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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엄마도 저런 일 있었다고? 진짜?”
<초딩아들, 영어보다 성교육> 10. 일상의 젠더 폭력
‘아들 키우는 엄마’가 쓰는 초등학생 성교육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필자 김서화 씨는 초딩아들의 정신세계와 생태를 관찰, 탐구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편집자 주]
성추행 피해자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한 걸까
언젠가 TV뉴스에서 지하철 성추행에 대한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저녁을 준비하던 나는 “사람 많을 때 지하철 타기 정말 싫다니까. 저런 놈들 너무 많아!”라며 한탄 섞인 혼잣말을 했고, 이 말을 들은 아들이 화들짝 놀랐다. “엄마도 저런 일이 있었다고?”, “있지. 왜 없어.” 나의 대수롭지 않아하는 말에 아들은 더 놀랐는지 어느새 싱크대 옆까지 와서 얼굴을 치켜들고 나를 뚫어지게 본다. “정말? 진짜 저런 일이 있었다고? 엄마가? 왜?”
뭐냐, 이런 진심어린 반응은? 내가 더 당혹스럽잖니. 아니 그럼 엄마는 저런 일 없었겠냐. 얼마나 흔한 일인데. 잠시 나도 아들을 빤히 쳐다 볼 뿐 아무 말을 못하고 있었다.
아들은 곧 “헐. 난 몰랐네. 엄마 괜찮아?”라고 묻는다. 나는 고개를 가스렌지 위 냄비로 돌리며, “그러게나 말이다. 괜찮아.” 해놓고 보니 거, 참 내가 말해놓고도 청승맞다. 괜찮으냐는 말에 괜찮다는 말 외에 무슨 대답이 있었을까 싶기도 하고, 진짜 괜찮기도 했고, 난 왜 괜찮았나 생각하다 보니 다시 욱하고 명치부터 올라오는 분노! 생각은 내일로 미루고 빨리 밥이나 해먹자.
다음날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녀석은 뭐가 그렇게 놀라웠나 싶어졌다. 역시 아이에게 성추행이란 ‘큰 일’이구나 생각했다가, 그런 큰일을 나는 어찌 그리도 대수롭지 않은 일상처럼 여기고 있었던가 새삼 또 놀라는 지겨움.
그러다 이 녀석은 어떤 사람이 피해자가 된다고 상상하고 있던 걸까도 생각해봤다. 단순히 뉴스의 일은 그냥 ‘남의 일’,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좀 ‘대단한 일’이니 엄마도 뉴스에 나올만한 일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엄마가 왜?’ 하는 생각의 기저에 깔린 ‘엄마’란 어떤 사람이었을까. 반대로 뉴스에 나오는 성추행 피해자는 어떤 ‘여성’이라고 상상했던 걸까. 그때의 여성과 엄마는 전혀 연결될 수 없었던 걸까?
한적한 버스 안, 내 가슴에 얹어진 손
나는 화창한 날을 좋아한다. 아직은 습도가 높아지지 않은 초여름의 날씨. 약간 더워도, 눈이 부셔도, 꽤 나른해도, 여름의 태양 냄새가 좋다. 하물며 아스팔트 위의 이글이글하는 열기마저도 싫어하지 않는다. 빨래를 널면 반나절이면 마를 것 같은 햇볕 쨍한 여름날의 한낮을 좋아한다. 고등학교 2학년, 딱 내가 좋아하는 여름의 한낮이었다.
토요일이었는지, 학교 수업을 조퇴한 평일이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여하간 오전 수업만 하고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정말 완벽하게 내가 원하는 날씨였다. 이어폰을 끼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그날의 날씨에 푹 빠져 창밖을 보며 버스에 앉아 있었다. 가끔 옆에 서있는 사람이 너무 가깝다는 느낌만 들었다. 버스에 사람이 많구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뿐이다. 그 어떤 다른 생각을 할 여유 따위는 남겨두지 않고 모든 감각을 오로지 날씨를 만끽하고 창 밖 풍경을 구경하는데 쏟아 붓고 있었다. 답답한 기분이 좀 과하다 싶었을 때 ‘아, 오늘 왜 이리 사람이 많지?’ 하면서 무심결에 고개를 버스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일시 정지.
버스가, 왜, 한산하지?
그제야 내 손이 아닌 손이 오른쪽 가슴 위에 있는 것을 봤다. 몰염치한 손을 가리려 일간스포츠신문이 위선적으로 살짝 포개져 있었다. 꼬깃한 스포츠 신문과 그의 손을 소심하게 탁 치면서, 후다닥 반사적으로 일어나 버스 뒷문으로 달리듯 향하며 차임벨을 눌렀다.
뭐지, 뭐지, 뭐였지? 벨을 누르고 뒷문이 열리길 기다리는데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진다. 뒤늦게 둘러본 버스 안, 내 착각과 달리 버스에는 겨우 대여섯 명밖에 없었다. 만원버스인줄 알았는데…. 버스 안에서는 절대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이상스런 오기로 서있던 중 원망이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당신들은 뭐죠. 이렇게 한산한 버스에서, 당신들 죄다 보고 있던 거잖아. 원망스러움이 당혹스러움을 완전히 뒤덮어갈 때 뒷문 바로 앞에 앉은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아직도 그 아줌마의 눈빛이 더 많이 생각난다. 장을 보고 오시는지 검은 봉지 여러 개를 무릎 위에서 끌어안고 혀를 끌끌 차며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표정으로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되바라진 년.’ 왜? 내가 왜?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그저 의문들만 가득 품고 있을 때 버스 문이 열렸고 나는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바빴다.
버스에서 내려서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다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내 눈에서 뿜을 수 있는 최대한의 독기를 내뿜으며 고작 버스 뒤를 노려보던 그 날이 여전히 생생하다. 지금이라면 그 인간의 뺨이라도 한 대 치던가, 급소를 향해 니킥(Knee Kick·무릎 차기)이라도 날려보거나, 할 수 있는 세상 모든 욕을 걸쭉하게 해주기라도 해볼 텐데 그때는 어렸고 그런 뻔뻔스러움을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의 노하우를 축적해놓지 못했던 때였다.
‘엄마의 경험을 들려줄 필요가 있구나’
이틀 정도 후 학창 시절에 겪었던 이 일을 아들에게 말해봤다. 그때 아무 말도 못하고 그 몹쓸 놈과 버스의 방관자들을 그냥 보낸 것이 아직도 화가 난다고 했다. 아직 초딩 3학년인 녀석에게 그날의 심정은 섬세하게는 전달되지 못하고 ‘정말 기분 나빴지’의 수준으로 밖에 가닿지 않았지만. 그런데 며칠 전 엄마도 성추행의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던 모습은 벌써 사라졌다. 이틀 만에 잊어버리는 기억력이라니. 이제는 우리 엄마는 성추행 경험 많다고 자랑하고 다니려나.
아들은 이 날은 ‘괜찮냐’고 묻는 대신 “와, 우라노스의 낫으로 거시기를 잘라버려야 하는 사람이네. 아놔, 그런 변태를 봤나”라고 했다. 그러고는 이내 장난감 막대기를 들고 낫처럼 휘두르는 연습을 한다. 에구구야, 그럼 그렇지. 그런데 아들아, 우라노스가 아니고 가이아의 낫이란다. 그 낫으로 거세당한 신이 바로 우라노스고 말이다. 게다 고작 그딴 놈에게 가이아의 낫을 사용하긴 지나치게 고퀄 아니니?
나는 괜찮다. 그 놈이 내 가슴을 만져도 괜찮다는 게 아니고, 그 아줌마가 말도 안 되는 시선을 나에게 쏟아 부어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고, 다들 알고 있었으면서도 짐짓 모른 척 입 다물고 있던 버스안 사람들이 괜찮다는 게 아니다. 그런 모든 괜찮지 않은 행동, (침묵이라는)말, 시선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런 날씨를 사랑하며 즐길 줄 아는 내 정서를 버리지 않아서 괜찮다. 당신들은 결국 나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음을 알아냈기에 괜찮다.
물론 당시엔 자다가도 일어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고, 허공에 대고 그 녀석을 패는 상상을 하며 허우적대고, 아무런 대응도 못했던 스스로를 책망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나는 자존감을 잃지 않았다. 자존감을 잃어야 하는 게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이내 알아내서 괜찮다.
그런 괜찮지 않은 일들은 이후로도 숱하게 있었고, ‘일상’이 되었다. 내가 여성이라는 젠더를 행하고 있어서 그런 일들이 일상이 되는지, 그런 일상이 나를 여성이라는 옷을 입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상이 나의 삶 전체를 뒤덮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서 괜찮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우라노스 운운하면서 웃고 넘겨주는 사람이 있어서 괜찮다.
그날 문득 아들에게 이런 경험을 종종 이야기해줄 필요가 있겠구나 생각했다.
“네 딸이나 누이라고 생각해 봐”라는 말
▲ 여성의 성에 대한 억압과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비난은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다. © SlutWalk Toronto
사람들은 성범죄 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를 비난하면서 “네 딸이나 누이라고 생각해봐라” 하고 말한다. 물론 가해자의 파렴치함을 강조하려는 말들이다. 가해자를 질타하기 위해 이런 표현에 기대는 것은 손쉬운 방편이기는 하지만 늘 어떤 껄끄러움을 남긴다. 차라리 ‘사람에게는 그러는 거 아니다’가 옳은 말 아니겠나.
딸과 누이와 어미들의 삶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상상되는 것인가 싶다. 솔직히 그럴 때 등장하는 딸, 누이, 어미에게서는 구체적인 삶의 흔적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없다. 그저 손상당해서는 안 되는, 건들면 안 되는, 깨끗한, 온전한, 뭐 이런 형용사를 연상시킬 뿐이다.
그래서 이런 말들은 묘하게도 피해자에 대한 비난과도 공명할 수 있다. 즉, 이런 생각은 피해 여성이 성범죄를 ‘유발’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편견의 기저가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나의’ 딸, 누이, 어미와 같은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여성들은 대체로 ‘올바른’ 행실의 여성으로 상상된다. ‘내가 아는 한’ 그녀들은 성추행이나 성폭력의 피해를 입은 적이 없으니까. 손상당하지 않아서 딸, 누이, 어미인 것이다.
우리는 여성으로서 올바른 행실과 어긋나는 경험을 가진 여성을 딸, 누이, 어미의 범주에서 배제시키는 많은 사례들을 가지고 있다. 하물며 슬픈 사실은 딸과 누이, 어미에게 파렴치한 짓을 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성차별과 성폭력 피해자는 이미 딸이자 누이이자 어미였다. 딸이라 생각했으면 저질러지지 않았을 일이 아니라,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은 이미 누군가의 딸이고 누이고 어미였다. “네 딸이라면 그랬겠냐” 하고 손가락질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은 딸과 누이와 어미가 여성이라는 이름 아래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구체성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 아니었을까.
나는 편의점 앞에서 맥주를 마신다고 처음 보는 할아버지에게 길 한복판에서 훈계를 듣고, 이른 아침에 택시를 타려면 재수 없다며 승차 거부를 당하기도 하고, 예쁘장한 얼굴로 여자가 꼬박꼬박 말대꾸하면 안 된다면서 칭찬도 아닌 말로 침묵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만원 지하철에서 어떤 놈이 엉덩이를 움켜쥐고 도망가기도 했고, 친구들과 보도에 서 있다가 차에서 우리를 향해 ‘못생긴 년들은 나오지도 마!’라며 저들끼리 키득거리며 사라진 얼치기 같은 남성들도 만났다. 이런 일을 당할 때 나는 늘 딸이고, 누이였고, 어쩔 때는 엄마였다.
이런 행동들이 나쁜 행동이다, 라고 아들에게 알려주는 사례로서 이야기해줄 필요가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런 측면도 없진 않다. 여성들이 공적영역에서 겪는 다양한 성차별과 성추행에 대한 사례들을 세상은 생각보다 모른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이상이어야 할 것 같다.
나의 이런 경험을 말해준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엄마라는 이름으로만 기억되지 않겠다는, 오직 여성이라는 틀로만 읽히고 싶지 않아서다. 여하간 엄마와 아들도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야 하니까. 그렇게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만나야 ‘사람을 만나는 법’이라고 알려주고 싶어서다. 더군다나 우리가 지금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다른 젠더의 옷을 입고 있기에, 이와 유사한 관계의 사람을 만날 때 혹여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바라면서 말이다.
너에게는 엄마인 나는, 여성에게 할당된 숱한 괜찮지 않은 일들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그것들이 내 삶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살아왔고 그래서 괜찮다고 말이다. 여성이건 남성이건 젠더의 무게가 너를 다 옭아매지 않게 할 수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도 이런 경험은 공유되어야 하지 않을까. ▣ 김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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