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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선 밖으로 나가도 괜찮아> 박푸른들이 찾는 ‘내 안의 목소리’
여성주의 저널 <일다>는 사회가 강요하는 10대, 20대의 획일화된 인생의 궤도를 벗어나, 다른 방식의 삶을 개척해가는 청년들의 시간과 고민을 들어봅니다. 특별기획 “선 밖으로 나가도 괜찮아” 연재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 야트막한 산에 에워싸여져 있는 우리마을 ©박푸른들
이번 글에서는 스물 세 해 동안 살았던 마을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나의 이야기를 글로 쓸 때보다는 훨씬 어려웠다. 마을은 다양한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곳이다. 그래서 어눌한 소개는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한참을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결국, 드디어 썼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으로 본 우리 마을을 용감하게 소개한다.
'학교'가 되어준 우리 '마을'
나는 종종 사람들에게 자기소개를 할 때 농촌에서 살다가 왔다고 말하곤 했다. 우리 마을은 야트막한 산과 들판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리고 사이 작은 천이 흘렀다. 우리 아빠를 비롯한 많은 마을 사람들은 이곳 물을 길어다가 농사를 지었다. 하늘을 볼 때 시야를 가리는 고층 아파트나 빌딩도 없었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작고 고요한 곳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자신은 적적한 농촌은 싫다고 대꾸하기도 했다.
그 사람들이 아는 농촌은 어떤 곳일까. 그런 감정이 드는 곳이 어디 농촌뿐일까. 그리고 농촌이라고 늘 그럴까. 한 공간에 복잡 미묘한 분위기와 희로애락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도 벌리고, 공부도 하고, 토론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연애와 이별도 하고, 술도 마시고, 때론 혼자 있기도 하고…. 우리 마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다른 곳과 조금 다른, 우리 마을만의 큰 장점이 있기는 하다. 그것은 상상과 실험을 할 수 있는 힘이다.
54년 전 마을 한 귀퉁이에서 마을 속의 학교를 지향하는 풀무학교가 문을 열었다. 당시 가난해 학교에 가지 못하는 많은 마을 청소년들이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 학교는 '더불어 사는' 여러 방법을 학생들과 학교 내에서 상상하고 실험했다. 그리고 졸업한 학생들은 마을에서 실험을 거듭해나갔다. 학교라는 이미지 덕분에 엉뚱한 실험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얼마 안가 그만둔 것들도 있었고, 오랜 기간 이어져서 마을에 안착되고 살이 붙여지는 것들도 있었다. 그리고 잠시 쉬다가 다시 시작하는 경우도 했다. 어쨌거나 이러한 상상과 실험은 우리 마을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내가 다닌 어린이집, 학교, 연구소, 공방, 가게……. 뿐만 아니라 내가 학교 졸업 후 시작한 일도 이러한 원동력 덕분에 만들어 진 것들이었다.
마을 바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협동조합, 대안학교, 유기농업 등에 관심을 갖고 마을을 찾기도 했다. 이들은 내가 평소 무심히 스쳐 지내오던 것들의 소중한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종종 내게 소개를 해주기도 했다.
“나는 이야기를 정리하는 일이 좋아요”
▲ 전공부 시절 농사짓고 학교로 돌아가는 모습 © 박푸른들
나 역시도 마을 학교인 풀무학교 고등부, 전공부(대학과정)에서 공부했다. 고등부에서는 농사와 협동조합을 통해 순환과 더불어 사는 삶을 배웠다. 그리고 전공부에서는 인문학과 농사를 통해 농적인 삶에 대해 알아갔다. 평생 살던 마을에 관심을 가졌고,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웠다. 나는 소위 대안적인 삶에 대한 고민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을 학교를 다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겼고, 내게 익숙하고 편한 농업을 선택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내가 이렇게 생각 할 수 있는 것 또한 마을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공부 졸업 무렵에는 농적인 가치를 바탕에 두고 있다면 어느 일이든 농업, 농촌과 연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무작정 즐겁고 기쁜 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생각하고는 막연하고도 띨띨하게 "나는 이야기를 정리하는 일이 좋아요"라며 말했다.
마을 일을 잘 알고 계신 전공부 선생님의 도움으로 막연하게 하고 싶던 일을 구체적으로 풀어나가 볼 수 있었다. 과거 풀무학교 선배들이 학교에서 마을로 일을 풀어가는 과정도 이와 같이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바로 ‘이곳’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선생님은 마을에 있는 한 단체 사무실 귀퉁이에 책상 하나를 마련해주셨다. 그리고는 이야기를 정리하는 여러 형태의 마을 일을 연결해주셨다. 그렇게 졸업 후 2년 동안 마을에서 일을 했다. 초기에는 별 일없이 혼자 책상에 앉아 있다 보니 막연하고 고독했다. 마을에서 누누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이 생기니 일이 생겼다. 관련 일이 점차 많아지고 함께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거의가 마을 이야기를 다양한 형태로 엮어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는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마을의 전반적인 역사와 현재에 공부했다. 또는 관심 있는 주제를 정해 공부하고 조사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마을 이웃 모두는 분야가 다른 선생님들이었다. 그래서 2년 동안 대부분의 이웃에게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가장 적절한 호칭이라고 여겨졌다. ‘마을이 학교다’라는 말이 진정 와 닿는 시간들이었다.
공부의 결과물은 주로 가이드, 뉴스레터, 잡지, 역사 자료집, 전시 등으로 풀어냈다. 사람들과 시시콜콜 소통하며 일을 했다. 그러다보니 제각각이 마음에 품고 있던 마을에 대한 다양한 희망들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때론 그것을 모아 구체적인 상상과 실험으로 이어보기도 했다.
▲ 우리마을은 대부분이 유기농업을 하기 때문에 다양한 생물을 볼 수 있다.
살고 있는 마을을 공부하며 일을 하다 보니 이웃, 부모, 나의 역사를 이해하는 시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행복했다. 살아가고 있는 곳을 좋아하는 것은 참으로 마음 든든해지는 일이었다. 이 경험 덕분에 어딜 가든지 그곳의 역사와 현재 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좋은 습관이 생겼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공간에서 이 같은 경험을 해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돕고 싶었다.
이 일들은 마을에서도 새롭게 시작하는 일들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적당한 직업명을 찾지 못했고 나는 종종 자기소개를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면 어물쩍거리기도 했다. 지금에서야 '주변사회학'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좋지 않겠느냐고 혼자 제안하고 혼자 동의하고 있다. 마음에 드는 다른 명칭이 생기기 전까지는 계속 이것을 쓸 생각이다.
마음에 드는 즐거운 일이었지만 2년 정도 시간이 지나자 여러 한계점이 낱낱이 보였다. 주변사회학과 관련 된 일을 활발히 하고 있는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두 번 정도 프로젝트를 함께 한 적이 있는 사진아카이브연구소와 기억발전소에서 공부 하게 되었다. 두 곳 모두 서울에 있고 서로 느슨하게 연결 된 곳이다.
사진아카이브연구소는 한국 내 지역 아카이브를 하는 단체 네트워킹 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억발전소는 일반인들이 일상의 기록을 좀 더 잘 해볼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약 9개월 동안 인턴을 하고 있다.
별명도 생겼다. 허당 인턴. 이런 별명은 당연했다. 주제는 같았지만 농촌과 도시는 일의 방식과 리듬에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문화의 리듬을 익혀가고 있다.
편하고 익숙한 것으로부터 멀어지기
▲ 우리마을에 있는 느티나무헌책방 © 박푸른들
나를 멀찍이서 본다면 내가 굉장히 꿋꿋하게 내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꼭 말해두고 싶다.
우리는 주변사회에 많은 영향을 받고 산다. 그리고 제각각의 다른 주변사회를 갖고 있다. 나의 주변사회가 대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더라면, 또는 수렵채취 생활을 강조했더라면 분명 그것에 영향을 받고 일정 기간 그대로 살았을 것이다. 그저 나는 마을, 공동체, 농업 등이 익숙하고 편했던 것이다.
요즘은 관심 주제나 가치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 나와 그 사람 사이에 벽을 만드는 내 모습을 종종 발견한다. 이런 모습을 보며 사람은 한번쯤은 익숙하고 편했던 사회로부터 멀어질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 있다. 그래야 세상과 소통이 좀 더 폭 넓어지는 것이 아닐까. 시기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벽이 점점 더 공고해지기 전에 시도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시기가 지금인 것 같다.
우리 마을 많은 사람들은 풀무학교 설립자 중 한 분인 이찬갑 선생님을 존경한다. 이찬갑 선생님께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 지으신 ‘새날의 표어’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박푸른들)
"그대여! 이제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우리 전부를 받아 환영하는 새 세계 문이 열리나니.
옳다.
거기는 기이하게도 이상주의자도 현실주의자도 다 환영한다.
시인도 음악가도 환영하는가 하면 소설가도 평론가도 물론이러니와
천문학자 지질학자 또 철학자 과학자를 얼마나 즐거이 환영할까.
그 자연계의 전부를 들어 환영을 하는 것이다.
거기는 경이롭게도 심지어 부지런한 자도 게으름뱅이도, 또 재사도 둔재도, 그리고 인테리도 무식자도, 또 다시 개척자 추종자도, 그리고 강자도 약자도, 다시 우직자도 꾀자기도 모두 환영해서 무엇보다 먼저 차별없이 대해주지 않는가?
과연 그렇게 모두를 환영해서 자연스러이 우주적 조화를 이루게 하며
더구나 피안을 가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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