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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에 드러나는 죽음의 상상 
<죽음연습> 전통상여 나무조각 박물관 ‘꼭두랑한옥’에서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연재 ‘죽음연습’.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이번에 큰 맘 먹고 북촌마을로 나들이를 떠났다. ‘꼭두랑한옥’에 가기 위해서다. 이 작고 독특한 박물관은 서울 가회동 북촌로 11길에 자리 잡고 있다. 북촌길을 따라 걷다가 ‘꼭두’가 장식된 한옥을 발견하면 나무 대문을 쓱 밀고 들어가면 된다. 입장료도 없다.
 

▲  서울 가회동 북촌마을에 있는 ‘꼭두랑한옥’   © 이경신  

 

사실, 내가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은 동숭동 동숭아트센터에 있었던 ‘꼭두 박물관’이었다. 귀엽고 재미나게 생긴 나무 조각이 인상적이라 동숭아트센터에 들를 때마다 항상 궁금했다. 하지만 너무 긴 시간을 미적거렸나 보다. 이번에 큰 맘 먹고 ‘꼭두 박물관’을 찾았더니, 박물관이 아쉽게도 문을 닫았다. 그나마 ‘꼭두랑한옥’에서 ‘꼭두’를 만날 수 있어 다행이라 해야 하나.

 

저승길의 든든하고 유쾌한 동반자, ‘꼭두’

 

꼭두랑한옥의 전시실에 들어서서 꼭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표정이나 몸짓 등, 그 모습이 기묘하면서도 우스꽝스러워서 우선 웃음이 난다. 이 유머가 넘치는 나무인형 장식은 모두 전통 나무상여를 장식했던 것이라고 한다. 사람의 모습을 한 것도 있고 동물의 형상을 한 것도 있다. 상여가 거의 사라진 요즘, 평소 상여를 볼 기회가 없는 우리에게 꼭두라는 존재는 참으로 낯선 존재일 수밖에 없다.

 

전시실에는 꼭두에 관한 친절한 설명이 있어 관람하기가 좋다. 도대체 꼭두란 어떤 존재일까? 설명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 보자.

 

한 마디로, 꼭두는 저승길 안내자다. 지금껏 살아온 익숙한 세상을 떠난다고 해서 바로 사후 세계에서 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망자가 쉴 거처에 도달하기까지 험한 길을 거쳐 가야 한다. 때로는 넓은 들을 지나고 언덕을 넘어야 하고, 때로는 큰 강을, 다리를 건너야 하는 힘든 여정인 것이다. 게다가 죽은 자는 사후 세계로 가는 길이 초행이라 낯설 수밖에 없는데, 험한 길을 헤쳐 나가야 하니 자연히 지치고 불안해진다.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다. 이때 죽은 자가 혼란에 빠지지 않고 길을 잘 찾을 수 있도록 꼭두가 곁에서 도와준다는 것이다.
 

▲  꼭두랑한옥에 전시된 다양한 형태의 꼭두들. 꼭두는 저승길의 안내자이다.   © 이경신  

 

그러면 꼭두는 망자를 어떻게 도와주는 것일까? 꼭두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거추장스러운 일을 도맡아하고 죽은 자의 마음을 달래서 즐겁게 해준다고 한다. 이렇게 꼭두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한 까닭에 다채로운 모습의 꼭두가 탄생했다.

 

먼저 꼭두를 표정과 동작이 무섭거나 무기를 들고 있는 남성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저승길이 질서가 잡혀 있지 않은, 미분화된 혼돈의 영역이다 보니 ‘삿된’ 것, 즉 나쁜 기운이 출몰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삿된 존재를 물리칠 수 있는 초월적인 힘을 가진 꼭두를 상상한 것이다.

 

또, 여행을 하다 보면 언제나 그렇듯이 저승길을 여행하는 중에도 자질구레하고 귀찮은 일들은 꼭 처리해야 한다. 표가 나지는 않지만 필요한 일을 묵묵히 해내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다. 이처럼 여행자의 시중을 드는 꼭두는 동작이 다소곳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여성으로 형상화했다. 뿐만 아니라, 이별의 슬픔을 안고 낯선 세상으로 향한 긴 여행길에 오른 망자, 그를 위로하고 울적한 기분을 바꿔줄 수 있는 꼭두는 악기 연주자나 무희, 거꾸로 서서 연희를 벌이는 재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결국 꼭두는 친숙한 곳에서 낯선 세계로 떠나야 하는 망자의 영혼을 동행하면서 그를 지켜주고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믿음직한 길동무다. 꼭두는 사후 여행자에게 든든한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역할을 담당한 꼭두 무리와 함께 하는 저승길 여행을 상상해 보면, 외롭거나 두렵기보다 오히려 왁자지껄한 가운데 모험으로 흥미진진하고, 멋진 사후 세계라는 목적지에 대한 기대감에 가득 차, 즐겁기까지 하지 않을까?

 

가까운 사람을 상실한 ‘산 자’의 마음을 담아

 

꼭두가 영혼의 저승길을 안내한다는 점을 미루어 봐도 그가 현실 세계에 속하지 않은 ‘비일상적인 존재’, ‘초월적 존재’, 즉 죽음과 관련한 전통적인 상상력에서 태어난 존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가까운 사람을 죽음으로 잃은 사람들이 겪는 이별의 슬픔, 상실의 안타까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비록 죽은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지만 다른 세상 어딘가에서 영원히 살아 있길 바라는 마음이 영혼과 사후 세계에 관한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다.

 

역사학자 나희라는 자신의 연구서 <고대 한국인의 생사관>(지식산업사, 2008)에서 영혼관, 타계관, 그리고 상장례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분석한다. 신라나 가야 지역 무덤에서 발견된 부장품, 즉 말, 배, 신발 모양의 토기가 그 흥미로운 사례일 것이다. 이 토기들은 영혼을 다른 세상으로 운반하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고대 한국인은 몸은 죽었지만 무언가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있다고 상상해서 ‘영혼’이란 존재를 상정한다. 영혼은 점차적으로 육신과 분리되어 더 자유로운 존재로 발전해가고, 영혼이 사는 공간도 집근처나 무덤처럼 가까운 곳에서, 수평 이동을 통해 도달하는 머나먼 곳으로, 뿐만 아니라 수직 이동을 통한 지하 세계나 천상의 세계로 변화해간다.
 

▲꼭두는 망자의 혼이 멀고험한 여행을 통해 이상적 사후세계에 이른다는 죽음관을 반영한다. ©이경신

 

‘꼭두’을 통해서도 고대 한국인의 죽음 관련 상상의 흔적을, 즉 죽은 사람의 영혼이 존재하고, 그 영혼이 사후에 멀고 험한 여행을 통해 이상적인 사후 세계에 이른다는 믿음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게다가 상여를 장식한 꼭두처럼 영혼을 안내하는 존재에 대한 상상은 고대 한국인의 죽음 문화 속에서도 이미 존재했다. 신라 사람들은 뱀, 자라, 개구리 도마뱀 형상의 신라 시대 토우를 무덤 속 부장품으로 넣는 풍습을 가졌는데, 그 동물들이 사후 지하 세계로 떠나는 여행을 도와주는 안내자로 상상했기 때문이다.

 

저승길 안내자에 대한 이러한 상상은, 죽음으로 인해 이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이 다른 세상으로 여행길을 떠난 것이라면, 그 여행이 될수록 편안하고 사후 세계에 무사히 도달해서 영원히 잘 살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꼭두는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의 여행에 함께할 수 없으니 대신 동고동락할 수 있도록 붙여준 동반자처럼 보인다. 그래서 <전설의 고향> 같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검정 옷에 무표정하고 창백한 안색을 지닌 저승사자와는 판이하게 다른, 유쾌하고 믿음직한 친구의 모습을 가졌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 죽음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만들어낸 ‘저승사자’와 달리, 가까운 사람을 상실한 산자들이 망자를 홀로 저승길로 떠나보내야 하는 안타까움으로 만들어낸 ‘꼭두’가 그 모습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저승사자는 흑백의 색채로 공포스럽게 표현한 데 반해, 꼭두는 화려한 색상으로 유머 넘치게 상상한 것도 ‘꼭두’에는 망자의 여행이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살아남은 자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기 때문이리라.

 

과거에는 죽음의 이별도 축제가 될 수 있었지만

 

오늘날 상장례를 통해 꼭두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병원과 장례식장이 죽음의 공간이 된 이후, 상여가 설 자리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알록달록 갖가지 색깔로 단장한 ‘꽃상여’는 도시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시골이라고 다를까? 시골 대부분이 도시화된 요즘, 상여를 동원한 전통장례가 여전히 존재할지 궁금하다.

 

‘상여’란 망자의 시신을 빈소로부터 묘지로 옮기는 장례 용구다. 언제부터 상여를 사용했는지 그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우리의 전통 상장례에 등장하는 상여는 다양한 장식과 다채로운 색상으로 알록달록 꾸며졌다. 상여 장식인 꼭두의 화려한 빛깔에서 치장된 상여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지금은 상여가 거의 사라진 상태지만, 상여야말로 우리 한국인의 전통적인 죽음관을 반영한다고들 평가한다. 오늘날 상여가 사라졌다는 것은 죽음관이 변화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  우리의 전통적인 죽음관은, 죽음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연속적이며 순환적이다.  © 이경신 
 

우리의 전통적인 죽음관에 의하면, 죽음과 삶은 분리될 수 없고 연속적, 순환적이라서 죽은 다음, 새로운 삶이 이어진다. 그리고 현세가 내세와 이어져 있어 죽은 자가 산 자를 찾아와 사후에도 산 자와의 교류도 가능하다. 그래서 장례식 때 죽음을 슬퍼만 하기보다 죽은 자의 새로운 삶을 축하하는 자리로 삼을 수 있어 춤, 연주, 노래, 술과 음식, 놀이가 함께 하고 농담과 웃음이 빠지지 않는 잔치가 가능했다.

 

하지만 현세와 닮은 물질적인 사후 세계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후에 천국이나 극락 같은 이상적인 세계 이외에 지옥이라는 세계를 따로 믿는 현대의 종교인에게, 또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아 산 자와 죽은 자의 소통도 인정할 수 없고,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뿐 사후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현대의 무신론자에게 전통적인 죽음관은 낯설지는 않지만 믿기 어려운 옛날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저승길을 안내하는 꼭두도 옛날 사람의 공상이 만들어낸 흥미로운 가상의 존재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은 자리에서 슬퍼하거나 담담할 수는 있어도 웃을 여유는 없다. 아니 절대 농담을 하거나 웃어서는 안 된다. 혹시 장례식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연주하고 농담하고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은 죽은 자가 미리 허락한 자리일 때뿐이다. 세월에 빛바랜 꼭두처럼 전통적 죽음관도 이미 빛을 잃었다.

 

전시를 모두 보고 난 뒤, 꼭두가 담긴 엽서나 한 장 사볼까 하며 기념품 가게를 들렀다. 재미있어 하며 구경하던 꼭두가 갑자기 섬뜩하다. 내 일상적 삶 속에 꼭두를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순간 사라졌다. 삶 속에 죽음을 데려오는 듯해서 꺼림칙했다. 박물관을 나서는데 내 등 뒤에서 꼭두들이 짓궂게 웃는다.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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