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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걷는 여성 여행자의 ‘걸음’에 관하여
리즈 위더스푼 제작, 주연 영화 <와일드>  

 

 

▲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영화 <와일드>(Wild) 포스터 
 

지난 22일 열린 제8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와일드>의 셰릴 역을 맡은 배우 리즈 위더스푼이 ‘#AskherMore’ 캠페인에 지지를 보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AskherMore’(그녀에게 좀더 물어보세요)는 저널리스트들에게 레드카펫 위 여성배우들의 드레스와 몸매 외에 다양한 부분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는 캠페인이다. 리즈 위더스푼은 오스카 시상식에서 “이 운동은 우리가 우리의 드레스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할리우드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렵다” 라고 밝힌 바 있다.

 

<와일드>(Wild, 2014)는 리즈 위더스푼이 여성배우들의 권익을 위해 2년 전 직접 제작사를 차린 뒤 제작한 영화다.

 

4,286km를 걷는 여행

 

<와일드>의 주인공 셰릴 스트레이드는 인생의 난제에 봉착하고는,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장장 4천286km에 달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Pacific Crest Trail)을 걷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여정은 시작부터 전혀 만만하지 않다. 셰릴이 하이킹 첫 날 배낭을 어깨에 메려는 순간부터 여행길과의 불화가 시작된다. 이후 ‘몬스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덩치의 배낭은 셰릴의 몸을 짓누르고 심지어 바닥을 나뒹굴게도 만들지만, 그녀는 기어코 일어서서 걷고 만다.

 

‘왜 시작했지’ 하는 후회와 ‘그냥 포기할까’ 라는 유혹에 수도 없이 시달리지만, 그녀는 길 위에서 만난 다른 여행자의 도움으로 불필요한 짐을 줄이거나 신발을 바꾸고, 여행-생활의 기술들을 점점 터득하며 길에 적응해간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길고 험한 길 위에서 반복적으로 과거를 마주하고 상실감의 핵심인 엄마와의 기억을 계속 떠올리게 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발은 지금 여기, 길 위를 굳건히 버티고 걸어 나간다.

 

Yes I would, if I could, I surely would

(Simon & Garfunkel의 “El Condor Pasa” 중) 

 

          ▲   리즈 위더스푼이 제작과 주연을 맡은 영화 <와일드> 스틸컷. 
 

트래킹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전달하는 강렬한 인트로 이후, 영화는 셰릴이 몇 가지 에피소드를 겪으며 트래킹 코스를 걷는 현재 시점의 여행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 사이사이에 상기되는 기억을 연결점으로 삼아 과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연결점이란 주인공의 감정 상태나 마음속에 들려오는 음악, 텐트 안에서 펼쳐본 책 등이다. 영화는 이런 것들을 매개로 과거의 기쁨이나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며 셰릴의 캐릭터를 쌓아간다.

 

길 위에서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반가운 동료를 만나는 등 몇 가지 에피소드를 겪지만, <와일드>는 사건보다는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는 영화다. 인물 혼자 걷는 장면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 영화에서 인물의 정서적인 측면이나 내면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셰릴이 PCT 코스 완주를 목전에 두고 숲에서 마주친 아이와 ‘인생의 문제’를 논한 뒤 아이의 노래를 듣는 장면은 상처와 고통, 그리고 치유의 감각이 전해져 오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여성 여행자가 혼자 걷는 길에는…

 

셰릴이 길 위에서 겪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은 혼자 여행해본 여자 여행자라면 느껴보았을, 익숙하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두려움과 긴장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셰릴이 급한 상황에서 한 남성의 차를 얻어 타는데 그의 험한 인상과 습관에 몸이 움츠러들어 남편이 있다고 가장하는 에피소드나, 셰릴에게 도움을 받은 뒤 대뜸 다시 돌아와 시비를 거는 사냥꾼 일행의 에피소드는 여행하는 여자들이 ‘위험’과 ‘안전’이라는 키워드에서 자유롭기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특히 사냥꾼의 경우, 실제로 범죄 상황을 초래하지는 않았지만 그와 유사한 위협을 조장함으로써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 죄질이 나쁘다 할 수 있다. 

 

           ▲  리즈 위더스푼이 제작과 주연을 맡은 영화 <와일드> 스틸컷. 
  

이제는 국내에서든 국외에서든 ‘나 홀로’ 여자 여행자를 마주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여자 여행자들이 모이는 까페에서는 여전히 ‘혼자 여행하는 것 위험하지 않나요?’ 라는 질문이 잦은 빈도수를 기록하는 것을 보면, 여자가 집을 떠나서 배낭을 메고 혼자 낯선 길을 걷는다는 것의 조건과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여성 부랑자’가 아닌 ‘페미니스트 여행자’

 

영화를 보면서 재미있었던 부분 중 하나는 ‘부랑자 타임스’라는 정체가 불분명한 매체의 기자가 셰릴에게 다가와 무턱대고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셰릴이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주저 않고 밝힌다는 점이다. 여자 부랑자는 특종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기자에게 셰릴은 여자는 왜 일상을 떠나면 안 되냐고, 여자는 아이와 부모를 돌보아야 하고 일상을 떠나면 부랑자가 되는 것이냐고 따지며 목소리를 높인다.

 

영화 속 캐릭터가 페미니스트임을 저리 시원하게 드러내는 영화가 얼마나 있었나. 하지만 이 영화가 그녀의 페미니스트로서의 인식과 세계관을 촘촘하게 쌓아 올렸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20대에 애드리언 리치의 시를 읽으며 쌓아 올린 그녀의 세계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딸이라는 위치에서, 자신만의 인생이 없는 ‘착한 엄마’의 삶을 이중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셰릴은 무슨 고민을 했을까. 고된 절망을 겪기 이전과 이후 남편과의 관계망 안에서 셰릴은 무엇을 보았을까.

 

셰릴이 PCT 코스를 걷기로 결심한 것은 마트에서 우연히 가이드북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라고, 혹은 그런 ‘기행’을 저지를 만큼 그녀가 절망스러운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여행은 우연도 기행도 아닌, 지금까지의 삶과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진, 셰릴 스트레이드라는 여성의 자아와 세계관의 반영이다.

 

하지만 영화 안에서는 그녀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이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해서 결국 그녀가 길 위에 서게 되었는지에 대한 유기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관계망 속에서, 걸음과 걸음 사이에서 페미니스트로서의 인식과 세계관이 좀더 드러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영화 <와일드>(Wild)  
 

‘아무렇게나 흘러가게 둔 인생은 얼마나 야생적인가’

 

자아를 찾기 위해 떠난 여행이 쉽게 자아를 내어주는 것은 아니듯이, 상처를 마주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걸음이 곧 해방의 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혼자 걷는 경험이 삶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일상에서 깨닫지 못했던 낯선 자유를 발견하게 하는 작업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와일드>는 믿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하거나 드라마틱한 전개로 관객들의 흥미를 충족시키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삶의 은유로서의 여행에 대해 그려내며, 새로운 여행을 떠날 사람들의 마음에 바람을 불어넣는 데에는 분명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

 

‘아무렇게나 흘러가게 둔 인생은 얼마나 야생적인가.’

영화의 대사를 기억하며 언젠가 다시 떠날 길에 대해 상상해본다. ▣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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