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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사춘기’라는 즐거운 소식
<죽음연습> 38. 제2의 사춘기를 안겨준 장수(長壽)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연재 ‘죽음연습’.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친구들이 하나 둘 이혼 소식을 알려왔다. 가족, 친구, 이웃 등 가까운 사람들이 차례로 암에 걸렸다. 알고 지내는 폐경기 전후의 여성들이 신체의 통증과 마음의 우울증을 심각하게 호소해왔다. 더는 주부가 아니라 집밖에서 일을 찾으려 애쓰는 친구도 생겨나고, 남편이 명예퇴직을 하거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음으로써 경제 상황이 달라진 지인들도 있다.

 

내 주변 50대 전후 사람들이 겪는 심리적, 신체적, 사회.경제적 변화는 특별한 것이 아닐 것이다. 아니, 특별한 것이 아니다. 비록 개개인이 겪는 변화가 다양하고, 그 변화를 대하는 태도에는 차이가 날 수 있지만, 이 사람들이 겪는 변화의 경험은 어느 정도 닮은 점이 있어 보인다. 다들 중년의 한가운데서 다채로운 변화들이 안겨주는 인생의 중요한 질문에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중년과 노년 사이, ‘제2의 사춘기’ 등장
 

▲ 크리스토퍼 해밀턴 저 <중년의 철학>(원제: Middle Age) 원서 표지 이미지. 
 

현실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한 국어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중년’은 마흔 살 안팎을 의미한다. 때로 50대를 포함할 수 있다고 덧붙이긴 한다. 그렇지만 유엔(UN)이 정한 노년의 기준, 즉 ‘만 65세부터 노년이 시작됨’을 내면화한 사람들에게 ‘중년’은 사전적 정의와 달리 65세 이전까지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개인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오늘날의 ‘중년’이란 30대 후반에서 60대 중반까지, 즉 노년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제법 수십 년에 걸쳐 있는 시기를 뜻하는 단어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중년’에서 30대가 제외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이처럼 ‘중년’의 의미가 모호한 것은 평균 수명이 그 어느 때보다 늘어난 데 이유가 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날 때마다 인생의 단계 구분도 함께 변화해 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춘기’만 해도 그렇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20세기가 되기 전까지 인류는 오늘날만큼 긴 세월을 살지 못했다. 그래서 그 이전 시대에는 ‘사춘기’라는 인생의 단계가 없었다. 아이들은 얼마 자라지 않아 바로 일터로 내몰렸고 10대에 결혼하고 출산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동기 다음은 바로 성인기였다.

 

사춘기가 출현한 것은 평균 수명 50세 시대를 연 20세기에 이르러서라고 한다. 1904년 스탠리 홀이라는 미국의 교육학자가 처음으로 10대를 ‘사춘기’라는 독립된 인생 발달 단계로 이름 붙였다.

 

이제 평균 수명이 80대로 접어든 오늘날, ‘또 다른 사춘기’가 필요하다는 심리학자, 사회학자의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즉, 중년과 노년 사이에 ‘제2의 사춘기’라는 인생 단계를 넣기 시작한 것이다. 노년에 앞선 수십 년간의 중년을 다시 ‘중년’과 ‘제2의 사춘기’로 나누려 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년이 연장된 때문이다.

 

어쩌면 요즘 사람들에게는 50,60대를 10대의 사춘기와 같은 과도기로 보는 학자들의 의견이 그리 낯설지 않을 수도 있겠다. 50,60대에 겪는 변화가 10대의 사춘기 못지않게 한 사람의 인생에서 중요한 경험이 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곤 한다. 살아가는 동안 ‘두 번의 사춘기를 맞는다’는 이야기도 곧 진부해질 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50,60대를 ‘중년’으로, ‘제2의 사춘기’로 이름 붙일 정도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인류 역사상 가장 기나긴 인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제2의 사춘기’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나는 걷는다>(효형출판, 2004)의 저자인 베르나르 올리비에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한번 더 튀어 오르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죽기 전 한번 더 튀어 오르고 싶은’ 시기에 ‘사춘기’라는 이름보다 더 적절한 이름이 있을까? 크고 작은 변화를 겪고 있는 내 주변의 50대 전후 중년들도 바로 ‘두 번째 사춘기’로 몸살을 앓는 사람들로 보인다.

 

10대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사춘기, 즉 첫 번째 사춘기는 아동에서 성인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겪는 인생의 단계다. 이때 청소년은 신체적, 심리적인 큰 변화를 경험하고 부모와의 관계를 넘어 사랑과 우정의 관계로 인간 관계를 확장해 나간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자리잡고 있다.

 

10대 사춘기 시절, 우리는 ‘나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가면서 나를 스스로 만들어 나갔다. 비록 우리가 평생 동안 계속해서 ‘나’를 형성해가지만, 특히 10대 사춘기의 ‘자기 정체화’ 과정이 그 중요한 바탕이 된다.

 

그런데 인생의 마무리 단계에 진입하기 전, 또 한차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는 ‘사춘기’가 온다는 생각은 참으로 흥미롭다. 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두 번째 사춘기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과 가족에 집중하는 중년, 즉 인생의 절정을 넘어 신체적, 심리적 변화와 더불어 일과 인간 관계의 변화가 두드러지는 50,60대에 이르러,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자기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더 물음을 던져볼 기회가 주어진다니 멋진 일이다. 여성이라면 ‘완경’(完經, ‘폐경’을 대체하는 용어)을 겪는 시기를 사춘기의 ‘초경’만큼이나 강렬하게 신체적, 심리적 변화를 경험하는 ‘제2의 사춘기’로 간주해도 좋을 듯하다.

 

흰 머리와 주름살과 같은 외모의 변화 앞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나’, 지금까지 해온 일에서 충분히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나’, 신체적으로 쇠약해지고 병까지 얻어 죽음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나’, 도시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시골의 삶을 꿈꾸는 ‘나’, 누군가를 위해 내 시간과 능력을 나눠주고 싶은 ‘나’, 가슴 뛰는 사랑을 갈망하는 ‘나’…. 도대체 ‘나’는 누구일까?

 

‘나’는 젊어 보이기 위해 외모를 가꾸고, 건강을 유지하거나 회복하기 위해 운동에 몰두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나’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흥미로운 취미 생활에 열중한다. ‘나’는 배우자와 헤어지고 새로운 로맨스를 찾아 떠난다. ‘나’는 그 사이 소홀했던 과거의 동창생을 다시 만나는 자리를 마련한다. ‘나’는 봉사 활동에 열정을 쏟기도 하고, 시골로 이사 가서 삶의 터전을 바꾸거나, 자녀를 유학시키거나 독립시켜 떠나 보낸다.

 

외적인 변화들은 내면의 변화를 반영하고 동반한다. 내가 깨닫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크고 작은 변화들이 ‘살아가기에는 늙었지만 죽기에는 너무 젊은’ 나를 휩쓸고 지나간다.

 

두 개의 상반된 자아
 

▲  애비게일 트래포트 저, 오혜경 역 <나이듦의 기쁨>(마고북스, 2004) 
 

미국의 칼럼니스트 에비게일 트래포트는 <나이듦의 기쁨>(마고북스, 2004)에서 내면과 외면의 변화에 직면하는 ‘제2의 사춘기’를 맞이해 ‘한번 더 튀어 오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조언을 건넨다.

 

‘나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배우자의 죽음, 자녀의 독립, 은퇴나 이혼과 같은 크고 작은 ‘상실’이라는 변화를 성숙의 계기로 삼으라고. 중년의 절정, 즉 과거의 시간에 갇히지 말고 심지어 의도적으로 위기를 조성하고 도전하면서 미래를 향해 깨어나라고. 10대의 사춘기 때 그랬던 것처럼, 꿈을 꾸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자신의 경험을 타인과 나누고 공동체에게 되돌려주면서,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을 만드는 생산적인 시간을 가지라고. 그는 충고한다.

 

이러한 성숙의 과정을 통해서 내면의 변화를 겪어나가는 동안, 새로운 자아가 만들어지고 또 한번 튀어 오를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고 본다.

 

이때 ‘한번 더 튀어 오르려는 자아’ 곁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 영국의 종교철학 교수인 크리스토퍼 해밀턴은 <중년의 철학>(알키, 2012)에서 중년의 내면에는 ‘두 자아’가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또 다른 자아는 다름 아닌 ‘죽음을 바라보는 자아’다.

 

다시 말해서 이 자아는 ‘아직은 기운도 있고 삶을 향유할 수 있어!’라고 큰 목소리로 외치는 ‘강렬한 생명과 에너지를 발산하는 자아’ 곁에서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군’ 하고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자아로 보면 된다.

 

두 번째 사춘기는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꿈을 꾸고 자신을 찾아가고 실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10대의 사춘기와 닮았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10대의 사춘기와는 명백히 차이가 난다. 다시 한번 더 튀어 오를 수 있을 것 같지만 신체의 회복력이 떨어지고 병이 하나 둘 늘어가는 것을 경험할 때, 즉 ‘내 몸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 자연스럽게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제2의 사춘기’는 그때까지 소홀히 해온 ‘나이듦, 죽음’에 대한 성찰을 회피하지 않고 비로소 직면하기 시작하는 시기로서 의미가 크다고 봐야 한다. 새로운 자아로 성숙해지려면 ‘생명과 에너지를 발산하는 자아’와 ‘죽음을 바라보는 자아’를 통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완경을 기다리며

 

사실 인생의 단계라는 것은 편의상의 구분이지 획일적으로 구획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개개인은 중년의 시작과 끝, 제2의 사춘기의 도래를 제각기 다르게 경험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 변화를 심각하게 느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변화를 미처 자각하지 못한 채 세월을 지나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만 해도 인생이 다수의 모범답안처럼 진행되지 못해서, 학자들이 말하는 인생의 단계 구분이 내가 살아온 인생에는 제대로 들어맞질 않는다. 그럼에도 완경을 기다리는 지금, 두 번째 사춘기로 들어서는 느낌을 받는다. 몸도 마음도, 일도, 인간 관계도 두드러지는 변화의 물살을 타는 것 같다. 이 물살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엔 죽음에 이르겠지만, 그에 앞서 한 차례 높은 파도를 타고 튀어 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인생이 희망과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죽음이 인생의 종착역일지라도 상관없다. 미래를 향한 기대감과 설렘이 있는 한, ‘제2의 사춘기’는 분명 즐거운 소식이다.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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