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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꽃을 던지고 싶다> 27. 우울과 대면하기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30회까지 연재될 예정입니다. www.ildaro.com 
 
“우울증의 어두운 숲에 거주하면서 설명할 수 없는 고뇌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심연으로부터의 귀환은 시인의 비상과 다르지 않다. 깊이 모를 지옥의 심연에서 위로 위로 힘겹게 걸어 올라와 마침내 ‘눈부신 세상’ 속으로 나오게 된다. 건강이 회복된다면 평정과 기쁨을 즐길 수 있는 능력 또한 회복된다. 이것이야말로 절망을 넘어선 절망을 견딘 자들에게 돌아가는 충분한 보상이리라.” –윌리엄 스타이런 <보이는 어둠>
 
괜찮아졌다고 여기는 순간, 혹은 이제는 나의 고통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우울은 예고도 없이 나를 점령한다. 나는 또 흔들리고 있다. 한 달간 지속된 불면으로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기분에, 나는 다시 성폭력 생존자임을 깨닫는다. 생존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조금의 여유를 가지면 어느 순간 나의 몸과 마음이 점령당하는 식민지와 같다. 끊임없이 나를 지배하려는 고통에 대해서 각성해야 하고 설명해내야만 하는, 그 반복되는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와 같다.
 
처음 상담을 받으면서 괜찮아졌다고 믿는 순간, 나는 다시 찾아온 우울감에 적응하지 못했던 적이 있다. 왜 좋아지지 않을까? 나는 할 만큼 했는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을 받고, 약을 먹고, 생존자 자조모임도 나가고, 성폭력에 관한 책도 읽고…. 그렇게 한다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적이 있다. 다시 나빠진 상태의 그 무기력함은, 애써 힘들게 가꿔놓은 꽃밭을 누군가 망쳐놓은 것처럼 분하고 화가 나는 일이었다.
 
반복되어 찾아오는 우울감과 고통, 그리고 흔들리는 나. 회복은 가능하기나 한 걸까?
 
항우울제와 수면제 복용을 중단하고서 

▲ 이미지: 수잔 앳킨스 저 <우울의 심리학>(소울).  
 
내 땅의 주인이 내가 아닌 타인이라는 사실, 우울감에 빠진다는 것은 나의 몸과 영혼이 식민지처럼 느껴지는 일이다. 내 뜻대로 몸과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마치 ‘보이는 어둠’에 지배당하는 듯 한 기분. 월리엄 스타이런이 우울을 ‘보이는 어둠’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며, 나를 점령하고 있는 이 어두움이 우울이라는 것과, 어둠이 걷힐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것 같다.
 
우울감은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 중 하나이다. 우울감은 항상 슬픔과 무기력함, 그리고 좌절과 함께 등장하여 삶의 모든 희망과 기쁨을 감추어 버린다. 나는 점령을 당한 식민지인의 무기력한 모습으로 잃어버린 일상에 대하여 절망하며 패배감에 눈물을 흘린다.
 
일상의 평범함과 소소한 즐거움 속에서 행복감에 취하는 순간, 내가 성폭력 생존자임을 그리고 그 피해가 나의 삶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듯 우울감은 찾아온다. 트라우마를 증언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어떤 단어, 어떠한 냄새, 혹은 어떠한 장소가 사건의 기억으로 나를 끌고 가고, 그 기억들의 끝은 항상 우울과 대면하는 일이다.
 
처음 꿈을 꾸고, 감당하기 어려운 우울감에 정신과를 찾았다. 그땐 우울감보다는 우울감이 데리고 온 불면이 더 큰 문제였다. 불면으로 인해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게 되니,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에 정신과를 처음 찾게 되었다.
 
마음이 아픈 사람이 저리 많을까? 정신과에서 대기하며 여러 감정이 몰아쳤다. 한국 사회가 정신병에 대한 몰이해로 인하여 병세가 심각해진 후에야 병원을 찾는 탓인지, 병원에 방문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멍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흐릿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나만 어울리지 않게 생기가 있어 보였다. 그 곳을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누르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의사와 마주 앉게 되었다.
 
젊은 남자의사는 친절하고 다정한 말투로 물어왔다.
“무엇이 불편해서 오셨나요?”
 
하얀 진찰실과 잘 어울리는 단정한 이미지의 의사라서 나는 다행이라고 여겼다.
“잠을 못 자서 왔어요.”
 
이렇게 말하며 나는 심리검사 결과지를 내밀었다. 그러나 심리검사 결과지로는 나의 상태를 설명하지 못했다. 내가 받은 다면적 인성검사나 지능검사 등 심리검사에는 나는 우울이나 반사회성 같은 문제적 상황이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분노 수치가 너무 낮고, 위급한 상황에 판단능력이 낮아진다는 진단 뿐이었다.
 
의사는 심리검사 결과지에 나와 있는 그래프를 들여다보며 되물었다.
“왜 잠이 안 올까요? 본인은 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우울하고 잠이 안 오니 약을 처방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다는 말에, 의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항우울제와 수면제 1주일치를 처방 받고,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약이라고 2만원이 넘는 약제비와 2만원이 넘는 진찰비를 지불했다. 집으로 오면서 내가 괜찮지가 않다고 인정한 그 날 이후로 6개월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병원에 다녔다.
 
6개월 뒤,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약을 복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나의 우울감이나 불면이 많이 좋아져서는 아니었다. 약을 먹으면서 항상 멍한 상태로 잠에 빠져있는 나를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울감도 나의 감정 중 하나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울감을 느끼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나의 감정의 일부이고, 나를 돌보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우울한 나’도 나임을 인정하기로 하면서, 나는 ‘우울한 나’와 함께 살아갈 용기가 생겼다.
 
우울한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일상이 흔들리는 감정이니까. 그렇지만 힘들더라도 우울감에 사로잡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으므로, 우울한 감정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나에게 ‘회복’이란
 
‘치유’는 나선형과 같음을, 그러하기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것 같은 순간 뒤로 반걸음 다시 물러나게 됨을, 반복되는 그 과정이 마치 고문당하는 듯한 무력함을 깨닫는 과정임을 나는 알고 있다. 불행하게도 치유는 친절한 천사의 모습으로 내게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다.
 
이 힘든 과정을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일까? 포기하는 것이 더 평온하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얼마나 많이 물었던가? 포기하면 그 순간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식민지의 백성처럼 정체성도 가치관도 잃어버린 채 살아가야 하기에, 단 한 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는 고통이라는 ‘태풍의 눈’ 속에 스스로 들어가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면 속에 지새는 많은 날들로 인하여 나약해지는 순간에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믿는 순간에도, 성폭력 피해로 인해 감정처리에 어지러움을 느끼는 순간에도, 나의 불안정함이 내가 서 있는 모든 기반을 흔들고 관계를 파괴하는 순간에도, 나는 그 난폭하고 잔인한 상대를 이겨냈다는 것만으로도 빛나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알고 있다.
 
나는 꽃을 좋아한다.
 
나는 재즈를 들으면서 마시는 에스프레소의 진향 커피향과 책 속의 살아있는 글들을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는 것을 좋아한다. 만추를 느끼면서 걸을 수 있는 낙엽이 쌓인 가로수 길을 좋아하고, 산책을 하다가 흘러나오는 노라 존스의 목소리를 듣고 찾아 들어간 카페에서 우연한 여유를 즐긴다. 나는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고, 미술 전시회에 가서 작품들을 보면서 살아있음에 감사함을 느끼는 시간을 즐긴다.
 
우연히 길을 걷다 마주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좋아하고, 갑자기 ‘네가 생각났어’ 라는 친구의 반가운 전화에 행복감을 느낀다. 시집을 들고 여행길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고, 길을 걷다 발 아래 핀 야생화를 발견하며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낀다.
 
우울감은 이런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과 나의 삶의 의미를 덮어버리는 위력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우울한 감정을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나 나쁜 것이 아니라 적응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회복’이라는 것은 우울감도 나의 감정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 우울감이 비록 그 순간 삶의 기쁨들을 감추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울)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블로그> 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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