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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페 버스정류장] (5) 빛나는 눈동자의 ‘영’에게 
 
경북 상주시 함창읍 함창버스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카페 버스정류장”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머무는 이 까페의 문을 연 박계해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 산골로 들어간 한 여자의 귀촌일기” <빈집에 깃들다>의 저자입니다. www.ildaro.com
 

추석이 사흘 남았다. 작은 읍답게 기름 짜는 집이며 정육점은 붐비고 식당이나 유흥업소는 한산하다. 그러니 이런 날 카페주인이 한가로운 건 당연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아 손님을 모시기엔 더없이 좋은 날이지만 정적을 즐기기로 마음먹는다. 정오가 되자 가을햇살이 마당을 환하게 점령했다. 햇살이 아까워 눅눅한 방석이며 소파시트를 내다 널기 시작하는데 첫 손님이 등장했다.   
“어머나, 오랜만이네요.”
“네, 정말 오랜만이죠.”
“아메리카노?”
“네, 테이크아웃으로요.”
 
그라인더에 커피콩을 넣고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갈아볼래요?”
“네? 아, 좋아요.”
그리고 나는 테이크아웃 컵을 챙기고 뜨거운 물로 융드리퍼를 적셨다.
그는 커피콩을 갈며 쿡쿡 웃기 시작했다.
“이게, 진짜, 참 재미있는 상황이네요. 만약 서울의 스타벅스 같은데서 주인이 ‘이거 갈아줄래요?’하면 손님이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근데 지금 전 너무 자연스럽게 콩을 갈고 있거든요. 아, 정말 참…… 정말…… 재밌어요. 이 상황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는 게.”
“아무한테나 이러진 않죠. 오랜만에 와서 반갑다는 인사랍니다.”
“네…… 아, 커피 향 죽인다.”
 
콩이 갈리는 소리가 더 이상 안 들리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그라인더를 내밀었다.
“다 된 거 맞지요?” 
“고마워요, 맛있게 내려드릴게요.”
 
핸드드립한 아메리카노를 그의 손에 건네며 물었다.
“요즘 어찌 지내요.”
“얼마 전에 취직을 했어요.”
“아, 그랬구나…… 좋아요?”
“광고회산데…… 제가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일은 뭐…… 현수막 제작도 하고…… 뭐……그동안 계속 놀아서 이제 뭐든 해야 돼서……”
대답하지 않아도 좋은 얘기까지 하고선 흐려지는 목소리와 표정에 살짝 그늘이 얹히고 만다.
  
이 시대 청춘의 현주소 중 한 단면을 대표하는 그의 이름을 영이라 하자.
영을 처음 본 것은 카페 문을 연 지 일주일쯤 되는 겨울의 초입이었고, 눈이 많이 왔다. ‘아다모의 눈이 나리네’가 첫 곡으로 들어있는 시디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듣는 동안 눈발은 점점 거세지고 손님은 한분도 오지 않았다.
차라리 카페 문을 닫아야 하는게 아닐까, 생각해 보는데 흰 눈 속에 빨간 자전거 한 대가 나타났다. 빨간 자전거의 주인도 빨간 점퍼를 입고 있었다. 현관에 선 그는 신발을 벗어야 하는 구조에 당황한 듯 잠시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더니 운동화를 벗고 들어왔다. 짧은 머리칼에 묻은 눈이 녹아서 이마는 번들거렸고 뭔가에 들뜬 듯 상기된 두 뺨에는 여드름이 두어 개 익어가고 있어 청춘의 풋풋함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작은 읍에선 보기 드문 젊은이였다.
 
“테이크아웃 되나요?”
빛나는 눈동자에서 감출 수 없는 생기가 전해졌다. 
“그럼요!”
“두 잔, 한잔은 좀 진하게.”
주문을 하며 그의 눈은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었다.
“밖에서 본 것과 딴판이네요.”
“그렇죠?”
“네, 잠깐만요. 테이크아웃 말고…… 여기서 먹고 갈게요.”
그러더니 핸드폰으로 누군가랑 통화를 했다.
“너, 들어와, 여기 너무 좋다…… 아, 글쎄 일단 들어와!!!”
그는 바 의자에 앉았고, 곧 또래로 보이는 청년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 뭐야, 금방 사온다고 기다리라더니.”
그러면서도 그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보였다.
“와, 좋네요…… 와, 좋다…… 와, 밖에서 볼 때랑 완전 다르네요.” 하며.
 
온장고에 들어있던 따뜻한 컵 두 개에 아메리카노를 담아서 건넸다. 영은 마치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탄성을 질렀다.
“아, 냄새 좋다, 역시 내려오길 잘했어요. 굉장히 행복하다…… 이 카페를 발견한 건 나야. 너는 여기 살면서도 카페 간판을 처음 봤다고 했지?”
영의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정말이지 영은 행복해 보였다.
“오늘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봐요?”
나는 남은 커피 원액을 내 컵에 따르며 물었다.
“네, 좋은 일인지 아닌지 조금 헷갈리기도 했는데, 이제는 확신이 섰어요. 오늘 정말 행복한 거 맞아요.”
“무슨 일일까…… 궁금하네……”
“저, 조금 전에 서울에서 내려왔거든요.”
“아, 놀러온 건가요?”
“직장에 사표 쓰고 온 거예요. 그렇게 사는 게 더는 못 참겠더라고요. 이제 고향에서 살 궁리를 해보려고요.”
“그 기분이라면 나도 잘 알아요. 막연한 불안을 밑에 깔고 있지만 일단은 너무너무 가볍고 자유로운. 맞죠?”
“네. 지금은 그냥 아무 생각 안하고 싶어요.”
“잘 했어요. 하고 싶은 건 해 봐야죠. 귀향을 축하해요.”
“커피를 마실 곳이 있다는 게 반갑네요. 고향에 오면 그런 공간이 아쉬울 거라는 걱정을 했거든요.”
 
그리고 그는 이틀이 멀다하고 들리는 단골이 되었다. 노트북을 펴놓고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몰두해서 무언가를 하곤 했다. 차츰 알게 되었는데 그 무언가는 바로 사진작업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함창의 곳곳을 사진으로 찍고 다니며 실컷 자유를 누리는 중이었다. 서울을 버리고 오던 날의 기분이며, 당분간은 앞날에 대해 생각하지 않겠다는 마음까지를 나는 고스란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십년 전의 내 모습과 너무나도 똑같았기 때문에.
 
“고향을 소재와 주제로 하여 사진 작업을 하고 있어요. 나중에 전시회를 열 생각이에요.”
“그래요? 전시 장소는요?”
“이제 찾아봐야죠.”
“할 데 없으면 우리 카페에서 해요. 바깥이든 마당이든 얼마든 공간이 되니까. 그건 내게 더 좋은 일이니까.”
“아, 그럴까요?”
 
그런 대화를 주고받던 때는 아마도 겨울이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그 후로도 봄이 올 때까지는 거의 매일 보던 영을 여름에는 띄엄띄엄 보았고 최근에는 통 보지를 못했던 것인데, 오늘의 첫손님으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해맑은 모습 대신 삶의 무게가 얹힌 듯 무거워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 역시 내가 겪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인간이 경제적 동물임을 확인하는 날들, 자유로운 현재를 반납하기 싫은 마음, 막막한 미래…….
 
그러나 그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는 밝고 건강하며 꿈이 있는 청년이니까.     
다만, 그가 사진을 얼마나 찍었는지, 전시회를 하겠다는 생각은 그대로인지, 고향에서 살겠다는 마음은 여전한 지가 살짝 궁금할 뿐. (박계해)

* 여성 저널리스트들의 독립언론 <일다> 바로가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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