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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아맙이 만난 베트남 사회적기업
> (3) 청년개발 핸디크래프트 

 
아맙(A-MAP)은 공정여행과 공정무역을 통해 한국과 베트남을 잇는 사회적기업입니다. 아맙이, 베트남 곳곳에서 지역공동체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기업과 모임을 소개합니다. 필자 구수정씨는 아맙 베트남 본부장입니다. www.ildaro.com
 
■ <청년개발 핸디크래프트>를 소개합니다 
 
2005년에 설립된 <청년개발 핸디크래프트>(YOUTH DEVELOPMENT HANDI-CRAFT CO.LTD, 이하 '청년개발')는 취약 계층의 청년들과 여성, 장애인들이 생산하는 수공예품을 판매하고 있는 사회적기업이다.
 
베트남 남부의 연대와 개발 협동조합 <소데코>(SODECO, Solidarity & Development Co-operative)의 일원으로, 수익금의 일부를 노동자를 위한 숙소를 마련하고, 마을 공동화장실을 만들고, 소액대출 사업을 하는 등 지역발전기금에 환원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의 공정무역 협동조합 <아르티장스 뒤 몽드>(Artisans du Monde)에 상품을 수출하고 있다.

▲ 아동복, 스카프 그리고 인형, 장신구 등 다양한 수공예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청년개발> © 아맙  

현실이라는 벽 앞에 날개를 펴지 못하는 수많은 젊은이들. 그들과 함께 손을 잡고 언젠가는 날수 있다는 믿음으로 즐거운 비행 연습을 하는 <청년개발>의 이야기를 쩐 티 미 찌 부사장을 통해 들어본다.
 
한국남성과의 결혼 바람이 불어닥친 가난한 마을에서
 
“너도 한국 남자한테 시집갈래?”
 
찌의 고향은 베트남 남부 메콩 델타의 빈롱성. 어린 시절 그녀의 마을에는 한국인 남성과의 결혼 바람이 불어닥쳤다. 마을의 다른 친구들은 중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하고 집안일을 돕다가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 남자와 결혼해 고향을 떠났다.
 
다행히 찌의 부모는 고등학교까지 그녀를 뒷바라지해주었고 덕분에 그녀는 친구들과는 전혀 다른 삶,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그 힘겨웠던 20대에 그녀를 도와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찌는 자신이 누린 행운을 지금의 청년들에게 돌려주고자 <청년개발>을 시작했다.

구수정(이하 수정): 2005년부터 사업을 시작한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공정무역을 하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 <청년개발> 부사장 쩐 티 미 찌 © 아맙 
 
쩐 티 미 찌(이하 찌): 제 고향은 메콩델타의 빈롱성이에요. 10대 시절, 제 고향에는 국제결혼 열풍이 아주 뜨거웠어요.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딸을 돈 많은 외국인 남편에게 시집보내려는 부모들이 많았죠.
 
다행히 저희 부모님은 그렇지 않았고 감사하게도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주셨어요.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농촌 부모들이 딸의 교육에 대한 인식이 약했기 때문에 중등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여성들이 많았는데 저는 행운아였지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저는 제 꿈을 좇아 20킬로그램의 쌀부대를 이고서 무작정 호치민시로 올라왔어요. 처음에는 봉제공장에서 일을 시작했고 설거지, 서빙, 막일까지 가리지 않고 일을 했지요. 그리고 밤에는 야간 대학을 다니면서 공부를 계속해 결국 2000년에 호치민시 개방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게 되지요.
 
그 후 저는 국제가톨릭학생회(International Young Catholic Students)에서 일을 하면서 빈흥호아 공동묘지 안의 천막촌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길 위의 아이들을 위한 직업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어요. 그러한 일들을 하면서 어려운 환경에 처한 아이들과 청년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에게 일시적인 지원이 아닌 꿈과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죠.
 
취약계층 청년들의 지속가능한 자립을 꿈꾸며
 
수정: 국제가톨릭학생회에서 계속 활동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청년개발>을 창립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 먼저, 국제카톨릭학생회에서 진행되는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외부의 지원에 의존한 것이라 그 지속가능성이 불투명했고, 학생들이 직업훈련 교육을 받는다 하더라도 취업으로 연결되지 않는 한 그들이 과정 수료와 동시에 다시 불확실한 미래로 내던져지는 것은 매한가지였죠.
 
저는 그들에게 보다 확고한 자립의 기틀이 되고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사업을 고민했어요. 그래서 직업훈련 과정에 수공예품 생산을 포함하고 상품의 개발, 디자인, 제작에서 마케팅, 직접 판매까지 지원하는 사업제안서를 만들어 제출했지요. 헌데 단체에서는 본래의 자선사업의 취지를 벗어난 이익사업이 될 수도 있다며 반대했어요. 결국 저는 2004년에 국제가톨릭학생회의 한 친구와 함께 <청년개발> 사업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사업 경험이 없었고 좋은 품질의 상품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지요. 우리들의 취지에 공감해 한 번은 물건을 사도 그 뒤로는 다시 찾지 않았어요. 오래지 않아 회사는 파산 지경에 이르렀고 한때 전화비 등 공과금은 물론 라면 살 돈도 없을 정도로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어요.
 
결국 함께 했던 친구가 먼저 <청년개발>을 떠났죠. 저 또한 사업을 포기할 결심으로 살아생전 저를 아끼고 돌봐주셨던 신부님의 무덤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죄의 눈물을 흘렸지요. 그런데 그 순간 다시금 신부님의 가르침이 떠올랐고 결국 다시 한 번 사업을 정비해 오늘에 이르렀지요. 
 
공정무역을 몰라도 공정했던 그들 
 
수정: <청년개발>은 현재 수공예품을 공정무역하고 있는데요, 어떻게 공정무역과 인연을 맺게 되었나요?
 
: 처음 <청년개발>을 시작할 때는 공정무역이 뭔지, 또 사회적기업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지요. 2006년에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전통수공예품 박람회에 참가한 적이 있어요. 제가 <청년개발>에 대해 소개하자 사람들이 “당신은 공정무역을 하고 있군요”라고 말해줘서 그때 처음으로 공정무역에 대해 알게 되었지요. (웃음) 그리고 그들을 통해 <소데코>를 알게 되었어요.
 
<소데코>는 베트남 남부에 있는 협동조합으로 <청년개발>도 2008년에 가입을 했고, 현재 <청년개발>의 모든 수출은 <소데코>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어요. 우리의 주요 수출국은 프랑스인데 <아르티장스 뒤 몽드>라는 공정무역 협동조합과 거래를 하고 있어요. 현재 프랑스 전역에 125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고 35년간 공정무역을 해온 단체로 <소데코> 상품의 품질이 좋지 않았던 때부터 지속적인 구매를 해 우리를 도와준 아주 고마운 단체예요. 
 
수정: 말씀해주신 <소데코>에 대해서도 궁금하네요. 현재 <소데코>에는 어떤 단체가 참여하고 있고 어떠한 사업을 벌이고 있나요?
 
: 저는 <청년개발>을 소개할 때는 항상 <소데코>도 함께 소개해요.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죠. 현재 총 5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는데 <청년개발> 이외에 죽제품과 커피를 생산하는 <쯔엉선>(Truong Son), 락커화 제품을 생산하는 <쯔엉미>(Truong My), 수공예품 생산자조합 <단결>(Ket Doan), 봉제생산업체 <새로운향>(Huong Moi)이 있어요.
 
<소데코>를 통한 수출에서 얻은 수익금의 일부를 노동자들을 위한 숙소 건립, 지역 사회의 취약 계층을 위한 소액대출사업과 화장실 건립 사업, 그리고 소수민족을 위한 장학금 지원 사업 등에 환원하고 있어요. 처음엔 공정무역의 공동체발전기금(Social Premium)이란 개념에 대해서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소데코> 회원들이 회의를 통해 결정한 사회 환원 사업이죠.
 
저희는 민주적인 조직 운영, 투명한 경영 등의 원칙을 갖고 사업을 이어왔고 생산과정에서도 아동노동과 강제노동 금지, 친환경적 생산 등 나름의 원칙을 지켜왔어요. 그리고 현재는 국제공정무역기구(IFAT)의 기준에 맞는 공정무역 관련 인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소비자의 연민 아닌 ‘공생’

 
수정: <청년개발>에는 어떠한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나요?
 
: 먼저 아까 매장에서 만났던 두 명의 친구부터 소개하죠. 그들은 예전에 제가 국제가톨릭학생회에서 가르쳤던 학생이었어요. 처음 만났을 땐 폐지와 빈 깡통, 빈 병 등 폐품을 주워다 팔면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죠. 지금은 <청년개발>에서 일하면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어요.
 
그리고 호치민시 외곽의 12군에 <청년개발>의 공장이 있는데 현재 약 30명이 일을 하고 있어요. 90퍼센트가 여성이고 이중 절반이 장애인 노동자에요. 처음 공장 터를 물색할 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고민하다가 아예 노동자 숙소 몇 동을 얻어 공장을 차렸어요. 아이를 둔 여성들이 육아와 노동을 병행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였죠. 저도 늦은 출산으로 육아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데 가난한 여성들은 육아 때문에 직장을 포기할 순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배려와 지원이 꼭 필요하다고 봐요.
 
또한 저희는 생산자들이 장애인이다, 여성이다, 빈곤층이다 등의 광고는 하지 않아요. 오로지 <청년개발>, <소데코>라는 이름으로 상품을 판매하고 소비자에게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어요. 우리가 원하는 건 동정이나 일방적 지원이 아닌 생산자와 소비자의 공생이었으니까요.

▲ <소데코>에 참여하고 있는 수공예품 생산자조합 <단결(Ket Doan)> 생산 현장     ©아맙  

현재 절실한 과제는 ‘사업 전문성’ 갖추는 일
 
수정: 사회적기업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베트남 사회적기업지원센터(CSIP)와는 어떤 교류를 하고 있나요?
 
: 몇 년 전 <CSIP>가 베트남 남부의 사회적기업 현황 조사를 위해 <청년개발>을 찾아왔어요. 역시 <CSIP>를 통해 ‘우리가 하는 일을 바로 사회적기업이라고 부르는 구나’라고 알게 되었죠. 베트남에 약 200여 개의 사회적기업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요. 지난 6월에는 <CSIP>가 주최한 사회적기업인 훈련 프로그램에 참석해 경영 컨설팅, 회계, 홍보, 마케팅 교육을 받았어요. 저도 산전수전 다 겪으며 안 해본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기업가로서는 부족한 점이 참 많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죠.
 
하노이에서 열린 사회적기업인 세미나에도 참석해 동료 기업인들과 교류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좋은 경험이 되기도 했어요. 예전에는 제가 하는 사업이 NGO도 아니고 일반 기업도 아니어서 다른 단체나 고객들에게 <청년개발>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는데요, 이제는 공정무역과 사회적기업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면서 <청년개발> 사업에 대한 확신이 더욱 강해졌고 연대의 틀을 넓힐 수 있게 되었지요. 
 
수정: 사업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앞으로 <청년개발>을 어떻게 꾸려가고 싶은지에 대한 포부를 듣고 싶습니다. 
 
: 가장 어려운 점은 사업에서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에요. 생산, 마케팅, 홍보, 관리 등 모든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추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발전이 어렵다는 걸 절감하고 있어요.
 
가끔 사람들이 그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청년개발>을 포기하지 않고 고집하는 이유를 물어올 때가 있어요. 글쎄요, 이 감정을 뭐랄까요, 열아홉의 나이에 20kg의 쌀부대를 짊어지고 의지할 만한 피붙이 하나 없는 생경한 도시로 올라와 각박한 세상을 살아야 했던 저에게 지금의 어렵고 가난한 젊은이들이 결코 남으로 느껴지지가 않아요. 그들과 더불어 살 때만이 제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고 그들과 함께하면서 제 과거가 치유되는 것도 느낄 수 있어요.
 
앞으로 좀 더 사업을 정비하고 내실을 다져서 <CSIP>에 사회적기업 지원금 응모도 할 예정이고 여행자들이 <소데코>의 생산자 조합을 직접 방문하고 체험하는 공정여행 프로그램도 구상하고 있어요. 비록 여전히 어렵고 힘들지만 멈출 수야 없죠. 그것이 바로 청년의 힘이고, 청년이 세상을 사는 법이기도 하니까요.

*기록 정리 : 권현우 (아맙 마케팅 팀장)/ 쩐 티 뚜잇 호아 (아맙 직원)
 
아맙 카페 주소: http://cafe.daum.net/doanhnhanxahoi
연락처: 070-7554-5670 (베트남 사무소)
후원계좌: 신한 110-313-503660 (예금주: 김규환)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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