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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역사] 고향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의 추석


75년전, 일제에 의해 강제이주 당하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삶, 그리고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보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기사를 연재합니다. 최상구님은 지구촌동포연대(KIN) 회원으로 사할린 한인 묘지조사 후속작업, 영주귀국자 인터뷰 등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 www.ildaro.com
 
2013년 8월, 고국 땅에 돌아온 故 류흥준 옹
 
“어머니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좋은 건가 떨리는 건가 생각이 안 나네.”
 
취재를 나선 EBS 기자의 질문에 어머니는 담담하게 답했다.
 
2011년 사할린 남부 항구도시 코르사코프의 공동묘지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였다. 20대에 헤어진 아내와 두살박이였던 아들이 희끗희끗한 머리로 아버지의 묘를 찾으러 가는 길이다. 1945년 2월 사할린에 강제 징용된 고 류흥준 옹이 그분이다.
 
해방 이후 ‘화태귀환 재일한국인회’의 서신 왕래를 통해 류홍준 옹은 어렵게 어렵게 동생과 연락이 닿았다. 동생에게 보낸 편지엔 30년간 고향에 돌아갈 생각에 독신으로 살고 있다고 적혀있었다. 훗날 장성한 아들 류연상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고, 사진을 동봉한 답장이 온 후 연락 두절되었다. 아들이 계속 편지를 보내자, 아버지의 친구 분이 류흥준 옹이 돌아가셨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때가 1977년.
 
그 후 안산 고향마을에 아버지를 아는 분들을 수소문하기도 하고 백방으로 아버지의 산소를 찾고자 했지만, 아버지의 묘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우연히 신문에서 본 아버지 묘의 비석! 기적처럼 아버지의 묘를 찾게 된 것이다.  

▲ 2011년에 와서야 기적처럼 아버지 故 류흥준 옹의 묘를 찾은 류연상 선생님     © 최상구 

남들처럼 벌초를 하게 되었다며 함박웃음을 지으셨던 류연상 선생님은 2013년이 되어서야 아버지를 한국으로 모시게 된다. 2011년 정부가 최초로 사할린 지역 한인묘 조사사업을 시작한 그 해, 국회는 묘지 조사사업과 유골봉환 등의 사업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그것이 2011년에 찾은 아버지를 지금에야 모셔오는 이유이다. 2013년 8월 29일. 고향 갈 생각에 독신으로 살았던 고 류홍준 옹은 그렇게 68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역사와 함께 잊혀지는 한인들의 ‘무연고 묘’
 
언론에서는 한-러 양국의 협의 하에 최초로 유골봉환이 이루어졌다고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은 ‘최초’가 아니라, ‘이제야’ 시작한다는 점이다. 고 류홍준 옹처럼 독신자의 묘는 점차 무연고 묘가 되어 유실될 가능성이 크다.
 
사할린 동포들의 증언에 의하면, 고 류홍준 옹처럼 일생을 독신자로 지내다 사망한 분들이 적지 않은데, 이분들의 경우 대부분 마을에서 친한 친구들이 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허나 그 친구분들 역시 대부분 돌아가시고, 그분들의 자식들도 고향을 떠나거나 하면서 무연고 묘가 되는 경우가 많다. 무연고 묘가 되면 관리가 되지 않아 결국 그 자리에 다른 묘를 덮어 쓰기도 한다.
 
지구촌동포연대(KIN)가 2011년 유즈노사할린스크 제1묘지를 두 달여 걸쳐 조사했을 때에도 봉분만 있거나 비석이 많이 훼손되어 식별이 어려웠지만 비석의 위치(한인들은 봉분 앞에 있다)로 한인묘라고 추정되는 묘지들이 있었다.
 
또, 일제시대에는 매장이 아닌 화장이 시신을 처리하는 주된 방법이었고, 구소련 시대에 형성된 공동묘지 이전에 조선인들만 묻어버린 공동묘지 터가 따로 있었다는 사할린 동포의 증언도 있어, 이와 같은 사례들에 대한 꼼꼼한 연구 조사가 절실하다.
 
우글레고르스크에서 지구촌동포연대가 확인한 사례는 더욱 안타깝다. 옛 공동묘지 터로 도로가 나면서 묘지 이전이 실시되었는데, 이때 한인들의 무연고 묘로 추정되는 묘들은 결국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국내에는 아직도 사할린에 간 가족들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유가족들이 있다. 이들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묘지 조사사업을 통해 무연고 묘들에 대한 꼼꼼한 추적과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공동묘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묘들의 GPS위치만 찍는 것이 아니라, 공동묘지가 있는 마을에 어떻게 한인들이 이주하게 되었는지, 무연고 묘들이 어느 정도이고 이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름 석자라도 확인해야 한다.
 
지구촌동포연대에서 사할린 한인묘 조사 사업을 제기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점들 때문이다. 묘지 조사 사업도, 유골봉환도 이러한 사안을 감안하여 진행될 필요가 있다.
 
사할린에서는 추석을 어떻게 보낼까?
 
추석이 가까워오면서 분주해진다. 주말이면 벌초와 성묘로 고속도로가 막힌다는 뉴스가 나온다. 사할린에서는 추석을 어떻게 보낼까? 사할린에서 8월 15일은 ‘해방절’이다. 남사할린과 쿠릴열도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의미로, 전사자들에 대한 헌화를 시작으로 사할린주 정부 차원에서도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사할린 한인들에게 이날은 광복절이자 추석이다. 사할린 한인들의 최대 명절로 꼽는 날이기도 하다. 음력을 제대로 챙길 수 없는 이들에게 양력 8월 15일이 추석이 된 것이다. 묘지를 찾아 벌초를 하고 간단한 음식들을 차려놓고 성묘를 한다.  

▲ 사할린에선 광복절인 양력 8월 15일이 추석이다. 성묘를 지내는 사할린 동포들(2011년)   © 최상구  

이뿐만이 아니다. 야외 경기장에서 대규모 잔치를 벌인다. 1989년부터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서 매해 야외 경기장에서 대규모 행사를 진행하였고, 해마다 수천 명이 모이는 잔치가 되었다. 사할린주와 시에서도 지원을 받고, 각 한인단체에서도 성금을 모아 행사를 연다. (올해는 우천 관계로 한인회관에서 진행되었다.)
 
“특별명절이란 것이 우리 지방에서 제일이었습니다. 8월 15일, 지금은 광복절이라고 하더라구요. 그 전에는 다 해방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한인들이 모여서 노는 날입니다. 열성자들이 모여서, 운동장에서 모여서 노래도 하고 술도 마시고 씨름도 하고. 특별히 우리 한인들을 위해서 씨름을 하고.” (2011년 김포 솔터마을 인터뷰 중에서)
 
논란이 된 ‘한인들의 잔치’
 
한인들의 잔치에 처음에는 다른 민족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거의 한인들만의 행사로 진행되었는데, 사할린 주정부와 시로부터 지원금을 받는 행사에 한인들만 참가한다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차별 없이 다 같이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특히 광복절 행사의 꽃인 씨름이 문제가 되었다.
 
“광복절 명절은 한인들을 위해서 하지만. 유즈노사할린스크는 크게 하거든요 어떤 때는 이천 명이 모이기도 하구요. 사할린 주에서도 돈을 지원받고. 시에서도 지원받고 하니깐 특별하게 러시아 사람들은 안 된다고 하지는 않지요. (…) 작년까지는 한인들이 1등상 받고 송아지도 받고 이랬는데 작년에는 1등을 다른 사람이 받았어요. 그니깐 이거는 한인들을 위해서 하는데 이렇게 되면 어째야 하는가에 대해 논쟁이 많았어요. 근데 나중에는 차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광복절 명절이라고 안하고 ‘드류즈바’라고 해서 친선 경기로 말한단 말이죠. 그러니깐 1등상을 한인 이외의 사람이 받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작년에 처음으로요.” (2011년 김포 솔터마을 인터뷰 중에서)
 
노래자랑은 빠지지 않는 필수이고, 명절 행사에서 다른 놀이들은 무엇이 있을까?
 
“그전엔 그네나 널뛰기 했는데, 그네뛰기나 널뛰기 하려면 운동장에 뭐를 세워야 하는데 운동장이 새로 수리해서 파손시킬 수 없어요. 땅을 못 파게 하니깐 2년 동안 못 했죠. 어린이들 같은 경우에는 달음박질부터 시작하죠. 포대를 발에 달아가지고 하는 경기도 있고, 여러 가지 경기가 있어요. 어르신들은 병 낚기라고 병을 낚시처럼 낚아서 먼저 오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구요.” (2011년 김포 솔터마을 인터뷰 중에서)
 
가족과 떨어져 있는 한인들의 쓸쓸한 명절
 
한가위가 다가오면서 사할린 관련 소식은 두 가지로 나뉜다. 사할린 현지에서 열리는 광복절 행사 소식과, 국내에 영주 귀국하신 분들에 관한 소식이다. 사할린에 자식들을 두고 와야 했던 국내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들은 그저 가족사진만 바라볼 뿐이다.
 
경제적 여건이 좋지 못한 분들은 자식들도 이곳으로 오기 힘들고, 사할린 역방문의 기회는 2년에 한번 지원될 뿐이다. 가족 없이 생이별로 지내야 하는 이분들에게 명절은 더욱 쓸쓸한 날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거니 하고 지냈지”하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이제야 시작된 유골봉환은 아직도 갈 길이 멀고,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고향을 가슴에 묻고 동토의 땅에 누워계신 넋들은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온 가족이 모여 보름달에 소원을 빌고 성묘를 하는 추석을 앞두고 생각나는 단상들이다.
 
"귀향에의 꿈이 서린 유해를 한 조각 한 조각 거두어 고국으로 모시고 돌아가는 날,
사할린에 묻힌 분들이 그렇게도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귀국선의 희망도 거기 담기리라.
이분들의 절절했던 염원을 모아 사할린 어느 언덕에 위령탑과 분향소를 세우고
한 줌의 향을 피워 올릴 그날은 언제일 것인가."

-한수산 "동토의 민들레, 사할린 동포" <1>사할린 한인묘지 조사현장을 가다 ▣ 최상구

※ <사할린 한인 달력 만들기> 해피빈 모금 참여하기 
 
이 기사 연재는 지구촌동포연대(KIN)의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 인터뷰’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할린 동포 희망 프로젝트는 시민들의 자원활동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음력에 맞춰 지내고자 노력해온 사할린 현지 분들에게 선물할 <사할린 한인 달력 만들기> 네이버 해피빈 모금함을 채워주세요! http://me2.do/xYBP1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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