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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의 덫’에 걸린 대한민국 엄마의 삶
<엄마의 탄생> 숱한 칭찬과 협박 속에서
나는 거의 매일 15개월 된 둘째를 데리고 이런 저런 이유로 외출을 한다. 겨울에 외출하자면 준비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쪼꼬맹이는 장갑 끼는 것을 귀찮아한다. 그래서 끼우지 않고 외출하면 열에 아홉은 겪는 일이 있다.
마을버스에서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대뜸 “에고야, 아가 손 다 얼겠네. 엄마가 장갑 안 껴 주던? 아이고 우리 아기 불쌍해라” 한다. 멀뚱멀뚱 내릴 순간만을 기다리다 후다닥 내리며 ‘추우려나’ 싶어 가방에 넣어온 장갑을 다시 끼운다. 이젠 됐다 싶어 지하철을 타니, 역시 생면부지의 또 누군가가 “아구 귀여워라. 근데 애 땀띠나. 우리 아가 엄마 때문에 덥지. 까꿍” 한다.
엄마 8년차, 애가 둘이다 보면 멘붕도 사치스럽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들 애들 예뻐서 하는 소리라는 걸 왜 모르겠나. 그러나 서울에서처럼 길가다 서로 얼굴 쳐다 볼 일도 흔치않은 곳에서, 나에게 말을 거는 이들이 이토록 많을 수 있음을 엄마가 되고 난 이후에야 깨달았다. ‘엄마’에게는 그래도 된다는 묵계라도 있는 것처럼. 기준도 서로 다른 유무형의 간섭과 잔소리 덕분에, 나는 아이를 키우는 일에는 결코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겠구나 예감하고 긴장한다.
육아, 교육상품…소비하는 엄마로 거듭나라!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자식과 가족에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어머니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다들 ‘설마!’ 한다.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고? 나야말로 설마다! 엄마들의 ‘노동’이 끊임없이 ‘사랑’이라는 단어로 가려지는 한, 이는 계속 될 사태이다. 다만 그 내용과 형태가 달라져, 혼동되거나 착각하는 상황이 있을 뿐이다.
▲ 김보성, 김향수, 안미선 공저 <엄마의 탄생>(오월의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우며 엄마로서 고군분투했을 세 여성들이 쓴 책 <엄마의 탄생>(김보성, 김향수, 안미선 지음. 오월의봄)은 그런 부분을 간파하고 지금, 여기 대한민국 여성들이 “엄마로서 경험하는 일상적인 낯선 삶”을 바라보고, 엄마 역할과 이를 수행하는 그녀들의 “노동환경”에 주목한다. 오늘날 엄마 되기의 속살이 무엇인지 말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최근 한국 사회에서 엄마노릇의 주요한 부분은 “소비적 모성”으로 채워지고 있다고 한다. 그 입문의 장소는 한국 출산모의 50%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이용한다는 산후조리원이다. 아이 자체가 생경한 초보 엄마들에게 ‘모유 수유’로 대변되는 엄마 역할의 막중함과 위대함, 헌신적인 역할의 당연함을 요구하는 곳.
산후조리사들은 헌신적 모성의 현대적 버전들을 전수하고, 그곳의 프로그램들은 기업들과 손을 잡고 “소비하는 엄마로 거듭나라는 교육”을 한다. 엄마들은 그곳에서 “육아과학의 외피를 쓴 소비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유기농 로션부터 유모차, 카시트, 유아 소파, 아기식탁, 유아 전집을 사는 여성들을 보며 사람들은 쉽게 허영심이나 사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것이다. 하지만 엄마로 살게 된 여성들은 그 유혹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기껏해야 자신은 ‘합리적 소비’를 하고 있다고 자위하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이유는 소비가 사랑의 증거로서 유통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따라야 하는 단계별 매뉴얼과 이를 지키지 않을 시 아이가 훼손될 수 있다는 후유증과 경고”들이 가득하다. 그 정보들이 사실상의 협박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책에 등장하는 엘리베이터 사고에서 보듯이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비난과 질타는 오로지 ‘엄마’를 향하니 말이다.
“항상 숙제만 있지. 그걸 잘했다고 뭔가 환원받거나 충분한 권리를 누리는 것은 없어. 뭘 어느 정도 해서 평안히 유지가 됐다, 그러면 임무가 끝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긴장하고 뭔가를 더 해야 되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아.”(209p)
책에 등장하는 엄마들은 이를 ‘숙제’라고 표현했다. 이토록 적확한 표현이라니. 많은 엄마들이 이처럼 “긴장과 불안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미 유아기까지 내려온 사교육 열풍도 이러한 논리 속에서 엄마들을 휘어잡는다.
“엄마의 불안과 죄책감은 교육상품 소비로 상쇄된다. 소비자본주의 사회는 마치 이 교육상품을 소비하면 아이 발달이 촉진될 것 같다는 환상을 엄마들에게 가져다주기 때문이다.”(203p)
대부분 갓 엄마가 되었을 때는 사교육에 열정적인 엄마들과 자신을 경계 짓는다. ‘왜 그토록 애를 잡나? 나는 절대 그러지 않아야지’, ‘나는 저런 엄마가 되지 않을 거야!’, ‘나는 아이를 창의적으로 키울 거야’, ‘무한히 사랑만 해줄 거야’ 그러나 그 다짐과 목표들을 이루기 위한 선택지는 이 사회에 그리 많지 않다.
현대 한국 사회가 만들어놓은 “모성의 덫”을 벗어나는 것은 여성에게는 너무 큰 모험이다. 엄마라는 정체성의 인정과 부정이 이 논리에 찰딱 들러붙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자녀에게 무관심하지 않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 엄마, 부모의 증표”인 돌잔치, 성장 앨범과 같은 ‘의례’들도 ‘사교육’과 유사한 논리, 소비적 모성의 논리로서 작용한다고 본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의례들은 사교육을 향한 첫 계단일 뿐이다.
그 소비의 결과는 자본이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의 백미는 모성의 내용을 소비성으로 채우도록 한 현대 사회의 공간을 고민한데 있다. 실제 육아와 살림을 전담해보지 않고서는 일명 가사(家事)라고 불리는 일들의 리스트는 작성해낼 수 있어도, 그 일이 수행되어야 하는 ‘공간’에 대해서는 무지한 경우가 많다.
‘가(家)’라는 공간은 철저히 왜곡되어 있거나 심지어 완전히 공백인 경우가 많다. 기껏 말 그대로의 집안만을 상상하는 것. 집에서만 행하는 일이라는 암묵적 동의들. 하지만 이를 수행하는 사람에게 ‘가’란 행해야 하는 일이 수행되어야 하는 모든 장소, 모든 시간이다. 그러나 여성은 시공간을 제어할 수 없어 고난이 증폭된다.
아파트에서 아이가 뛸 수 없어 아이들에게 항상 윽박지르던 엄마를, 거리의 차가 무서워서 늘 고함만 치던 엄마를, 안전한 놀이터 하나 없어 돈을 주고 키즈카페를 찾을 수밖에 없는 엄마들을 눈여겨 볼 수 있는 것도, 그 공간의 의미를 새롭게 본 사람이 아니고는 발견해 낼 수 없는 일이다.
저자들은 “이런 숨 막히고 답답한 도시라는 공간은 엄마 노릇마저 규정한다”고 말했다. 엄마들이 아이와 집에만 있자니 답답하고 고독하다고 하는 말을 우리는 그간 너무 협소하게 생각해왔다. 이 말은 어느 순간에 전 사회를 향한 말이었는데 말이다.
실제 집 안에만 있어도, 아이를 동반하고 거리로 나와도 그녀와 아이는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다. 대부분은 민폐스럽게 보이거나 아니라면 가려진다. 사실은 가려진 채로 그 일이 수행되기를 원하는 게 이 사회의 진짜 목적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보면 답답하다는 말을 가벼이 여기던 사람들만 넘쳐나던 순간 이들에게 응답한 이는 자본뿐이었구나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
방황하는 엄마들에게 손을 뻗으며 안전하고 깔끔한 장소를 제공하고 그녀들이 ‘있다’는 것을 유일하게 인정하는 자. 다만 돈만 지불하라. “현대 도시의 공간 배치는 갈 곳 없는 아이와 엄마를 소비의 세계로 이끌기 시작한다.” 지금 한국에서는 소비자가 되어야 진짜 엄마가 된다. 혹은 소비해야 공간을 점유할 수 있고, 가시화된다.
이런 소비적 모성이 진짜 덫인 이유가 있다. 자본이나 기업은 소비에 대한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다양한 육아, 교육, 가사 살림 관련 광고들에서 엄마란 “깐깐한 엄마, 합리적 소비자, 가족 건강의 수호자”여야 한다고 세뇌된다. 특히 높아진 현대 사회의 위험, 건강 문제와 같은 경우에서 “엄마가 깐깐해지면 아이가 건강해진다는 통념”은 만연하다.
그러나 깐깐함은 소비하는 데에서 끝나야 한다. 만약 기업이나 국가에 사실을 요구하고, 더 많은 정보를 요구하고, 안전과 사회 위험을 지적하며, 이를 개선하기 위한 실천 행위를 하려하는 엄마는 ‘과도한’, ‘예민한’, ‘유난스런’ 여성 취급을 당할 것이다. 그래서 “잇따른 식품 안전사고, 영유아 제품 사고 속에 개인들은 홀로 남겨”졌고, 가족 건강과 위험을 책임진 엄마라는 “여성은 이제 근대성이 만들어낸 위험까지 대응해야 한다.”
엄마노릇과 산후우울, 유통되지 않는 경험
이쯤 되면 “엄마가 된다는 것,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성의 삶에서 여전히 큰 도전이다.”
책은 산후우울증 이야기를 앞부분에 배치했다. 아마도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키우며 단계적으로 접하게 될 시간적 순서와 유사하게 목록이 짜여 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산후우울증에 대해서는 이 책을 다 읽고서야 다시 시작해야만 할 것 같다. 갓 태어난, 솔직히 가끔은 예쁜지도 사랑스러운지도 헷갈리는 아이를 안고, 24시간을 48시간처럼 살아내는, 그 힘들다는 3교대도, 2교대도 없는, 오로지 혼자 치러야 하는 초창기 육아기의 시간 속에서 마치 여성들은 앞으로 닥칠 엄마 되기의 ‘숙제’들을 다양한 경로로, 생각보다 많은 횟수의 징후들로 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엄마란, 저출산 시대에 쏟아지는 “엄마들을 위한다는 정책과 엄마들을 향한 비난 사이”에서, 모성 담론을 유지시키는 전형적인 “어머니 찬양과 어머니 비난”의 현대판 버전들을 감지하면서, 유일하게 손내밀어주는 자본의 손을 잡으며, 우는 아이를 달래고, 씻기고, 분유를 타고, 옷을 삶고, 청소를 하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육아용품들을 사고 있는 여성이다.
당근과 채찍, 칭찬과 훈계, 찬양과 비난의 리듬 속에서 ‘그럼 나는?’이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 마음의 한쪽은 괴로움의 지대로 향하는 고속열차를 탈 것이고, 다른 한 쪽은 그런 질문 따위를 빨리 지워야 진짜 엄마가 될 수 있다며 반대 방향으로 달리게 할 것이다. 찢겨져 나가는 마음을 붙잡을 새도 없이 또 아이는 웃거나 울 것이고 사야할 목록도 늘어날 것이다.
정말 괴로운 것은 이것이 끝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울마저도 엄마 되기의 이데올로기로 ‘활용’되는 순간이 온다.
최근 ‘클라인펠터 증후군’이라는 단어를 검색어 순위에까지 올려준 한 여성의 자살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이 기사화된 방식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황색 저널리즘이었지만, 이런 기사들은 영아살해의 형태로 사건을 전하는 것의 효과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여성에게 가해진 사회적 억압과 산후우울의 무게, 엄마 되기의 진실을 침묵시킨다는 점 말이다. 요점을 흐리기 위해 영아살해, 더불어 아이의 특성까지 악의적으로 활용한다. 클라인펠터 증후군은 사실(fact)이여서 등장한 게 절대 아니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비추어 우려해야 할 정도보다 더 많은 공포를 매스컴이 강조한다면 그것은 그 공포가 수행하는 이데올로기의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산후우울증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강조되는 방식에서 ‘영아살해’라는 극단적인 우려는 육아의 담당자로 자리매김 되는 전통적 여성상을 강화한다. 또한 여성이 실제로 겪는 우울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차단하고 불필요한 죄책감을 심어준다.”(45p)
우울을 둘러싼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묵살되거나 유통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여성들은 그저 “극단적인 사례를 다룬 뉴스를 보며 ‘나도 저 느낌을 알아’하고 독백할 뿐이다.” 나도 저 느낌을 알아! 책을 읽다 이 말을 몇 번을 되풀이 했는지 모르겠다. 이 ‘느낌’이 구체화되지 않는 한, 여성들은 항상 사치스런 그러나 불평 많은 소비자 엄마로만 남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에 실린 인터뷰들은 소중하다. 그런 이야기들이 모이고 모여 엄마노릇의 속내가 무엇인지, 그 ‘느낌’을 역사로 바꿔 쓸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좋겠다. ▣ 김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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