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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교육정책이 아동심리에 미치는 영향분석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까. 꿈꿔 봅시다.
글과 수 개념, 기초과학이론, 역사를 배우고요. 집중력과 인내심을 키우고 시간을 지키는 법도 배우겠지요. 과학적으로 추론하고 생각하는 방법도 익힐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잘 넘길 수 있게 되고, 친구와 힘을 모으고, 친구를 위로하는 마음을 배워도 좋겠습니다. 게임에서 졌을 때 패배를 인정할 줄도 알고, 잘한 일에 대해서는 칭찬받는 경험도 쌓고요. 신나게 노는 법도 학교에서 익힌다면 좋겠지요!
심리학자 입장에서는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타인 마음에 귀 기울이는 경험도 해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같이 노래 부르고 춤추고, 미술작품도 만들고, 팀 스포츠에 참여하는 것도 있고요. 건강한 밥상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고, 책에 나오는 유적지를 찾고 예술작품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다면 더 좋겠지요.
또 무얼 배우면 좋을까요.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해볼수록 신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이 문제를 생각하면 암담하고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전국학력평가, 교사해임…울타리 대신 철조망이 된 공교육
시험을 하나 더 늘리고 과목성적에 따라 아이들을 줄 세우며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로 이름 붙이는 것은 분명 문제입니다. 특히 초등학생 때에는 다양한 영역에서 학습을 시작하면서 자기 실력을 또래들과 비교하려는 모습이 강해지는 시기라고 합니다. 발달과정 상 다방면으로 배우는 시기이므로, 주변 친구들과 비교를 하면서 자기는 무엇을 잘 하는 사람이고 무엇을 못하는 사람인가를 인식하게 되지요.
에릭슨이라는 심리학자는 성장과정에서 이 시기의 과제를 무사히 통과한 아이는 근면성을 키우고 노력을 기울이는 법을 배울 수 있지만, 여기서 좌절한 아이들은 열등감에 빠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주로 학교학습을 전면화시키기 때문에, 학교학습이라는 제한된 영역 내에서 대다수의 아이들이 열등감을 느끼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열등감은 청소년기와 성인기에 자기 확신과 주도성을 지니고 자아를 실현하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교육환경을 결정짓는 기관에서 발달과정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채 아이들을 좁디 좁은 영역에 한정하여 줄 세우기 식으로 평가를 한다니 큰 실수가 아닌가 싶습니다.
실은 더 걱정되는 바가 있습니다. 학력평가와 체험학습의 선택권을 제공한 선생님들이 어이없이 해임당하는 사태를 보자니 말입니다. 바로 교육철학이 부재한 관료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교육환경에 아이들이 대면한 현 상황입니다.
교사가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설명을 제공하고 선택할 기회를 부여했고, 부모와 아이가 서로 존중하면서 선택한 실천의 교육현장은 교사해임이라는 결과로 왜곡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교육철학과 전문성이 부재한 교육청과 이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어른들의 세계를 목격했습니다. 교육청은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게 될 것인가를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성장을 위한 모험과 역할모델이 부재한 학교
학교는 아이가 성심껏 판단을 내리고 이것을 실천하는 역량을 쌓는 발판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배움의 공간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판단의 주체로 자라고, 자기 행동에 도덕적 책임을 지는 행위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맹목적 관료주의와 눈먼 복종에서 아이들은 몹시도 실망했을 것 같습니다.
인생 신념, 철학, 숙고와 실천이 부재한 채 권위에 굴종해야만 하고, 신념으로 선택하고 실천했을 때 처벌이 뒤따르는 교육환경에서 아이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 정체성을 발달시키거나 희망을 꿈꾸기란 어렵습니다.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교육환경에서 아이들은 건강한 정체성을 형성할 수 없습니다. 보통 아이들은 권위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탐색하고 시도하여 정체성을 설정해 나갑니다. 그렇다 보면 갈등은 피할 수 없지요. 십대 시기 이러한 갈등과 위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탐색을 처벌하는 환경은, 아이들이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막습니다. 교육환경은 아이들이 다양한 가치를 시도하는 현장에서 안전하고 유연한 울타리의 역할을 해주어야 하지, 가시가 뾰족뾰족한 철조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아이들에게는 역할모델이 필요합니다.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가치판단의 기준을 세워주는 누군가는 몹시도 절실합니다. 아이는 그를 존경하고 동일시하면서 자기 이상과 목표를 설정합니다. 그리고 건설적인 판단이 요구되는 위기상황에서 동일시한 인물이 과연 어떤 판단을 내릴까를 떠올리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터득합니다.
아이는 존경하는 사람을 동일시하면서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도 키웁니다. 자신이 존경하는 스승의 모습을 따르면서 스스로도 가치 있고 존경스러운 사람이라 여길 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건강한 자기 사랑의 기반은 이로부터 나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명품과 메이커를 사달라고 조르면서 가짜 자기를 욕망할 필요가 없을 테지요.)
억압과 획일성이 만연한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은 건강한 자기 사랑을 키우거나 정체성을 다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성장하기 위한 모험과 도전의 시도가 처벌받고 훌륭한 역할 본보기가 부재한 교육환경에서 아이들은 어디로 이상향을 설정해야 하는지요.
관료주의적 교육환경은 사회를 그늘지게 만든다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 대한 심리학 연구를 찾다 보니 결국 의도치 않게 히틀러 시대의 심리학 연구를 들춰보게 되어 기분이 묘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히틀러 시대의 참혹함 안에서 살고 있지는 않지만,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했던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의 연장선에서 작동하는 교육환경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몰살이 일상적인 관료주의 절차의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은, 나치 홀로코스트의 가장 충격적이고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국가폭력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관료주의는 국가폭력의 필수조건이라고 지적합니다. 폭력적인 정권이 물러나도 사회가 바뀌지 않는 것은 기계적인 관료주의 탓이라고 말합니다.
권위주의가 지배하고 관료주의가 팽배한 환경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배웁니까. 심리학 문헌은 권위주의 환경이 ‘권위주의적 성격’을 양산한다고 말합니다. 아도르노라는 심리학자는 억압된 아이들은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이로부터 파생된 분노를 사회적 약자에게 전가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복종을 강요하는 교육환경이 권위주의적 성격을 유발시킨다는 연구들도 있습니다.
권위주의의 희생양은 결국 그 자신이 사람을 서열화하고 편견을 지속시키는 권위주의의 실행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관료주의는 아이들의 건설적인 사고 능력을 마비시킵니다. 관료주의는 가치체계의 숲을 보지 못하게 하고 도덕적인 판단력을 가립니다. 관료주의적 사고양상은 편협한 시각에서 성급하고 무분별하게 판단 내리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융통성 없이 경직되고 기계적인 사고패턴을 굳히고, 대안을 섭렵하는 열린 태도를 막습니다.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적 사고방식이 결합한 공교육 환경이 아이들의 인성발달에 가하는 부정적인 영향력을 직시해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교육환경이 인간성을 상실한 자본주의 사회와 만날 때 벌어질 수 있는 위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서열화하는 권위주의적 성격, 경직되고 기계적인 사고양상은 한국사회 자본주의 땅 위에 더 많은 곳을 그늘지게 할지 모릅니다.
우리네 학교는 왜 아이들이 배우지 않았으면 하는 추한 모습을 보이고, 아이가 그것을 경험해야만 하게 만듭니까. 학력평가를 선택한 아이도, 체험학습을 선택한 아이도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성장이라는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길을 잃은 아이들에게 역할본보기가 되어주었던 존경하는 선생님들, 힘을 내주시어 더 빛나는 등대가 되어 주십시오.
[일다] 최현정 ☞ 관련기사 “공부 못하는 아이” ☞ 관련기사 ‘강박적인 삶’ 조장하는 무한경쟁체계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까. 꿈꿔 봅시다.
글과 수 개념, 기초과학이론, 역사를 배우고요. 집중력과 인내심을 키우고 시간을 지키는 법도 배우겠지요. 과학적으로 추론하고 생각하는 방법도 익힐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잘 넘길 수 있게 되고, 친구와 힘을 모으고, 친구를 위로하는 마음을 배워도 좋겠습니다. 게임에서 졌을 때 패배를 인정할 줄도 알고, 잘한 일에 대해서는 칭찬받는 경험도 쌓고요. 신나게 노는 법도 학교에서 익힌다면 좋겠지요!
심리학자 입장에서는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타인 마음에 귀 기울이는 경험도 해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같이 노래 부르고 춤추고, 미술작품도 만들고, 팀 스포츠에 참여하는 것도 있고요. 건강한 밥상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고, 책에 나오는 유적지를 찾고 예술작품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다면 더 좋겠지요.
또 무얼 배우면 좋을까요.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해볼수록 신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이 문제를 생각하면 암담하고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전국학력평가, 교사해임…울타리 대신 철조망이 된 공교육
새 입시제도 발표에 반발하는 학생들 (2005)
에릭슨이라는 심리학자는 성장과정에서 이 시기의 과제를 무사히 통과한 아이는 근면성을 키우고 노력을 기울이는 법을 배울 수 있지만, 여기서 좌절한 아이들은 열등감에 빠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주로 학교학습을 전면화시키기 때문에, 학교학습이라는 제한된 영역 내에서 대다수의 아이들이 열등감을 느끼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열등감은 청소년기와 성인기에 자기 확신과 주도성을 지니고 자아를 실현하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교육환경을 결정짓는 기관에서 발달과정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채 아이들을 좁디 좁은 영역에 한정하여 줄 세우기 식으로 평가를 한다니 큰 실수가 아닌가 싶습니다.
실은 더 걱정되는 바가 있습니다. 학력평가와 체험학습의 선택권을 제공한 선생님들이 어이없이 해임당하는 사태를 보자니 말입니다. 바로 교육철학이 부재한 관료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교육환경에 아이들이 대면한 현 상황입니다.
교사가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설명을 제공하고 선택할 기회를 부여했고, 부모와 아이가 서로 존중하면서 선택한 실천의 교육현장은 교사해임이라는 결과로 왜곡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교육철학과 전문성이 부재한 교육청과 이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어른들의 세계를 목격했습니다. 교육청은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게 될 것인가를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성장을 위한 모험과 역할모델이 부재한 학교
학교는 아이가 성심껏 판단을 내리고 이것을 실천하는 역량을 쌓는 발판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배움의 공간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판단의 주체로 자라고, 자기 행동에 도덕적 책임을 지는 행위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맹목적 관료주의와 눈먼 복종에서 아이들은 몹시도 실망했을 것 같습니다.
인생 신념, 철학, 숙고와 실천이 부재한 채 권위에 굴종해야만 하고, 신념으로 선택하고 실천했을 때 처벌이 뒤따르는 교육환경에서 아이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 정체성을 발달시키거나 희망을 꿈꾸기란 어렵습니다.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교육환경에서 아이들은 건강한 정체성을 형성할 수 없습니다. 보통 아이들은 권위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탐색하고 시도하여 정체성을 설정해 나갑니다. 그렇다 보면 갈등은 피할 수 없지요. 십대 시기 이러한 갈등과 위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탐색을 처벌하는 환경은, 아이들이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막습니다. 교육환경은 아이들이 다양한 가치를 시도하는 현장에서 안전하고 유연한 울타리의 역할을 해주어야 하지, 가시가 뾰족뾰족한 철조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아이들에게는 역할모델이 필요합니다.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가치판단의 기준을 세워주는 누군가는 몹시도 절실합니다. 아이는 그를 존경하고 동일시하면서 자기 이상과 목표를 설정합니다. 그리고 건설적인 판단이 요구되는 위기상황에서 동일시한 인물이 과연 어떤 판단을 내릴까를 떠올리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터득합니다.
아이는 존경하는 사람을 동일시하면서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도 키웁니다. 자신이 존경하는 스승의 모습을 따르면서 스스로도 가치 있고 존경스러운 사람이라 여길 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건강한 자기 사랑의 기반은 이로부터 나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명품과 메이커를 사달라고 조르면서 가짜 자기를 욕망할 필요가 없을 테지요.)
억압과 획일성이 만연한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은 건강한 자기 사랑을 키우거나 정체성을 다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성장하기 위한 모험과 도전의 시도가 처벌받고 훌륭한 역할 본보기가 부재한 교육환경에서 아이들은 어디로 이상향을 설정해야 하는지요.
관료주의적 교육환경은 사회를 그늘지게 만든다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 대한 심리학 연구를 찾다 보니 결국 의도치 않게 히틀러 시대의 심리학 연구를 들춰보게 되어 기분이 묘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히틀러 시대의 참혹함 안에서 살고 있지는 않지만,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했던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의 연장선에서 작동하는 교육환경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몰살이 일상적인 관료주의 절차의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은, 나치 홀로코스트의 가장 충격적이고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국가폭력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관료주의는 국가폭력의 필수조건이라고 지적합니다. 폭력적인 정권이 물러나도 사회가 바뀌지 않는 것은 기계적인 관료주의 탓이라고 말합니다.
권위주의가 지배하고 관료주의가 팽배한 환경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배웁니까. 심리학 문헌은 권위주의 환경이 ‘권위주의적 성격’을 양산한다고 말합니다. 아도르노라는 심리학자는 억압된 아이들은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이로부터 파생된 분노를 사회적 약자에게 전가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복종을 강요하는 교육환경이 권위주의적 성격을 유발시킨다는 연구들도 있습니다.
권위주의의 희생양은 결국 그 자신이 사람을 서열화하고 편견을 지속시키는 권위주의의 실행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관료주의는 아이들의 건설적인 사고 능력을 마비시킵니다. 관료주의는 가치체계의 숲을 보지 못하게 하고 도덕적인 판단력을 가립니다. 관료주의적 사고양상은 편협한 시각에서 성급하고 무분별하게 판단 내리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융통성 없이 경직되고 기계적인 사고패턴을 굳히고, 대안을 섭렵하는 열린 태도를 막습니다.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적 사고방식이 결합한 공교육 환경이 아이들의 인성발달에 가하는 부정적인 영향력을 직시해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교육환경이 인간성을 상실한 자본주의 사회와 만날 때 벌어질 수 있는 위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서열화하는 권위주의적 성격, 경직되고 기계적인 사고양상은 한국사회 자본주의 땅 위에 더 많은 곳을 그늘지게 할지 모릅니다.
우리네 학교는 왜 아이들이 배우지 않았으면 하는 추한 모습을 보이고, 아이가 그것을 경험해야만 하게 만듭니까. 학력평가를 선택한 아이도, 체험학습을 선택한 아이도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성장이라는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길을 잃은 아이들에게 역할본보기가 되어주었던 존경하는 선생님들, 힘을 내주시어 더 빛나는 등대가 되어 주십시오.
[일다] 최현정 ☞ 관련기사 “공부 못하는 아이” ☞ 관련기사 ‘강박적인 삶’ 조장하는 무한경쟁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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