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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행위보다 ‘통념’이 더 큰 피해 남겨
“우리가 말하는 피해자란 없다” 연구 결과 발표 

 

 

 

“씻을 수 없는 영혼의 상처”

“한 여자의 인생을 망쳐 놨다.”

“영혼의 살인마”

 

언론에서 성폭력 범죄를 보도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수사다. 이런 수사는 성폭력 범죄의 심각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를 어딘가 영구히 훼손된 인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성폭력은 정말 ‘씻을 수 없는 상처’일까? 과연 성폭력 피해자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주변에 알려봐야 너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성폭력 피해자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피해’ 자체보다도, 피해를 바라보는 주변인과 사회의 왜곡된 ‘시선’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4월 23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는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연구소 ‘울림’이 주최한 <우리가 말하는 피해자란 없다 -성폭력 통념 비판과 피해 의미의 재구성> 포럼이 열렸다. 이 포럼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진행한 2005-2006년 인터넷 상담 389건의 일지와, 30명의 성폭력 피해자 인터뷰, 235명의 성폭력 피해자 설문조사를 토대로 한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4월 23일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연구소 ‘울림’ 주최 <우리가 말하는 피해자란 없다> 포럼 ©일다 
  

권인숙 ‘울림’ 연구소 소장은 “‘성폭력 피해가 한 여자의 인생을 망쳐 놨다’고 말하는 것이 성폭력 피해자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시선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 시선이 가지는 문제가 무엇일까 파헤쳐야 하는 시기”라고 말하며, “성폭력 피해에 관한 통념을 개념화하고 비판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235명의 성폭력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피해자들이 경험한 성폭력 피해에 관한 ‘통념’ 중 가장 흔한 것은 “네가 피해 사실을 주변 사람에게 알려봐야 너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말로, 응답자의 61.9%가 들어보았다고 한다. 이는 사람들이 성폭력 피해자에게 우호적이지 않거나, 성폭력 경험이 피해자의 삶이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라는 인식을 담고 있는 말이다.

 

그 다음으로는 “너의 피해를 공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가 53.7%로 나타났다. “네가 남자에게 만만해 보였기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도 49.1%로 높게 나타났는데, 이는 피해자의 평소 행실을 비난하고 성폭력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통념이다.

 

피해 경험이 엄청난 상흔으로 남아 영원히 괴로워하며 살 것이라는 낙인을 담은 말, “성폭력을 당했다는 것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을 것이다”도 48.6%의 응답자가 경험했다고 답했다. 이어 “성폭력을 당한 사람은 수치심과 자책감에 시달릴 것이다”가 47.7%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폭력 ‘통념’을 많이 접할수록 트라우마 높아

 

‘울림’에서 성폭력 트라우마(trauma: 정신적 외상, 정신장애를 남기는 커다란 충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조사한 결과, 어느 시기에 피해를 경험했는지,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는지 등은 성폭력 트라우마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성폭력 통념을 많이 경험할수록 트라우마는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권인숙 소장은 “성폭력 피해 자체에서 파생되는 피해보다 주변 사람들의 통념으로 인한 피해가 지배적임을 성폭력 설문조사 결과와 상담일지 분석을 통해 확인했다”고 말했다.

 

‘성폭력 경험 그 자체에서 파생되는 신체적 상해나 경제적, 직업적 손해, 신체적 후유증, 공포와 혼란’보다 ‘원인 제공이나 결과에 대해서 피해자를 비난하는 논리, 성폭력에 대한 주변사람들이나 사회의 판단, 평가, 반응, 행동이 초래하는 피해’가 더 크다는 것.

 

“피해자들이 경험하는 피해는 대부분 사회가 성폭력 발생 원인이나 결과를 두고 피해자를 비난하면서, ‘성폭력 피해는 이런 것이다’, 혹은 ‘성폭력 피해자의 삶은 이럴 것이다’라고 믿고 있는 통념이 만든 피해임을 발견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결과는 주변 사람이나 유관 기관에 대한 원망이 높을수록 성폭력 트라우마가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엄마(24.0%), 아빠(11.6%), 다른 가족(6.4%) 등 가까운 가족의 반응이나 태도에 대한 원망이 42%로 높게 나타났다. 여기에 친한 학교 선후배(10.5%), 직장 상사나 동료(7.1%), 애인(3.0%)을 합치면 60%가 넘어, 주변의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피해자들이 원망의 감정을 많이 느끼는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가 원망하는 마음을 갖는 유관 기관으로는 ‘경찰 등 공공기관’이 10.1%로 높게 나타났는데, 이는 형사사법기관의 태도 또한 피해자의 트라우마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뜻한다.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이 더 큰 상처 남겨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나 아동에게 심어주는 성폭력에 대한 인식은 주로 ‘늦은 밤 골목길에서 낯선 가해자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라는 이미지를 띄고 있다. 성폭력 예방 수칙은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로 시작되고, 국가에서 시행하는 안심 택시, 귀가길 안심 도우미 등의 안전 정책은 모두 ‘낯선 사람’에 의한 성폭력을 예방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이번 연구에서 비(非)면식 가해자에 의한 성폭력으로 발생한 ‘성폭력 트라우마’는 다른 성폭력 피해에 견줘 가장 낮게 나타났다. 친족성폭력 트라우마가 가장 높고, 데이트 성폭력, 공동체 성폭력이 뒤를 이었으며, 그 다음이 모르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이었다.

 

그 이유는 비(非)면식 가해자에 의한 성폭력이 전형적인 성폭력으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함부로 규정하는 등의 반응을 상대적으로 덜 나타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권인숙 소장은 “(낯선 사람에 의한 성폭력은) 주변 사람들이 피해 경험에 대해서도 훨씬 조심스럽고, 피해자의 의사를 중요하게 여기며, 피해자로서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결국 성폭력 피해는 주변 사람과의 반응 속에서 결정되는 측면이 강한 경험”이라고 강조했다.

 

김민정 ‘울림’ 객원연구원은 “조사 결과, 가해자를 신뢰했을 수록 성폭력 트라우마가 더 크지만, 가해자를 신뢰했더라도 (주변에서) 성폭력 통념으로 인한 비난을 별로 받지 않으면 트라우마가 크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피해 이후 주변인들과 사회의 반응이 어떠냐에 따라 피해 정도가 경감될 수 있다는 것.

 

‘너도 문제야’ 성인피해자를 괴롭히는 성폭력 유발론

 

이번 조사에 따르면, 아동이나 청소년에 비해 성인여성이 ‘피해자 비난’을 더 많이 경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성폭력 피해의 책임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돌리는 사회적 인식과 맞물려 있다.

 

성인기에 성폭력을 경험한 피해자들의 경우, “남자가 성욕을 통제하지 못해 실수한 것”이라며 가해자를 옹호하거나 가해자에게 관대할 것을 요구하는 통념을 많이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네가 유혹하거나 유발한 측면이 있다”, “네가 만만하게 보였기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난 것이다” 등의 통념도 높게 나왔다.

 

성인여성이 준강간을 당한 경우에 이는 더 두드러진다. 준강간은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 상태에서 벌어지는 간음이나 추행’을 뜻한다. 주로 술을 먹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며, 데이트를 하는 관계나 공동체 내에서 자주 발생하는데, 성인여성이 경험하는 강간 및 강간미수 사건에서 약 31%를 차지할 정도로 발생 비율이 높다.

 

권인숙 소장은 “준강간의 경우, 다른 피해 유형보다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비난하는 통념을 많이 경험한다”고 밝혔다.

 

준강간 피해자는 “네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성추행이나 강간당했다면 너에게도 책임이 있다”, “네가 키스나 애무를 허용한 것은 성관계를 허용했다는 뜻이다” 등의 말을 많이 접한다고 한다. 특히 “성폭력을 당하는 사람은 평소 성관계가 난잡하거나 문제가 있는 여자다”라는, 심한 비난도 많이 듣는다.

 

이러한 통념으로 인해 준강간 당한 성인여성들은 ‘자기 비난’을 많이 하게 되고 “피해자인 내 말을 남들이 믿게 하기 위해 자해 또는 자살을 시도한 적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권 소장은 이에 대해 “주변의 불신이 피해자의 행동이나 의식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성기삽입 여부는 성폭력 트라우마에 별 차이 없어

 

성폭력에 대한 공포는 주로 ‘성기 삽입’에 대한 공포로 이루어져있다. 삽입 강간의 경우 더 중한 처벌을 받거나, 삽입되지 않았으면 “그래도 괜찮다, 큰 일 안 겪었다”고 보는 인식이 만연하다.

 

그러나 이번 연구에서 삽입 강간을 경험한 피해자와 그렇지 않은 성폭력 피해자 사이에 피해 경험에 있어서 뚜렷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삽입 피해자는 “집에 오는 길에 죽어버리고 싶었다”, “첫 경험을 이런 식으로 당하다니”, “순결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등 피해 직후에는 혼란을 더 많이 겪지만, 전체적인 성폭력 트라우마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권인숙 소장은 “비(非)삽입 피해자가 삽입 피해자보다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더 높게 나타난 것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누가 봐도 성폭력 피해 사실이 분명하며 피해가 중하다고 인정되는 삽입 피해자는 피해자로서 피해를 토로하면서 살아나가는 것에 대해 비(非)삽입 피해자보다 더 많이 지지 받는다.”

 

이러한 경험이 삽입피해자의 성폭력 트라우마를 오히려 경감한다는 것이다.

 

이번 ‘울림’ 연구소의 연구 결과는 ‘아동기에, 낯선 사람에 의해 당하는, 삽입 강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 사회의 성폭력 이미지, 성폭력 예방책 및 대응책 모두를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걸 시사한다.

 

‘울림’의 권인숙 소장은 “한국사회가 성폭력 피해에 대해 갖고 있는 과도하고 단선적인 통념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면서, “성폭력 피해를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피해 담론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나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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