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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정의란 무엇인가
<20대 여성 ‘일’을 논하다> 3년차 여기자의 딜레마 

 

※ 2014년 <일다>는 20대 여성들이 직접 쓰는 노동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딜레마.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이 말은 ‘선택해야 할 길은 두 가지 중 하나로 정해져 있는데, 그 어느 쪽을 선택해도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 곤란한 상황’을 뜻한다. 일하거나 일하지 않거나. 기자의 의무에 충실하거나 개인의 권리를 지키거나. 둥글게 사회와 타협하거나 날카롭게 자의식을 지키거나. 기자에 지원했을 때부터 현장을 누비며 3년차에 접어들기까지 딜레마가 아닌 순간이 없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렇다.

 

뻔하지만 결국 쓰고야 마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스물네 살의 나는, 졸업은 하고 싶은데 학교엔 더 있고 싶었다. 고정적인 수입은 필요했는데 어떤 직업을 구하고 싶진 않았다.

 

하고 싶은 게 있었다. 대학에 와서 뒤늦게 접한 독문학을, 대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싶었다. 어떤 대학교에서는 독문학과가 사라지기도 하는 마당에 국문학 전공자가 독문학을 이중 전공까지 한 것도 모자라 대학원이라니. 모래알 같던 당시 마음에 새긴 ‘독문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글자는 ‘독문학 석사 해서 뭐 할 건데’라는 파도가 집어삼켰다. 가족 여행을 갔던 그 해 어느 날, 아버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버렸고 아버지 앞에서 볼품없이 울고 싱크대에서 토한 건 내 나름의 절실함이었으리라.

 

진로 문제로 더 이상 고민해봤자 ‘소고기나 사 먹겠지’라는 심정으로 어머니가 꾸준히 바라던 임용고시를 봤다. 내가 이렇게 생활인으로 애쓰고 있다는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드리겠다는 일종의 시위성이었다. 임용고시에 떨어진 직후 맞은 겨울을 사립중등학교 임용 지원과 시험으로 보냈다. 간절히 원하지도 않는 일에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다니, 차라리 돈을 벌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한 출판사에 계약직으로 들어갔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의 습성대로 역시나 같은 기분을 느낀 채 회사를 제 발로 나왔다.

 

사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언론인을 꿈꿨다.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추상적이나마 언론인이 되겠다는 일말의 생각을 품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부딪치며 한껏 사회를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언론에 회의가 생겼다. 언론이 부조리를 고발한다곤 하지만 권력과 자본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는 나름의 판단 때문이었다. 괜히 정의롭다는 생색만 내느니 김수영 시인의 글귀에서 빌리자면,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 생활인에 충실하는 게 스스로에게 덜 부끄럽지 않을까 싶었다.

 

막상 생활인이 되려고 하니 딱히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어 보이는 것도 없었다. 초중고 시절 담임선생님의 생활기록부 말투를 빌려 정리하자면, 대학 시절 걸었던 길과 총체적인 적성과 소질에 따라 기자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운이 좋게도 소위 ‘스펙’ 역시 서류 통과가 무난할 정도로 쌓게 됐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언론고시를 보기 시작했고 6개월이 지나자 기자가 돼 있었다. 부끄럽게도 ‘왕궁’이나 ‘왕국의 음탕’에 ‘분개’하려는 마음에서 기자가 되진 않았다.

 

노동자의 권리와 기자의 소임 사이에서

  

▲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7·14 전당대회. 당 대표에 도전한 후보자들과 당 관계자들이 <거위의 꿈>을 부르고 있다. 마침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해요'라는 가사가 나오고 있다.  © 여기자 
 

계기야 어쨌든 기자가 된 만큼 날마다 남들보다 부지런히 ‘분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엔 동네북처럼 ‘기레기’ 취급을 받으나 어쨌든 제4부, 사회의 공기로서 기자는 가치 있거나 가려져 있는 정보를 취재해 알리려 노력해야 한다. 굉장한 특종은 물론이거니와 작은 기사라도 그 속의 글자 하나하나는 실로 무겁다. 이 무게에는 새로운 것을 알린다는 설렘과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얹혀 있다.

 

특히나 지금 있는 정치부에선 정치인의 말 한마디가 기사 거리인 만큼 문자 그대로 토씨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그 무게를 키보드에 얹어 누른 글자 하나하나로 기사를 완성한다. 거창한 게 아니라, 남들이 땅을 밟는 중력에 그 무게를 더 얹어 세상에 내는 발자국을 감당하는 것이 기자로서 정의의 출발이라 생각한다.

 

최근에 찾아간 한 병원의 의사가 “육체노동을 하냐, 정신노동을 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기자”라고 답했고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기자에겐 책상에 앉아 타자만 두드리는 시간이 많지만 연차가 어린 기자일수록 현장에서 몸으로 때우는 비중이 높다. 더군다나 대부분 언론사가 ‘9 to 6’는 고사하고 주 5일제도 못 누린다. 점심과 저녁 시간은 취재원과 함께 하는 때가 잦다.

 

담당 출입처에서 급한 상황이 터졌을 때를 대비해 휴대전화를 늘 곁에 두는 편이 개인 신상을 위해 좋다. 몸도 정신도 고단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통신사 기자는 온갖 상황을 챙겨야 하기에 다른 언론사 기자에 비해 노동 강도가 센 편이다.

 

기자 선배들은 기자로서의 ‘소임’과 ‘책무’를 강조한다. 물론 그것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밥벌이 측면에서 본다면 ‘열정’과 ‘꿈’을 요구하며 인턴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노동 강도만큼 적절한 보상을 받았다면 지금쯤 통장 잔고 일의 자리 숫자에 0이 하나 더 붙었을 것 같다.

 

이 지점이 내가 느끼는 또 다른 딜레마 지점이다. 기자가 된 이상 최선을 다해 정의롭고 싶은데 자신을 향한 정의부터 쉽게 챙기지 못한다. 나 자신의 노동과 관련해 적절한 처우 내지는 보상을 요구하는 일이 기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소임과 책무 사이에서 좌절될 때마다, 도대체 나의 정의는 어떤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여기자로 살기: 차가워진 심장과 뜨거워진 머리

 

▲  5월27일 국회 의원회관 2층에서 기자들이 세월호 참사 후속 조치와 관련된 여야 협상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소위 '뻗치기'라 한다. 뻗치기를 할 땐 식사도, 화장실 가는 것도 쉽게 할 수 없다. 이날 뻗치기는 날을 넘겨 계속됐다. ©여기자 
 

기자가 된 탓인지 사회생활을 하면 으레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감수성이 예민한 편이었는데 무뎌지는 것들이 많아졌다. 기사는 물론이고 현장에 가깝게 있으면서 요지경을 매일 목격하다 보니 더 그렇게 됐다. 또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미명 아래 취재원 혹은 취재 내용과 거리 두기에 애쓴 이유도 있을 테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 정쟁으로 지지부진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국회에 찾아왔을 때도 그랬다. 국회의원회관을 처음 찾은 유족들은 기자회견을 했다. 기사에 ‘주체’를 명확하게 적으려 회견문을 읽은 이를 찾아가 물었다. “유족...이시죠?” 그 분은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있냐는 책망의 눈빛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다 “유족이 맞다”고 답하셨다. 그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다른 분께 여쭤볼 수도 있을 질문을 당사자에게 너무나 쉽게 던졌다. 물음 자체가 그 분께 슬픔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걸 헤아리지 못했음을 후회했다.

 

성차(性差)에 관한 감수성도 그렇다. 대학교 시절 반(班) 학생회 활동을 하는 동안 부끄럼 없이 목소리 큰 자만이 돋보이는, 강요된 자기 소개인 에프엠(Field Manual, 군대식 매뉴얼)을 삼가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친구들과 성차별적 언행에 매사 주의를 기울였다. 성폭력적인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며 서투르게 문제를 풀어갔다. 나와 비슷하게 예민하거나, 예민해지려 하는 감수성을 가진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사회생활을, 그것도 언론계에서 시작하니 혼란스러웠다.

 

특히 기자 사회는 남성중심적 성향이 강하다. 여(女)기자는 또 다른 성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수습 기간 경찰서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점호하듯 보고하는 통과의례나 도제식의 업무 습득 등, 선후배 위계 관계가 철저한 군대식 문화가 기자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한국기자협회에서 1년에 한 번씩 남성 기자들끼리 그라운드를 누비는 축구대회를 여는 건 단적인 예다. 취재원 혹은 선배 기자 ‘아저씨’들의 성희롱 발언부터 성추행까지 겪고도, 좁고도 빠른 언론계를 생각해 조용히 넘어간 적도 있다. 이렇게 암암리에 넘어가는 여기자들 이야기를 한두 번 들은 게 아니다.

 

감수성은 세계를 향한 나만의 촉각이다. 이렇게 감수성이 무뎌지는 장면을 자각할 때마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일이 나를 망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감수성의 날을 벼려야 하는데, 고단한 일상과 일에 치이다 보니 벌써 어딘가 조금 닳은 채로 한 해가 갔다. 사회생활 3년차, 아직 서툰 이 어름사니는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이라는 줄을 불안하게 타고 있다.

 

내일도 정치부 말진으로 살겠지만

 

취재 현장에 가장 먼저 가서 가장 늦게 나오는 게 통신사 기자라고 한다. 통신사는 독자에게 직접 뉴스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일간지 등 다른 언론사에도 뉴스를 공급하기에 그만큼 꼼꼼하고 광범위하게 세상 소식을 챙겨야 한다. 일단 내일도 나는 통신사 정치부 말진으로 산다.

 

기자들은 각 부서의 막내를 ‘말진’이라 부른다. 정치부 말진, 그것도 통신사 정치부 말진이기에 출근 때부터 퇴근 때까지 온갖 발생을 놓칠 새라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다. 출입하는 당의 아침 회의에 들어가 내용을 기록하고 정치인을 따라다니며 말을 듣는 등 하루 종일 국회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닐 터이다.

▲ 8월1일 야근을 앞두고 잠시 국회 본청을 걷다가 나무 기둥에 매미 껍질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시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수 년을 기다려 세상 밖으로 나온 매미의 흔적이 국회에도 있음에 묵직한 위로를 느꼈다.  ©여기자  

 

그렇게 정신 없이 관성대로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도 이상과 현실,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이란 선택지를 두고 느끼는 딜레마는 계속될 것이다. 답을 좀처럼 내지 못하고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겠지만, 어느 것을 골라도 출구가 없는 카프카적 선택이 적어도 아니라는 것에 조금은 안도가 된다. 카프카 소설 속 주인공처럼 미로 같은 국회에서 잠시 길을 잃어도 스스로 걸어 나갈 기회는 있으니 말이다.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한 시에서 ‘나무들은 왜 그들의 뿌리의 찬란함을 숨기지?’라고 썼다. 훌륭하거나 멋진 기자도 아니면서 여기까지 글을 쓰게 된 배경도 위 글귀와 같은 맥락이다. 찬란하진 않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적어도 나쁜 기자는 아니라고 자평할 수 있는 스물일곱 살 3년차 여기자가 지금 여기 서 있다. 나의 뿌리는 이리도 갈지자였다고, 당신처럼 나 역시 혼란스러웠으나 계속 걸어 나가며 이런 글을 쓰고 있다고 말이다.  ▣ 여기자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번역기사 사이트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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