황을 뚫고 나갈 용기와 기운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매일 아침 잠이 깰 때마다 또 다시 주어진 날을 세어가며 사막을 기억했다. 꼭 가리라.
 
실상은 그럴 수가 없었다. (현실에 그런 게 어디 있어?) 그저 한 번에 하루씩 버티다 보니 시간이 흘러갔고 마음이 무뎌졌다. 앙금이 남아 가슴 한 구석에 얼룩이 지고 뚫어졌던 구멍이 온전히 메워지지는 않았지만, 매일 내 마음 속을 뚫어져라 들여다 보며 나 스스로 내 속을 갉아먹고 있지는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고 꿈 속의 사막마저 지워버린 건 아니었다.

▲  두 산맥 사이에 깊이 패인 데스밸리 (Death Valley)   © 여라 
 
캘리포니아에 오는 관광객들은 샌프란시스코보다는 남쪽 로스앤젤레스를 통해 오는 경우가 더 많다. 해외에서 오든, 국내에서 오든 그러하다. 자연보다는 인간이 만든 구경거리가 풍부한 로스앤젤레스로 관광 오는 이들의 대부분은, 라스베가스에서 슬롯머신 한 번 땡겨 주고, 대개는 거기서 다시 아리조나 주 그랜드캐년까지 다녀오는 이른바 ‘미국 서부여행’을 한다.
 
그리고 이 여행길에 덤으로 끼는 관광지는 데스밸리(Death Valley)다. 죽음의 골짜기라니, 관광지 치고 이름 참 무시무시하다. 그도 그럴 것이 19세기 중반 골드러시(Gold Rush) 때 더 나은 삶을 찾아 캘리포니아 금광으로 향하던 무리 중에서 길을 잃고 이 골짜기에서 떼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살아서 이 곳을 빠져나간 이들이 뒤를 돌아보며 “안녕, 죽음의 계곡!” 했다나.
 
삭막한 사막을 이토록 아름답게 만드는 건 무얼까
 
꿈에도 그리던 사막을 처음 만난 곳이 데스밸리였다. 누구에게는 죽음의 사막이었던 곳이 유명 관광지가 된 이유가 때론 궁금했었다. 하지만 직접 가기 전에는 그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거기에 가니 그제서야 “대체 그런 데를 왜 가니?”라던 질문이 달라졌다.
 
이 삭막한 사막을 눈물겹게 아름답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 길고 긴 시간일까? 악조건을 버텨내는 생명일까? 혹은, 그 간절함에 마주 닿는 나의 마음일까? 

▲ 비 몇 방울로 생명을 피워올리는 사막의 들꽃  © 여라 
 
데스밸리의 여름철 낮 평균 기온은 섭씨 45도를 넘나들고, 연평균 강수량이 60밀리미터다. 한국에서 건조한 봄 가을에 한 달 평균 강수량과 비슷하거나 조금 넘는 정도의 비가 일년 내 내리는 것의 전부다. 그 6센티미터 비의 대부분은 11월~3월에, 말하자면 나머지 캘리포니아에서 ‘우기’라고 부르는 시기에 내린다. 그리고 나면 이 곳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들꽃 가득한 곳으로 돌변한다.
 
죽음의 사막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생명을 만날 수 있다니! 참담하기가 그지없어 보이는 그 땅에서, 몇 방울 떨어지는 비에도 그걸 봄이라고 환하게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나는 자유를 느꼈다.
 
그래,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다 죽자. 그 사막의 꽃들이 나에게 말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이 남들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비밀스레 움직이는 돌이라면 그렇게 살자. (데스밸리에는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유명한 ‘움직이는 돌’들이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 높이 떠올라 안개같이 어두컴컴한 모래바람을 일으켰다가도, 저녁이 되면 또 한낱 모래먼지가 되어 다시 모래사장에 내려 앉는 운명이라면 그렇게 살자.
 
비 몇 방울로 목을 축이고, 지난 한 해 가슴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생명을 딱 한 번 피워 올릴 수 있다면 -그 다음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알 바 없지만- 지금 그렇게 하자. 그게 내가 살아갈 삶이라면 최선을 다해 그렇게 살자. 그런 비장함을 갖게 한 곳이 그 사막이었다. (물론 매일매일 이런 비장한 마음으로 살진 않는다. 그러면 곧 죽어버릴 거 같다.)
 
늙은 나무가 내어준 포도로 만든 와인을 마실 때
 
와인을 만드는 포도나무는 보통 3년째부터 와인을 만들 만한 익은 열매를 낸다. 수명이 20년 가량 될 때까지 최적의 조건에서 와인을 만든다. 그 시기가 지나면 포도알도 작아지고 수확량도 줄어든다. 결국 포도밭 유지비 대비 그 생산량의 수지타산이 현실적으로 맞지 않아 상업와인을 만드는 데에서는 포도나무를 죄 뽑아내고 새로 심는다. (그냥 드는 생각엔 그게 돈이 더 들 것 같은데, 20년 투자대비 그런가 보다.) 

▲  2011년 봄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SF MoMA) ‘와인이 어떻게 현대화되었나’에서 전시된 카베르네 소비뇽 나무의 땅 위와 땅 속 모습.  이 나무는 1985년에 심어서 2010년에 뽑아냈다고 한다.  © 여라 
 
하지만 고령이 되도록 그냥 두기도 한다. ‘올드 바인’(old vine)이라고 해서, 정해진 법적 제한은 없지만 50~80년 이상 된 나무들을 일컫는다. 이 늙은(?) 나무들이 내어주는 포도는 상대적으로 맛이 진하기 때문에 와인도 맛이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심적으로는 나보다 나이 많은 나무가 내어준 포도로 만든 와인을 마실 때 내 마음이 각별하다.
 
포도나무는 원래 포도 씨를 땅에 심거나, 씨를 싹 틔워 모종하지 않고 접붙이기를 한다. 특히 와인을 만드는 포도나무는 그렇게 해야 알려진 포도의 성격과 맛이 그대로 다음 세대에 이어지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한다.
 
여기엔 다른 이유도 있다. 1850년대에 유럽 와인 포도종 나무들이 싹쓸이 죽었다. 특히 프랑스에서의 피해가 심했다. 알고 보니 원인은 미국산 포도나무에서 유럽으로 묻어간 병충해였다. 미국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이유는, 미국산 포도나무가 이 병충에 자연면역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문제의 해결방법으로 미국산 포도나무 밑둥에 훌륭한 와인을 만들어내는 유럽산 포도종을 접붙여 키우게 되었다.
 
지금도 전세계적으로 그렇게 한다. 이 때 당시 지리적으로 외딴 곳인 호주, 그리고 이 필록세라 라고 불리는 작은 벌레가 살기 싫어하는 토양을 지닌 칠레, 미국 워싱턴 주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 시기 이전에 심어진 고령의 포도나무는 전세계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포도밭의 예술, 깊고 간절하게 뿌리내리는 나무처럼
 
와인의 품질을 이야기할 때에 ‘빈티지’라는 말을 쓴다. 어느 해에 와인이 좋고 나쁘냐는 말이다. 요새는 포도밭과 와이너리에 과학이 발전해서 옛날만큼 품질이 들쑥날쑥 하지는 않다.
 
하지만 농작물은 기본적으로 기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과실이 햇볕 받고 익어야 할 때에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든지, 수확 때가 다 되어 포도밭 인근에 산불이 며칠 크게 났다든지, 봄에 꽃에 열매가 맺어야 하는데 난데없이 서리가 내렸다든지, 가을이 길어 포도가 마지막 익는 조건이 좋았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자연 조건들을 통틀어 좋은 빈티지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와인을 만드는 사람은 자연 조건이 좋지 않았을 때에 그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당연히 더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좋지 않은 빈티지는 와인메이커가 실력 발휘하는 해라고 할 수도 있다. 조건이 좋지 않을 때에 드러나는 손맛이라고나 할까.
 
와이너리에서의 손맛이 그렇다면, 포도밭에서의 손맛도 있다. 앞서 칼럼에서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 좋은 과실을 얻어야 하고, 좋은 포도송이를 위해 포도나무를 어느 정도 괴롭힌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조건이 좋으면 포도나무는 주로 가지와 잎이 왕성해진다. 그래서 이상적으로는 땅이 너무 비옥해서도 안되고, 따로 물을 주지 않고 가능한 한 포도나무가 뿌리를 깊이 뻗어내려 버텨내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너무 힘들지 않게, 그러나 쉽지도 않게 자라도록 하는 기술이 포도밭의 예술이다. 포도나무 뿌리는 보통 1미터 내외에서 물과 영양분을 찾지만, 땅속 깊이 6m까지도 자란다. 포도나무 뿌리가 자갈과 흙 깊숙이 더듬거리며 헤맬 그 간절함에서, 문득 내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사막 행이 떠올랐다. 내가 더듬거리며 헤매며 찾던 것은 무엇일까?

▲  데스밸리에 봄이 다시 왔다. (2012)  © 여라  
 
신문기사를 보고 내가 “미친놈들!”이라 하는 부류가 둘 있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엘 카피탄(해발 884m 되는 거대한 바위덩어리 산)을 단 2시간 36분에 주파하는 스피드 클라이밍 하는 놈들이 있다. 그리고 데스밸리 섭씨 50도에서 잠도 안자고 스무 시간 넘도록 뛰는 놈들이 그렇다.
 
매해 7월이면 데스밸리에서 울트라마라톤이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낮은 지대라 알려진 데스밸리의 배드워터 분지(해발 -83미터)에서부터 휘트니 산(해발 2438미터)까지 217킬로미터를, 그늘에서 가만히 숨쉬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데! 말이 뛰는 거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그들의 모습은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비늘과 지느러미가 하얗게 너덜거리도록 애쓰는 연어의 모습이다.
 
나의 지론은, 그걸 해야 한다고 가슴이 말하면 해야 한다. 가다 죽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참고로, 이 울트라마라톤에서 죽은 선수는 없다.)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인터넷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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