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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발전 소용없다” 日이타테무라 주민들의 목소리
1986년 4월 26일은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날입니다.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27주기를 맞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로 고향을 떠난 이들이 삶을 전하는 일본 여성언론 <페민>에서 전하는 기사를 싣습니다.
한국 정부는 핵발전 확대정책을 고수하고 있으며 최근 고리, 신월성 핵발전소 등에서 고장으로 원자로가 가동정지되는 일이 잇따라 시민들의 불안은 커져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폐허로 남은 체르노빌, 그리고 대대로 살아오던 땅을 잃은 일본의 농민들이 전하는 경고를 한국사회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www.ildaro.com
▲ 이타테무라(飯舘村)는 대량의 방사능 물질이 쏟아져 마을 전체가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 페민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가 위치한 지역이 아님에도 대량의 방사능 물질이 쏟아져 마을 전체가 피난할 수밖에 없었던 이타테무라(飯舘村). 당시 6천2백 명이었던 마을 주민은 어쩔 수 없이 후쿠시마 현 내외로 피난해야만 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후 2년여가 흐른 지금, 이타테무라의 주민들은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
그 중 한 사람 간노 에이코 씨(76)의 입을 통해 가설주택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는 이타테무라 주민들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에이코 씨는 원전 사고 이전에는 이타테무라 북부의 사스 지구에 살았고, 지금은 후쿠시마현 다테시의 가설주택에 살면서 된장이나 '얼음 떡'(주로 일본 동북지방에서 먹는 겨울철 보존식품-역주) 등 전통의 식문화를 전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풍요로운 땅에서 추방당하다
된장을 숙성 시키는 누룩의 달콤하고 그윽한 향기가 가설주택 인근 마을회관의 넓은 모임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전부터 교류가 있던 이타테무라 사스 지구의 농산물 가공그룹과 관동지역의 소비자, 된장 생산자들이 함께하는 된장 담그기 워크숍이 3월 10일에 열린 것이다. 핵발전소 사고 전에 이타테에서 채취하여 방사능이 검출되지 않는 대두로 만든 된장이 종자 된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타테는 살기 좋은 보금자리어서 선조 대대로 몇 대나 되는 인생을 묻어온 곳이지. 언젠가 다시 사람이 살 수 있게 되면 우리 핏줄인 자손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마을에 들어가 생활하지 않을까. 그때나 되어야 마을이 다시 살아나겠지.”
에이코 씨는 이타테의 대두 유전자가 담긴 된장이나 얼음떡이 다시 이타테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염원을 담아 100년 후, 200년 후를 내다보며 이러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평생을 지낸 아름다운 이타테 마을이 지금도 거기에 있고, 농업을 이어가겠다고 결심한 아들이 있는데도 100년 후, 200년 후를 생각해야만 하는 에이코 씨의 가슴은 분하고 억울할 뿐이다.
이타테에는 풍작을 일궈내는 자연과 그 은혜를 담은 식문화가 있었다. 밀가루로 우동면을 뽑고, 메밀을 빻고, 쌀은 물론이고 시금치, 무, 감자 등 고기, 생선 이외에는 모두 충당할 수 있는 자급자족의 마을이었다. 산에 가면 봄에는 머위대, 청나래고사리 가을에는 버섯류가 식탁을 화려하게 채웠고 마을 사람들은 그것들을 얼음떡, 얼음두부, 얼음무, 장아찌로 가공하여 식문화를 만들어왔다.
▲ 이타테무라에서 난 대두로 사이타마에서 숙성시킨 종자 된장을 건네받는 에이코 씨(왼쪽) . 사이타마의 가설주택에서 피난생활을 하는 이타테의 주민들은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날 날을 그리며 전통의 식문화를 전수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 페민-후루이 미즈에
이타테의 주민들은 1차 산업을 유린하는 일본정부의 농업 정책에 우롱 당하면서도 어금니를 깨물고 땅을 지켜왔다. 에이코 씨의 아버지는 전쟁에서 돌아온 후 식량 증산이라는 모토에 따라 숲을 개간해 밭을 일구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에이코 씨도 그것을 도왔다. 결혼 후에는 쌀과 담배 재배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때때로 냉해가 덮치는 기후 때문에 안정된 수입을 얻기 어려워 낙농업을 시작해 세 자녀를 키웠다.
“나라의 흐름에 거스르더라도 선조 대대로 전해져온 땅을 지키는 것이 땅에 사는 자의 사명이지. 발버둥 치면서도 땅에서 살고, 자연의 은혜를 받으며 ‘아, 살아있다’는 실감을 맛보면서 살아왔어. 그런 사람들이 방사능에 쫓겨 가설주택에서 생활하다니… 그 심정이 어떨지 정말 헤아릴 수가 없지.”
험난한 가설주택 생활, 깊어가는 불안
이타테에는 노부모, 부부, 손자로 이루어진 다세대 가정이 많았다. 그러나 가설 및 임대주택이 협소하고 피난시기가 서로 어긋나거나 직장문제 등으로 세대별로 나누어지고 말았다. 다테시의 가설주택에는 고령자가 많고, 젊은 부부와 자녀들은 떨어진 마을에 살게 되어 떠들썩한 손자들의 목소리는 저만치 멀어지고 만 것이다.
같은 지역 사람들도 몇 군데의 가설주택 지역으로 분산되어 거의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다. 가설주택 또한 큰방 두 칸에 부엌이 딸려있는 널찍널찍했던 이타테 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옆집과 분리시켜주는 것은 얇은 벽 한 장이다. 농사도 지을 수 없어 운동부족 때문에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도 많다.
최근 2년 간, 이타테무라 주민 170여명이 피난처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이타마에서 생사를 달리한 아흔 둘의 남성은 피난이 결정될 당시 “나는 쌀과 된장만 있으면 여기서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니 가지 않겠다”며 집에서 나가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립고 돌아가고 싶은 이타테이지만, 가보면 눈에 보이는 것은 곰팡이가 슨 집과 멧돼지가 파헤친 밭뿐이다.
“제아무리 훌륭한 집이어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죽어버려. 마을도 마찬가지지. 보는 것만으로도 슬퍼져.” 그래서 에이코 씨는 최근에는 마을에 가보지 않는다.
마을은 주민들을 다시 맞이하기 위해 제염(방사성 물질을 제거하는 것)을 진행하고 있지만, 제염을 한다 해들 사람이 살 수 있을 만큼의 수준으로 방사선량이 내려갈지 알 수 없다. 행정이 정해놓은 기준이 정말로 안전할지, 그 기준을 맞추면 젊은이들이 돌아올지도 걱정이다. 주거가 가능하다고 결정 되었다는 이유로 도쿄전력으로부터 받고 있는 보상금이 끊어지는 건 아닐지, 게다가 밭작물이 방사능의 영향으로 팔리지 않으면 몇 푼 안 되는 연금만으로 살아가야 하는 건 아닌지, 마을 주민들의 불안은 깊어가기만 한다.
‘핵발전소가 없었더라면…’
가설주택에는 주변의 밭을 빌려 야채를 재배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땅을 만져 조금이라도 방사능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일시적이라도 마을에서 생활하던 때의 기분에 젖고 싶은 거지.”라며 에이코 씨는 땅이 우리 몸에 주는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씨를 뿌리고 싹이 돋고 열매를 맺고 그것을 따먹고 ‘맛있다’고 느끼는 기쁨. 에이코 씨는 “태양과 땅과 자신이 일구어온 농사의 기술”에 감사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인생도, 마을의 미래도 보이지 않는, 서서히 목을 죄어오는 듯한 불안 속에서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위한 방책에 불과하다.
“몇 만 번이고 ‘핵발전소만 없었어도’라고 생각했는지 몰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남겨진 인생은 내 나름대로 선택하며 살 생각이야.”라고 스스로 각오를 다지는 에이코 씨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작성- 오카다 마키, 번역- 고주영)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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