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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를 언급조차 못하게 하는 사회에서
박김수진의 <너는 왜 레즈비언이니?>를 읽고 
 

 

세상 많은 것이 불만이었던 중학생 시절, 어느 날 TV 프로그램을 하나 보았습니다. 채널도 제목도 기억이 안 나지만 단 한 장면만은 분명히 기억합니다. 외국 사람이 등장하여 인터뷰 형식으로 말했는데 요지는 ‘남녀차별 때문에 레즈비언이 되기를 선택하는 여성들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이거다.’ 남아선호사상에 심히 불만을 품고, 남성과 동일한 역할과 기능을 하고야 말겠다고 생각하던 당시의 나에게 이 장면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다음 날 학원에 가서 영어 수업을 듣는데,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남자 강사는 남성과 여성의 본성과 결혼의 당위성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나는 손을 들어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여성들이 레즈비언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강사가 ‘그래도 네가 그렇게 살 건 아니지 않니?’ 라는 식으로 말했을 때, ‘나도 그럴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조금 흥분했고, 강사는 당황했고, 주위 남자아이들이 쳐다보던 그 순간이 떠오릅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흐뭇한 장면입니다.

 

그 후에도 이 기억을 종종 떠올리곤 하여, 얼마 전 노동자대회 뒤풀이 자리에서도 이 에피소드를 말했지요. 그러나 함께 있던 사람에게 “그런데 지금은?”이라는 핀잔(?)같은 말을 듣고서 아무 말도 못한 채 조금 민망해 하며 ‘그래, 나는 레즈비언이 <되지> 않았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방법

 

이성애자로 사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닌데, 왜 나는 내가 이성애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부끄러운 느낌이 들까요? 중학교 때의 깨달음(?)을 지키지 않아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지금은 생계와 미래의 전망 문제로 발만 담그고 있지만요. 남과 다르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일까요? 개인에 대한 폭력과 착취를 반대하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소수자가 아닌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것일까요?

 

물론 이성애자 관계에도 운동은 필요합니다. 특히 데이트 폭력이나 성별 권력 관계로부터 오는 억압을 없애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나 이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탄압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내가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의 위치를 조금 부끄럽게 여기는 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  박김수진 <너는 왜 레즈비언이니?>(이매진, 2014) 
 

그런데 최근에 누군가 <너는 왜 레즈비언이니?: 조금은 외로운 우리들의 레인보우 인터뷰>(박김수진 지음, 이매진, 2014)라는 책을 이성애자로서 어떻게 읽었는지 물어왔습니다. 순간 ‘내가 이성애자라고 밝힌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을 타박하는 것은 아닙니다. 겉보기에 나는 의심할 구석 없는 이성애자의 삶을 살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질문을 받지 않는다면 일상적으로 나의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니까요.

 

그때의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보았습니다. 찰나에 불과했던 그 순간에 갸우뚱거린 내 모습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어느 지역 어떤 집안에서 자란 몇 살의 무슨 직업을 가진 사람인지 배경 설명을 듣지 않는 것이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일 겁니다. 그러나 나는 살아오면서 배우고 내면화한 사회적 관념과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근거들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때문에 아무런 정보 없이도 이미 겉모습과 말투로 그 사람을 판단해버리고 맙니다.

 

<너는 왜 레즈비언이니?>의 도입부에 지은이가 자신의 생김새를 밝히며, “제가 남자 같나요?”라는 질문에 “네!”라는 대답을 자주 듣는다고 말합니다. 사회에서 남자 같다고 여기는 차림새를 하고 있어서이지요. 그러나 지은이는 남성이 아닙니다. 지은이는 여성입니다. 그리고 레즈비언입니다.

 

누가 레즈비언인가?

 

그렇다면 사람을 바라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당사자가 자신을 느끼는 대로, 드러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사례를 통해, 이성과 제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도 자신을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고 있다면 그를 레즈비언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견이 많은 주장입니다.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레즈비언들이 있고, 스스로를 ‘특정한 레즈비언’이라고 말하는 지은이의 말처럼요. 지은이와 내가 다시 한 번 강조할게요. 이건 지은이의 생각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느끼고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정답을 정해놓고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라고 말하면 누구나 수긍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별과 연애, 결혼이라는 단어를 갖다 대는 순간, 이 무던한 문장이 현실에서는 굉장히 위험한 사상이 됩니다. 정답을 벗어난 선택을 하는 사람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것이고, 문란하며, 심지어 인류의 발전을 해치는 공공의 적이 되어버리는 거죠.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말들을 제가 또 쓰고 있자니 별로 재미가 없지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당연하지 않기도 해요. 책에서도 ‘레즈비언’의 정의와 설명이 조금은 지루하고 지겹도록 반복되는 이유는, 바로 지은이의 염려와 배려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지은이는 동성애와 관련한 단어들과 잘못된 편견, 레즈비언의 삶과 고민을 설명하는 데에 책의 1부를 할애합니다.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깨닫고 레즈비언으로 살겠다고 결심하기까지, 수많은 혼란과 시선을 감내해야했던 경험을 통해,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상황을 보면서 이러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지은이는 자신을 레즈비언이라고 소개합니다. 여성인데, 남성이 아니라 여성을 사랑하고, 여성이랑 함께 살기를 선택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선택’했다는 용어에 집중을 요청하죠. 다음은 지은이가 강의안에 쓴 동성애자에 관한 설명입니다.

 

“동성애자란 동성인 사람과 정서적, 정신적, 신체적, 성적 교감을 나누려는 욕구를 가진 경험이 있거나, 경험을 나누고 있거나,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 중에서 스스로 동성애자라고 정체화한 사람을 의미한다.” (본문 35쪽)

 

<너는 왜 레즈비언이니?>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것처럼, 레즈비언의 정의와 사정이 모두 동일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은이의 정의에 따르면 레즈비언일 수도, 아닐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러나 레즈비언인지 아닌지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라는 결론에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을수록 점점 더 동의하고 말았어요. 모든 경우의 수를 따지고 싶어 하고 사변적으로 생각이 돌기 일쑤인 나에게는 정말 딱 들어맞는 기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은 비단 레즈비언이나 동성애자를 정의할 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의 수많은 정체성 중에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우리 엄마의 딸’이라는 정체성을 말할 수도 있는데 말이죠. 자신의 정체성 중에 사회적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가졌을 때 오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 정체성을 긍정하거나 부정합니다. 어느 쪽도 편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결국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선택을 하는 배경에는 자라온 환경과 가족, 받아온 교육, 자신의 성격, 직업, 사랑, 사회적 인식 등 수많은 요인이 있을 것이에요. 그러므로 레즈비언이지만 이성과 제도 결혼을 하고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거지요.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렇게 살지 않기로 한다면 그런 거예요.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이고, 누구이고 싶은지는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자기만의 굉장히 복잡하고 긴 역사가 있는 거고요.

 

레즈비언임을 구분하기 위해 이성 연애의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 겉모습이 남자 같은지 아닌지 같은 기준이 무엇인지 명확히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점은 그 어떤 것보다 명확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죠. 하지만 어떤 사람이 레즈비언인지 아닌지를 다른 사람이 판단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고, 또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레즈비언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바로 레즈비언이지 않을까요?

 

레즈비언이 왜 레즈비언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동어반복 같은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성애자가 왜 이성애자냐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생각해보세요.

 

레즈비언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만약 지은이가 저에게 “당신은 레즈비언입니까?”하고 묻는다면 저는 조금 머뭇거리며 “아니오” 라고 말했을 겁니다. 이런 질문을 받는다고 해서 아무한테나 머뭇거리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고 보니 나의 첫사랑은 여자아이입니다. 키도 크고 힘도 센 그 아이는 나의 선망이었고, 시시하고 남을 괴롭히기나 좋아하는 남자아이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요. 그러고 보니 나는 종종 그 아이를 떠올리며 ‘좋아했다’고 생각해왔는데, 첫사랑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네요. 유치원 때라고 하면 웃으실 건가요? 그러나 그 이후로도 내가 흠모하고 가슴 두근거린 여성들은 많았습니다. 물론 남자아이들도 많았지요. 여고 수학여행 잠자리에서 내 팔을 내어준 단짝에 대한 감정은 지금도 우정 이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책의 2부는 지은이가 자신의 가족과 인연이 닿은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로 꾸미는데, 그중 ‘려수’님처럼 나도 H.O.T. 팬이었고, 팬픽을 봤으며, 자연스럽게 동성애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오빠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끼리 사랑한다는데 그것보다 완벽하게 팬의 바람을 반영한 것이 어디 있을까요?

 

그리고 대학에 와서 운동을 하면서 여성주의에 꽂히기도 했습니다. (물론 여성주의자들이 모두 동성애를 자연스러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LGBTAIQ(레즈비언 Lesbian, 게이 Gay, 양성애자 Bisexual, 트랜스젠더 Transgender, 퀘스쳐너 Questioner: 아직 자신의 성정체성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 양성구유 Intersexual, 무성애자 Asexual)도 알고, 가급적 성별이 드러나는 단어를 잘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나도 사랑하는 여성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지은이가 언니와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것에 대한 언니의 쿨한 반응에 섭섭해 하는 것을 보고 ‘아차’ 싶었습니다. 아무런 악의 없이 레즈비언을 인정하고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레즈비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면서 겪었을 수많은 혼란과 고통, 두려움에 대한 공감 없이 어떻게 내가 레즈비언을 알고, 함께하며, 지지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단 말인가? 하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지은이가 동성애자이면서도 퀴어(Queer) 영화를 보면 끙끙 앓아서 잘 보지 못한다는 말은 참으로 놀랍고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거대한 사회와 부딪히면서, 자신이 가졌다고 생각한 모순이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는 답을 얻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나는 상상도 못하니까요.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곧 싸움인 사람들

 

어머니의 인터뷰 중 지은이에게 “레즈비언인 딸, 우리 박통”하고 부르는 순간, 나는 눈물이 나고 말았습니다. 가족으로부터 레즈비언이라는 자신의 성 정체성이 받아들여지는 것, 그리고 본명이 아닌 레즈비언 운동을 하는 ‘활동명’으로 불린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참 궁금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제가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줄 모르시거든요.

 

얼마 전 MBC PD수첩에서 "게이·레즈비언, 안녕들하십니까" 라는 동성애에 관련한 꼭지를 방영했습니다. 교과서에 동성애에 대한 시선이나 단어를 ‘언급조차 못하게’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한 고등학교 보건교과서 저자는 동성애 반대 단체의 교과서 수정 요구를 들어주었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되게 슬펐어요. 내가 동성애를 옹호하는 건 전혀 아닌데, 동성애자라는 걸 언급하는 것조차 이렇게 힘들다면 동성애자로 산다는 건 얼마나 힘들까” 라고요.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곧 싸움인 사람들, 그럼에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바로 레즈비언입니다. <너는 왜 레즈비언이니?>라는 질문은 사람의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입니다. “내가 레즈비언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레즈비언입니다. 내가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성이듯이.

 

아, 마무리를 우울하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조금 그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지은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세상에 대한 분노 에너지로부터 인권활동의 동기를 얻었던 지난 세월에 지쳐, 단체 활동을 그만두고 다른 활동을 모색하는 지은이가 무엇보다 이해가 되었습니다. 나도 그렇거든요. 그럼에도 자신의 고민을 놓지 않고 기록해 온 그가, 또한 남성과의 연애에서 끝없는 갈등과 고민으로 지친 나에게 ‘여성은 어떠냐’고 말하는 지은이가 고맙습니다. ▣ 서윤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번역기사 사이트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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