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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역사] 박정자 ‘사할린동포 자치회’ 회장 인터뷰

75년전, 일제에 의해 강제이주 당하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삶, 그리고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보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기사를 연재합니다. 최상구님은 지구촌동포연대(KIN) 회원으로 사할린 한인 묘지조사 후속작업, 영주귀국자 인터뷰 등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 www.ildaro.com

 
귀국한 동포들을 만나자! 드림팀을 만들다
 
2012년 6월, 스물두 곳의사할린 한인 영주귀국 현장을 모두 방문하여 국내 귀국한 동포들을 만나자는 원대한 꿈을 꾸며 인터뷰팀이 구성된다. 이름도 ‘드림팀’.
 
현재까지 4천여명의 사할린 한인이 영주귀국을 했다.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가거나, 사망하신 분을 제외하면 약 3천명 정도가 서울, 경기, 인천, 충청, 강원, 부산, 경남 등 22개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함으로써, 일제의 강제동원 역사를 고발하기 위한 증언과 사례를 축적하는 것이 ‘드림팀’의 목적이었다.
 
팀원들이 자비로 시간과 비용을 부담하며 인터뷰 작업을 진행하였고, 6월부터 9월 사이에는 사할린에 방문하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어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인천 논현동에 인터뷰하러 갔다가 소래포구에 들러 회 한 접시 함께 먹는 소소한 재미는 ‘드림팀’을 유지하는 윤활유가 되었다고나 할까.
 
무국적자의 설움 “버스에서 내려라 하거든요”
 
2012년에 찾은 김포 솔터마을. 아직 주변 아파트의 공사와 입주가 끝나지 않아 조금 외진 곳이었다. 이곳에는 2011년에 영주귀국한 분들께서 살고 계신다. 사할린동포자치회 박정자 회장님 댁을 방문하니 여러분이 함께 나와 우리를 맞아 주신다. 

▲ 러시아에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박정자 ‘사할린동포 자치회’ 회장님  ©최상구 

“이 한강신도시 여기는 전체 35집에 귀국했는데 그러니까 70명이죠, 70명. 여기에 귀국했습니다. 근데 그러니까 우리들은 다 사할린 출신자들이고, 사할린 다음에 하바롭스크 이사 간 그 사람들도 그쪽에서 여기로 귀국했고. 모스크바에서도 오신 분 두 분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들은, 여기 부모들은 다 사할린 땅에 파묻혔습니다.”
 
무국적(無國籍). 1945년 이후 사할린에 남겨진 한인들은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했다. 전쟁에서 패한 일본은 남사할린에 남겨진 일본인을 송환시키면서 조선인은 배제시켰다. 그 와중에 소련은 국적법에 따라 사할린 한인을 무국적자로 규정하였다.
 
“근데 우리한테는 제일 처음에 국민증을 안 줬거든요, 러시아 국민증. 그러니까 무국적이라 해서 (사할린에서) 나갈 때 마다 비자를 받아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되는 데에요. 그래서 저도 공부하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울기도 많이 울고 버스타고 다니고 다른 도시 가다가 잡혀가지고 다시 돌아 집으로 보내고. 어떨 때는 버스 가다가 내려라하거든요, 내리면 걸어서 가야해요. 그렇게들 했어요. 그렇게 살았어요.”
 
20만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귀환하면서 사할린 내 노동력 부족 위기에 직면한 소련은, 한인들을 무국적자라는 취약한 위치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결국 이들을 사할린에 억류시킬 수 있게 되었다. 무국적자는 러시아 대륙뿐만 아니라 거주지에서 4km 이상의 다른 지역으로 가지 못했다. 아예 행정구역 밖으로 못 벗어났다.
 
“사할린에는 대학 같은 거 없지 않았습니까. 그때 시대에는 사범대학 있었지. 그러니까 다른 거 배우려면, 다른 대학에 가려하면 사할린에서 나가야하니까. 나가야하는데 나갈 때마다 비자를 제때 안주고. 저도 많이 울었어요. 내일 시험 쳐야 되면 오늘 가라고 나오지 않았어요. 오늘 가라고 나오면 여름 땐 비행기 표를 못 사서 못가지 않았습니까, 제때. 그러니까 늦어가지고 가니까. 울기도 많이 울고 했어요. 우리 동생들은 내일 시험인데 오늘 가라했어요. 오늘 밤에 떠서 비행기가, 거기서 시험 치러 바로 대학에 들어가서. 아침에 도착하자마자 시험치러가고. 그러니까 떨어지는 사람도 많고, 못 붙는 사람도 (많고).”
 
무국적자 사할린 한인들은 취업 자체도 제한적이었거니와, 급여나 진급에 있어서도 또한 차별을 받았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나라뿐만 아니라 어떠한 나라로부터도 신변의 안정을 보장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당연히 당시 소련 사회에서 소련인들과 동등한 위치를 가지기는 힘들었다.
 
“그때 말하자면 부모님들이 참 힘들었어요. 만약에 무슨 똑같은 일을 해도 러시아인들보다 2배나. 다른 분들보다 10배나 돈을 적게 받아요. 우리 한인들 그랬어요. 그때시기부터 소련 국적 받으면 차별이 없었어요. 우리 아버님은 그냥 조선 국적을 가지고 있었어요. 조선 국적 가지고 있다가, 무국적이었다가, 사망하실 때쯤 소련 국적 가지셨지요.”
 
무국적자에 대한 차별은, 이후 많은 사할린 동포들이 북한 국적을 취득하게 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차별은 고향에 대한 향수와,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대학 무상교육’ 선전, 북한으로 간 한인들
 
사할린으로 강제 동원되었던 조선인들은 대부분 탄광과 벌목, 제지 관련 공장에서 일했다. 험난한 노동을 했던 1세대들은 자식에게만큼은 이러한 처지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자녀들의 교육에 신경을 썼다.
 
“우리 부모님들은 고생이 참 많았어요. 처음엔 일본말도 모르니깐 여기 사할린에 들어오자마자 일본사람들하고 얘기하려고 겨우 일본말을 배웠는데, 또 러시아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잖아요, 그니깐 또 러시아 말을 배워야지. 여자들이야 통 힘들지. 그래서 뭐 어디 직장에서 직장생활하는 것은 거의 어려웠죠.”

▲ 김포 솔터마을에서 만난 사할린 동포들     © 최상구
 
“우리가 그렇게 살았으니까 꼭 공부해서 이겨야 된다. 그래가지고 아이들도 공부시키면서 집에서 (공부)시킬 때 꼭 너희들은 공부 잘해도 러시아 사람보다는 한층 더 올라가야 같게 공부하고 같게 일할 수 있다고 그렇게 키웠어요.”
 
불안한 신변의 조건을 극복하는 것. 그만큼 긴장의 연속이고 치열한 삶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할린 한인들에게 교육의 기회와 국적 취득을 선전한 것이 북한이었다.
 
1950년대와1960년대에 ‘대학교육 무상실시’ 등을 내걸면서 북한으로 입국을 선전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 국적을 취득하고 북한으로 입국하는 한인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한인들의 높은 교육열과, 무국적으로 인해 겪는 불이익 때문에 북한행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사할린 한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곳이었다. 북한은 사할린 한인들에게 조국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남한과의 경쟁 속에서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것 이상은 아니었다.
 
“그때가 그러니깐, 50년대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시골에서 몇 사람 북조선으로 나갔다가 들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살다가 살다가 너무 못살아서 수단을 수단을 써서 다시 들어왔습니다.”
 
“젊은 청년들도 많이 갔습니다. 그때가 61년도, 우리 형님들 세대가 많이 나갔습니다.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습니다. 소식이 없으니깐.”
 
국경 열리면 한국에 가야하는데…50년의 기다림
 
고향이 주로 남한지역이었던 사할린 한인들이 북한 국적을 취득했던 이유 중에는 ‘언젠가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도 있었다. 사실 무국적의 설움과 불이익을 감수하며 소련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던 것도, 언젠가 고향으로 가게 될 때 국적이 문제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북조선 국적을 받아야 된다고. 북조선이나 남조선이나 ‘조선은 하나다’라고. 그렇게 했거든요. 부모들은 무국적을 그냥 가지고 있었는데. 러시아 국적을 받을 수 있었는데, 왜 무국적 가지고 있었냐 하면, 언제나 국경 열리면 한국 돌아가야 하는데 러시아 국적 받으면 한국 못가면 어떻게 하는가? 그렇게 해가지고 그것이 50년 동안 잠기고 있었어요. 그니까 무국적 그거 그렇게 고생하고 그렇게 다니지도 못해도, 무국적은 꼭 가지고 있었거든요. 언제든지 한국 간다. 가야되지. 거기에 친척들도 있고, 부모들도 있고, 형제들도 사니까 한국에 언제든지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해가지고 사는데 이젠 아이들이 크니까 자녀들이 공부해야 하니까, 그럼 빨리 아무거나 받아야 한다. 무국적은 없어야 한다. 근데 북조선에서 많이 들어와서 막 선전하고 집집마다 다니고 학습조 열고 하니까…. 작은 아버지가 브이코프에 살았는데, 탄광 나이브찌에 살았는데, 거기는 특별하게 학습조가 열성했거든요. 그래서 거기서 북조선 국적을 받았어요.
 
작은 집에서 먼저 받으니까 우리 아버님이 뭐라 하시는가 하면 세 명(형제들)이 와서 하나 죽고 둘이 남았는데, 안된다고 국적 다른 거. 그러니까 우리도 받아야 된다고. 그래 국적을 받았어요. 북조선 국적을 받으니까 아이들이 소련 국적을 못 받게 됐잖습니까. 그러니까 공부를 하러 못가고 어디도 못나가고…. 그렇게 해가지고 나중에는 우리 아버지가 국적 째내 버리고. 북조선으로 도로 보냈어요, 아이들 공부 못시키니까. (북한) 국적 싫다고. 그래도 안됐어요.
 
부모님들은 90년도에 러시아 국적 받았어요. 86년, 85년, 84년 국적 받는 사람들은 받았어요. 소련 국적. 근데 모스코바에 그냥 편지 쓰고(국적 신청), 저도 한 스무번 썼어요. 그런데 그냥 퇴장 받고 못 받았어요. 70년 넘어서 86년도에 받았어요. 모스코바에서 허락 나왔어요. 그때는 남편한테는 공민증 있었고, 저한텐 없었거든요. 그니까 우리들 애기도 키워야 되고 공부도 시켜야 하고, 가족이니까 아내한테도 공민증 내달라고 했거든요. 그것도 몇 년 동안 써가지고 그렇게 나왔는데. 그담에는 90년 지내고 국경 열리고 그렇게 되니까 받고 싶은 사람은 다 받을 수 있었어요.”
 
이렇게 하여 1990년대 이후 사할린 한인들은 거의 소련 국적을 가지고 있다. 무국적자의 수가 줄어든 것은 1세대들의 영주 귀국과 사망이 가장 큰 이유다.
 
‘귀향’에 대한 소원으로 불이익 감내했던 1세대
 
그렇다면 1세대들이 자신과 가족들의 불이익까지 감수하면서 무국적의 신분을 끝까지 유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현실의 불편함도, 그리고 거주 이전의 자유도, ‘귀향길’이라는 소원에는 결코 미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고난의 역사를 지내온 1세대 분들 중에서, 사할린에 생존해 계신 이들은 이제 1천여명도 되지 않는다. 유즈노사할린스크시 한인회장을 오랫동안 맡으셨던 박정자 회장님은 유일하게 있는 노인정 시설과 1세들에 대한 걱정이 많다.
 
“1세분들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 나온 사람들은(영주 귀국한 한인) 집도 받고 그 다음에 생계비도 나오고 그렇지요.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또 이때까지는 (사할린) 역방문도 2년에 한 번씩 할 수 있었고, 그 다음에 치료 그런 거 다 무료로 받고 약도 무료로 받고 그렇지요. 그렇게 됐는데 사할린에 사는 1세들은 아무 무슨 도움이 영 없어요. 한국에서…. 거기에 있는 1세들은 해마다 그분들이 더 사망하시고 더 (수가) 적게 되거든요….
 
러시아에서 나오는 연금은 그거 가지고는 먹고 못 삽니다. 그거 연금 가지고는 굶어 죽습니다. 근데 아이들이 도와줘야 거기서 살 수 있거든요. 연금이 너무나 적어서요. 그런데 그 문제는 아직도 해결 안 된 거 같잖소. 그러니까 그 특별법이 어떻게 됐는가. 그것도 궁금했는데, 이제는 특별법 이번에 선거한다고 하는데, 아무것도 아니다 하니까.(19대 국회 구성으로 이전 법안 자동폐기 됨.) 새로 시작한다고 하니까 정말로…”
 
일제치하에 강제 동원되어 해방 후 일본으로부터 버림받고, 소련으로부터 차별받았으며, 조국으로부터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 사할린 한인들. 그들이 스스로 권리를 포기해가면서까지 무국적으로 지낸 것은 고향으로 가야 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이토록 간절한 열망을 70년이 넘도록 내팽개치고 있는 한국 사회, 이제 더 이상 역사를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영주 귀국사업을 ‘고려장’이라 부르는 이유
 
고향에 대한 갈망, 그것은 가족에 대한 애절한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일본과 한국 정부가 합의하여 실시하고 있는 영주 귀국사업은, 1945년 8월 15일 이전부터 사할린에 있었거나 사할린 태생인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1세들이 영주 귀국을 하려면 또다시 가족들을 남겨둔 채 한국에 와야만 한다. 사할린에서 영주 귀국을 “고려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일본은 사할린에 있는 자국민들에 대해 자손까지(한 세대에 한해) 동반 귀국을 허용하고 있다. 중국에 남겨진 일본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자손들의 귀국을 허용하였다. 독일은 직계조상 중 한쪽만이라도 독일계임을 증명할 수 있으면 독일로 귀국할 수 있게 하였다. (스탈린 시절 소련은 자국 내에 있는 독일계 사람들을 유럽 이외의 국경 지대로 보냈고, 이들이 사할린까지 왔다고 한다.)
 
우리 정부만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들을 데려온다면 외교적 마찰과 반발이 있을 수 있어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되풀이 하고 있다. 한국정부의 의지 부족으로 차일피일 미루는 동안, 사할린 묘지 조사에서 찾게 되는 한인들의 묘만이 늘어날 뿐이다.
 
19대 국회에 다시 상정된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은 자손 중 한 세대에 한해 동반 귀국을 허용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주귀국자들 또한 점차 고령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식들의 돌봄이 점차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고, 가족을 남겨둔 채 올 수 없어 귀국을 체념한 1세들 또한 의료와 생계 지원이 필요한 점을 감안한다면, 자손들의 동반 귀국과 현지 1세들에 대한 지원은 조속히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최상구 / 지구촌동포연대 KIN)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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