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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연재를 마치며
[현대문명과 거리를 둔 채, 산골에서 자급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도은님의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연재를 마감합니다. 지난 6개월 간 ‘책 읽기’라는 끈으로 성실하게 독자들과 만나온 필자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 http://www.ildaro.com]
우리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원전’
▲ 2011년 3월 21일,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는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3호기 © 일본 여성언론 <페민> 제공 사진
일본 후쿠시마에서 원전사고가 난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일본과 한국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핵 발전의 위험성이 널리 알려지고 반핵에 대한 공감이 크게 이루어졌을까? 국가의 에너지 정책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성과 성찰이 일어나서 기존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을까?
안타깝지만 아니다. 일본에서는 원전 옹호세력이 압도적 다수로 정권을 차지했고, 한국에서도 원자력 발전으로 큰 이득을 취하고 있는 보수 세력 대표가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개개인들 중에는 나처럼 후쿠시마 사고를 지켜보면서 핵 문제에 대해서 개인적인 자각을 한 이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국가권력과 자본의 이해가 비열하게 야합해서 국민을 속이는 대표적인 상황이 원자력 발전이라는 걸 깨닫게 된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류 언론은 더 이상 원전의 안전성 문제나 핵무기나 방사능 문제를 이슈화하지 않는다. 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이라더니, 마치 그런 암담한 문제 같은 것은 없다는 듯이 굴고 있다. 보자기로 시한폭탄을 살짝 덮어놓고 그 옆에서 땅 따먹기 놀이를 하는 백치들처럼 말이다.
왜 그럴까? 사람들이 너무 피곤한 것일까? 고도로 파편화된 기술 사회,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에 바쁘게 적응하느라 다들 피로에 절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여기’의 순간적인 소비와 쾌락에 젖어 있는 것일까?)
하지만 핵 문제는 인류의 생존이 걸린 참 심각한 문제이다. 재앙이랄 수 있는 이 엄청난 상황을 이용해서 패권을 차지하고 이득을 얻으려는 세력들을 견제하고 막으려는 움직임이 왜 활발하지 않은 것일까? 이 사실이 내게는 더 큰 문제처럼 여겨진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원자력 마피아 세력의 힘이 그만큼 거대하다는 뜻인가? 정치가, 관료, 경제계의 무한 이익 추구가 모든 인간들과 여러 생명체들의 생존의 권리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중국이 경제적, 군사적 대국으로 등장하면서 엄청난 수의 원전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그 대부분이 한반도 서해안이 가까운 바닷가에 건설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한반도는 위험한 원자력발전소들로 완전하게 포위되어 있는 꼴이다. 지금 전 세계에 새로 건설되고 있는 핵발전소의 절반 이상이 중국, 일본, 한국에 몰려 있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그냥 고개 돌리고 모르는 척하기에는 우리의 생존이 너무나 위태롭고 아슬아슬하다.
핵의 평화적 이용? 핵은 군국주의와 가깝다
▲ 한홍구 서경식 다카하시 데쓰야 공저 <후쿠시마 이후의 삶: 역사, 철학, 예술로 3.11 이후를 성찰하다>
최근에 출간된 <후쿠시마 이후의 삶>(한홍구, 서경식, 다카하시 데쓰야. 반비, 2013)을 읽다 보면, 위기와 혼란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고 전쟁에 패망한 일본에서 후쿠시마란 재앙은 왜 일어났을까? 이 대담집은 이런 문제의식을 출발점으로 한국과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 세 사람이 2011년 11월부터 1년여에 걸쳐 후쿠시마, 합천, 서울, 도쿄, 제주, 오키나와를 오가며 여섯 차례 좌담을 나누었던 기록이다. 마지막 좌담은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인 작년 12월에 이루어졌다.
한국의 역사학자인 한홍구, 재일조선인 지식인 서경식,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 다카하시 데쓰야는 모두 핵에 대해서는 비전문가들이지만, 핵 문제의 해결을 전문가 집단에게만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핵무기가 사용되는 형태이든, 핵발전소에서 심각한 사고가 일어나든 간에 일단 문제가 터지면 그 피해를 입는 것은 전문가 집단이 아니라 광범위한 일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핵문제에 관한 전문가의 절대 다수는 ‘원자력 마피아’ 집단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핵무기와 핵 발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핵으로부터 이익을 보는 집단이 아니라, 사고가 발생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되는 일반 대중 속에서 보다 많이, 보다 크게 나와야 할 것이다.” (한홍구)
새누리당 비례대표 1번은 원자력 공학을 전공하고, 그 문제 많은 고리원전 1호기의 수명연장에도 깊이 관여한 여성과학자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이차대전 이후 20세기에 내내 그리고 지금도 미국의 입김이 얼마나 대단하게 남북한과 일본의 체제를 쥐락펴락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남북한은 아직 완전히 전쟁을 끝낸 게 아니고 휴전 중일 뿐이다. 미일안보조약, 한미안보조약 등으로 미국은 자국 군대를 일본 오키나와와 한국 전역에 합법적으로 거리낌 없이 주둔하고 있고, 냉전 시대 동안 미국의 치열한 핵개발 경쟁의 역사 속에서 일본과 남한 정부는 ‘핵의 평화적 이용’ 운운하며 원자력 발전소를 수십 기씩 지었다.
이 책의 대담자들처럼 나도 ‘핵의 평화적 이용’이란 말은 엄청난 사기라고 생각한다. 원자력 발전의 배후는 사실 평화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핵무장 군사력의 문제, 언제든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국가주의와 군국주의의 문제라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후쿠시마 사고로 원전은 안전하지도 않고 비용 상으로도 손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는데도 일본이 핵보유국으로 가려는 저의는 무엇일까? 혹시 핵무기화 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소유함으로써 핵 클럽의 일원이 되겠다는 것이 아닐까? 일본의 보수 우경화는 ‘우리는 한때 동아시아 전역을 집어삼켰던 군국주의 국가였노라. 그리고 여전히 힘센 강대국임을 보여주겠노라!’라는 악에 받친 외침처럼 내게는 들린다.
그렇다면 한국은? 그동안 경제적으로 죽자 살자 일본 따라 하기를 해온 전력을 후쿠시마 이후, 이제는 멈춰야 할 때가 아닌가? 그런데 수십 기가 가동 중인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들이 얼마만큼 생산되어서 누구의 주도하에 어디로 갔고, 가고 있는지를 아는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누구 아는 사람 있으면 좀 알려 주시라!)
“저는 원전 시스템을 ‘희생의 시스템’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시스템은 타인의 생활이나 생명, 존엄 등을 희생한 위에서만 이익을 내고 유지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여기서 그 이익을 취하고 유지하는 자들은 결국 국가권력이나 자본입니다. 국가가 국민을 속이고, 내버리고, 무시하는 문제점은 각 나라의 원전 추진 세력들이 공유하는 특성입니다. 나아가 원전뿐만이 아니라 핵무기 문제를 포함해 핵을 둘러싼 정치, 경제, 군사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아닌가 합니다.” (다카하시 데쓰야)
“사실 핵무기를 들여오거나 내보낼 때 미국은 한국 정부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어요. 더욱 놀라운 건, 사용할 때도 한국 정부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사단장의 권한으로 무기를 쓸 수 있으니까요. (...) 한반도에 미국 핵무기가 많은 때는 1000여기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것에 대해 한국은 전혀 주권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주권이 아니라 생존권이 미국에 위임돼 있었다고 할 수 있겠죠.” (한홍구)
“제주도 강정에 해군기지 건설을 강요하는 국가의 논리, 혹은 농간이라는 게, 원전을 세우려는 국가의 논리 혹은 잔꾀와 굉장히 비슷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현지 주민들이 서로 갈라서게 되고, 참 어려운 싸움으로 이어지는 모습도 많이 닮았습니다. 현재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기지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다카하시 데쓰야)
“한국의 경우 정부와 미국과의 관계가 일본 정부보다 훨씬 더 식민지화되어 있습니다. 제주도 강정 기지 문제의 경우도 대리인인 한국 정부가 제대로 하고 있으니 미군이 전면에 나설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요? (...) 그러니까 강정이나 오키나와의 기지 문제는, 전쟁 전부터 이어져온 식민지주의나 제국주의 안의 희생의 구조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서경식)
어둡고 어려운 상황이다. 극단적인 선동이나 폭력 없이, 전쟁 없이 그리고 국가나 인종에 얽매이지 않고 살수는 없나? 사람들이 사소하게는 갈등할 테지만 크게는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 길이 도대체가 없는 걸까? 일본과 한반도 내부 문제를 비롯해서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국제 역학관계는 평화로 가는 이 길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동아시아의 현대사에서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지배를 인식하지 않고는 거의 모든 문제의 해결이 어렵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면서 또 깨닫는다.
변화와 저항의 열정을 가진 청년들에게
▲ 비판적 저널리스트였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젊은 회의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
하지만 후쿠시마 이후, 위기와 혼란의 시대에도 여전히 삶은 남아 있다. 살아갈 날이 많은 청년들은 어떻게 자기의 생각을 제대로 세워서 앞으로의 삶을 자존감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 <젊은 회의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크리스토퍼 히친스, 미래의 창, 2012)를 읽어보길 권한다. 꽤나 마음을 잡아 끌고 어떤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제목인 “Letters to a Young Contrarian”를 영어 뜻 그대로 “젊은 반대자에게 보내는 편지”로 번역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싶다. 이 책 내용은 이리저리 생각만 많은 회의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소수 반대파’로 살려는 용기 있는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이기 때문이다. 모두 열여덟 편의 편지가 실려 있다.
장담하건대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히친스는 고집 세고, 자기 생각을 가지려고 애쓰고, 어떻게든 자기 삶을 살려고 하는 청년들에게 계속 그렇게 나아가라고 격려한다. 침묵하고 순종하지 말라고, 다수와 다른 입장을 지닌 소수파에 속하는 것을 겁내지 말라고 북돋운다. 꼭 필요한 갈등과 논쟁을 슬쩍 피하지 말라고 유혹하기까지 한다.
크리스토퍼 히친스(1949-2011)는 그 자신이 그야말로 비판적인 소수 반대파 지성인이었다. 모든 비이성적인 것들에 대해서 성가시게 따지고 들었고, 종교제도를 강도 높게 비판했고, 국가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과 전쟁에 온몸으로 맞서 싸운 전투적 인본주의자였다. 조지 오웰을 높이 평가하는 그는 오웰보다 훨씬 논쟁가였으며, ‘밥 먹듯이 반대 의견을 내뱉는’ 진보적 저널리스트로 평생을 살았다.
“소수 반대파로 살아가기에 적합한 시대는 없다네. 대중에 동조해서 동질감이나 소속감을 얻으려 하는 건 모든 시대에 걸친 인간의 본성이니까 말일세. (...) 어쩌면 자네에게도 독단적인 권위나 어리석은 군중심리에 맞서 저항하고픈 기질이 숨 쉬고 있을지도 몰라. 또는 자유로운 사상가가 쓴 문구를 읽다가 문득 변화를 추구하고픈 열정을 느낀 걸 수도 있네.”
“삶이 존재하는 곳에는 늘 불일치, 분열, 갈등이 있기 마련일세. (...) 나는 인간이 모든 갈등이 해결되고 늘 만족과 행복이 지속되는 이른바 ‘정신세계의 디즈니랜드’를 열망하지는 않는다고 확신하네. 이런 상태는 문자 그대로 백치 상태라고 할 수 있어. 그리고 우리가 이런 상태를 열망한다고 해도 (다행히도) 그 상태에는 결코 도달할 수가 없다네.”
“문제는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도 지성의 소멸을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네. 그리고 지성이 주는 기쁨과 보상에는 분노, 불확실성, 갈등, 심지어 절망이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어.”
“물론 충돌은 고통스러워. 하지만 어떤 사안에서도 고통 없는 해결책이란 존재하지 않네. 오히려 고통 없는 해결책을 추구하다간 아무런 요점도 없고 아무런 생각도 없는 해결책이 도출된다는 점에서 훨씬 고통스런 결론이 나올 수 있지. 그건 현실도피의 극치야. 하지만 우리는 정직한 논쟁보다는 ‘치유’가 중요하다는 진부한 주장을 들으며 살아가지.”
요새 한국사회에서 유행하는 ‘힐링’ 붐에 대해서 시원한 비판을 해준 것 같아서 이 구절을 읽을 때 나는 속이 후련했다. 사회 지도층이건 대중들이건 입만 열면 힐링, 치유 어쩌고 하는 게 솔직히 눈살이 찌푸려졌다. 문제의 근원을 따지는 것은 골치 아프니까 그냥 저냥 덮어버리자는 압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문제의 원인을 밝히지 않고 어떻게 치유와 해결이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인가.
“벌거벗은 임금님 우화가 오랜 세월 살아남은 이유는 그 안에 조지 오웰이 다른 식으로 강조한 교훈이 담겨 있기 때문이네. 바로 사람은 눈앞에 분명히 보이는 걸 간과하기 일쑤라는 점이지. 나아가 우리 사회는 명백한 사실을 무시하라고 종종 압박을 가하곤 하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고, 인간이 생존한 이유도 이런 적응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적응력은 또한 위협이 될 수도 있어. 특정한 위험에 대해 불감해지고 그러다 보면 위험을 너무 늦게 알아채게 되는 거지. 가장 극명한 예가 바로 핵무기 비축이라네. (...) 자네 목숨은 자네 동의를 얻지 않은 이들의 권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며, 그들은 자네를 일회용 소모성 부품 정도로 여기거든.”
“소속감과 안정감을 추구하는 본성 때문에 인간은 때로 치명적이고 터무니없는 상황도 수용한다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고 나면 인간은 마치 그런 힘든 상황이 스스로 원해서 벌어진 것처럼 행동하기 마련이라네.”
히친스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 눈에 짜증나고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사실도 솔직히 고백한다. 그럼에도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삶의 기쁨과 소수 반대파로 살아가는 삶의 즐거움도 발랄하고 위트 있게 이야기한다.
“나는 천상에 내 삶을 관장하는 가부장적 존재가 있다는 생각이 너무나 끔찍하네. 이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떠올리면 고독과 유배, 그리고 스스로 살아간다는 게 힘들게 여겨지기보다는 오히려 위안이 된다네. (그리고 이런 가혹한 유배생활을 해보고 나면, 자신처럼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다른 동지들을 더 존경하고 더 사려 깊게 대해줘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지. 그렇다고 너무 큰 위안은 기대하지 말게나.)”
에필로그 - 연재를 마치며
▲ 봄꽃이 피고 지는 것을 멈춰서 바라보자. © 일다
지난 가을부터 6개월 가까이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들”을 내 의지대로 골라서 열흘에 한 번 꼴로 글을 써왔다. 이제 봄이 되어 농사일과 개인적인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 연재를 마치려고 한다. 어떤 주제에서는 좀더 확실하고 깊이 있는 사유를 펼치지 못한 듯해서 아쉬운 점도 있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는 열심히 책들을 읽었고, 글을 썼고, 청년들에게 함께 생각해보자고 말을 걸었다.
나한테는 이 연재가 의미가 있었으며 재미도 있었다. 새로 알게 되고, 스스로를 반성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된 사실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밝히지만 이 연재에는 나름의 의도 같은 게 분명히 있었다. 처음 이 글 연재를 떠올린 것은 내 생각을 꼭 읽어주었으면 싶은 한 사람의 청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 마음 속에서 이 한 사람의 청년은 점차 두 사람, 네 사람, 다섯 사람으로 늘어나더니 지금은 꽤 많아졌다. 이런 내 의도가 성공했는지 아닌지는 세월이 지나보면 알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하여간 글을 읽은 청년들과 다른 독자들에게 나는 과연 생각할 거리들을 조금이라도 던져주었을까? ‘책 읽기’라는 끈으로나마 우리는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을까? 어쨌든 나는 춥고 긴 겨울날들을 어떤 문제들을 곰곰 생각하며 마당과 산길을 서성인 적이 많았다.
여기에 소개된 책들 중 일부는 연재 이전에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읽었던 책들이다. 또 이 연재를 위해서 새로 구입해서 읽은 책들도 많다. 물론 읽었다고 모두 소개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책을 마음대로 사볼 만큼 넉넉하지는 않은 내 주머니 사정을 알아차리고서 이 기간 동안 책들을 사볼 수 있게 개인 후원을 해준 오랜 친구 한과 란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고맙다, 친구!” 그리고 가장 감사할 사람은 내 글을 좋아했든 싫어했든 간에 이 연재를 꾸준히 읽어준 독자들일 것이다. “그대들의 지성이 활기차고 생생하게 활동하길!”
오늘날 대중의 의견은 과거보다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 쉽게 조작되고 있다. 나는 여론조사 같은 것들에 아주 많은 의구심을 품고 있는데, 세상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바꾸기 위해 여론을 조장하고 만들어내는 세력이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이런 시대에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젊은이들이 어떻게 자기 생각을 세우고, 자존감 있게 살 수 있는지를 많이 생각했다. “좋은 책 찾아 읽기”가 유일한 길은 아니겠지만, 그나마 고요하고 깊이 있게 다가갈 수 있는 하나의 길이라고 여전히 생각한다. 너무나 시끄러운 시대에 사람들이 별로 가지 않아서 조용한 길은 그 자체로 너무 귀하고 소중하지 않나.
자욱하게 떠도는 파편화된 정보들에 혹하지 않으려면, ‘대중의 의견’은 언제나 먼저 조종된 후에 발표되는 것은 아닐까 의심을 품어야 한다고 믿는다. 아무 생각 없이 남들의 생각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자기의 생각이 있어야 한다. 즉,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생각을 갖고서 세상을 살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히친스의 조언을 들려주며 이 글 연재를 마친다.
* 아무리 귀에 달콤해도 이성적이지 않은 것을 경계하라.
* ‘초월적인 경험’을 주장하면서 무언가에 복종하라고 말하거나 자신을 바치라고 말하는 이들의 말은 듣지 말라.
* 남의 동정을 믿지 말고, 자신과 타인의 존엄성을 더욱 중요하게 여겨라.
* 남들 눈에 교만하고 이기적으로 비치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
* 모든 전문가를 그저 포유동물로 여기라.
* 불공정과 우둔함을 절대로 방관하지 말라.
* 침묵은 무덤 속에서도 한없이 할 수 있으니, 논쟁과 반목을 기쁘게 찾아 나서라.
* 남들이 그대에게 맞춰 살아가길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그대 또한 남에게 맞춰 살아가지 말라.
봄이 왔음을 온 마음으로 느끼고, 봄꽃이 피고 지는 것을 멈춰서 바라보자. 그리고 좋은 책들을 찾아 읽으면서 힘껏 자기의 길을 가기를! (도은)
[원문 보기] http://ildaro.com/sub_read.html?uid=6310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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