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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 생식 교육과 ‘비공식적’ 포르노
<초딩아들, 영어보다 성교육> 7. 성교육은 섹스교육이 아니다
‘아들 키우는 엄마’가 쓰는 초등학생 성교육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필자 김서화 씨는 초딩아들의 정신세계와 생태를 관찰, 탐구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편집자 주]
‘성적 대화’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난감한 부모
자, 나도 초딩아들에게 성교육을 하기로 맘 먹었어! 여기까지도 천리길 만리길일 테지만, 마음먹었다고 쉬이 진도가 나가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계속 피하고만 싶고, 실제 회피할 수 있는 핑계거리는 화수분에서 재물 나오듯 쏟아질 테다.
성교육 관련 서적 중에 이런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한 제목이 있는데, 바로 <거침없는 아이, 난감한 어른>(한국성폭력상담소 기획, 김백애라, 정정희 지음)이다. 대다수의 부모들은 자녀와의 ‘성적 대화’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난감해한다.
“아우, 어떻게 해? 자기는 부끄럽지도 않아?” 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뭐가 무서워서, 난 아주 쉽게 하는데?” 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난감함을 숨기기 위해 과도한 비속어와 유익하지도 않은 장난으로 대화의 99%를 채우는 부류도 있다.
▲ 한국성폭력상담소 기획. 김백애라, 정정희 지음 <거침없는 아이, 난감한 어른>
이런 사태의 원인은 뭘까? 물론 수만 가지의 조건들이 얽히고설켜 있을 것이지만, 가장 영향을 줄 만한 것 중 단연 앞서는 한 가지가 있다. ‘성’을 섹스, 즉 오로지 성적 행위라고 극단적이고도 협소하게 상상하는 것 말이다. 성교육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섹스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이 둘은 결코 동음이의어가 될 수 없는데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사태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그 섹스마저도 오로지 생식 행위로만 한정한다는 데 있다.
나의 경우, 교육이라는 틀거리 안에서 처음 접한 ‘성’이란 <여성의 생식주기>라는 생물 수업의 한 단원이었다. 성교육 따위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성교육 시간이라고 해놓고, 중학교 가정 선생님이 속옷 검사를 해서 속바지를 안 입거나 끈메리야스를 입고 있으면 겨드랑이를 꼬집던 것 정도? 여하간 생물 수업 덕분에 FSH, LH, 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 이런 단어들로 여성인 나의 몸에 대해 아주 일부를 과학이라는 합리적 언어로 설명할 수도 있다는 걸 배우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 나에겐 이런 호르몬 이름들로 짐짓 대단한 척 포장된 임신, 출산에 대한 설명들은 시험 문제라는 것 외에는 대단한 관심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매달 반복되는 생리통의 원인과 이를 해결할 좀 더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에 백만 배는 더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직은 임신하지 않은 여자들(생리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非임신의 표시이므로)의 ‘부수적인’ 문제였으므로 교육에서는 간과되었다.
성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은 부박할 수밖에 없다. ‘성=섹스’라는 등식 같지도 않은 등식을 대입하는 것도 모자라, 그 놈의 섹스는 오로지 애를 만들 때 아니고는 인정도 하지 않는 전제들 속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성교육인 듯 성교육 아닌, 생물 수업 시간마다 아이들이 낄낄대던, 그래 봤자 별 것도 없었던 ‘생식 과정’에 대한 것들뿐이었다. 게다가 여성의 생식 과정만이 늘 더 중요했지.
세상에나. 애를 낳기 위한 섹스가 인생에 몇 번이나 될까? 그렇지 않은 섹스가 훨씬 더 많지 않나. 반대로 내가 하는 모든 섹스가 임신과 출산으로 이어진다면 이는 말도 안될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재앙이다.
그래서 그랬던가, 남자애들은 열심히 포르노를 찾아보며 자체적으로 커리큘럼을 만들어 돌리곤 했다. 일찍이 임신이라는 단어 앞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던 그들은 섹스가 생식만을 위해 존재해야 옳다는 사기꾼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나 보다. ‘공식적’으로 생식 교육이 있었다면, 포르노로 대표되는 ‘비공식적’ 교육이 마치 성교육의 한 쌍인 것 같았다.
‘성=성적 행위’라는 등식으로만 도배를 해놓은 극장에서 벌어지는 일인이역인 셈이다. 극장에 올려진 연극이 삶의 일부를 반영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삶 전체일 수 없다. 그나마 잘 짜여진 연극이라도 되어야 할 텐데 말이다.
부모의 당황한 기색을 눈치채는 아이들
성교육 해야지 하고 맘 먹으면 엄마들이 처음 한다는 말들 중 빠지지 않는 대사가 있다. “나 이제 기억도 안 나는데. 에스토르게론이었나? 아닌가? 프로… 프로 그거는 뭐였더라? 황체 그건 뭐였지?” 초등아들 성교육에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요.
버벅대며 고민하고 있으면 옆에서들 “아들은 이래서 아빠가 해야 해.” 한다. 그러다가도 다들 한숨 쉬며 “애 아빠가 뭐 아나. 포르노 밖에 모르지 뭐.”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깊게 고민해본 적도 흔치 않으니 빈곤한 상상력과 빈약한 정보, 갖가지 편견밖에 가진 게 없다.
성교육 한다면서 대뜸 생식을 주제로 한 생물학 이야기를 하자니 어렵다. 초등학생에게 어울리는 것 같지도 않아 생식 이야기를 제외하고 얘기를 해야지 하니, 이젠 머리 속이 포르노적 상황이다. 얼굴을 붉히며 난감해할 수밖에.
한때, 유행어가 부러우면 지는 거라지. 장담컨대 초딩아들 앞에서는 당황하는 순간 필패다. 그러므로 성에 대해 스스로 ‘난감’해하고 있다면 시작부터 지는 거다. 특히나 상대가 초딩아들이라면!
초딩과의 대화에서는 기 싸움이 중요하다.
아들이 2학년 때 수학 만화를 읽고 와서는 “엄마, 루트가 뭔지 모르지?”한다. “왜 몰라.” 이미 예전부터 수학포기자였던 어미지만 루트는 기억난다. 그러자 녀석이 “루트 4가 뭐야?” 확인하려 덤비지 않겠는가. “2잖아” 그 정도는 안다고.
근데 벌써 아들은 ‘대단한데’ 하는 눈빛을 쏘려고 한다. 자기는 어렵게 알아낸 고급정보거든. 그래서 치밀하게도 한번 더 확인을 한다. “엄마, 어떻게 알았어?” 이쯤 되면 나도 굳히기 들어가야지. 어떻게 알았는지는 됐고, 기습이 필요하다. “엄마는 코사인도 알아.”
다급해진 아들은 제 딴에 나랑 급을 맞추려고 한다. “아, 나 그거 들어봤는데. 00형이 말했는데, 아 뭐더라.” 들어보기는! 이때 쐐기를 박는다. “너 페르마의 정리는 뭔지 알아?” 사실 나도 알 리가 없다. “아, 엄마가 수학을 좀 하네?” 녀석이 마지막 자존심을 챙기려고는 했으나 완벽한 나의 승리. 이 정도 해야 이번 대화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고 그 다음의 대화를 위한 달란트가 된다.
실제 이틀 후에 “엄마, 조 알아? 조?” 의기양양해서는 “억 다음이 조야.” 하는 거다. 요녀석 수 단위를 어디서 주워들었군 싶어 한번 흔들어봤다. “너 그럼 조 다음 뭔지 알아?” 잠시 눈동자를 굴리더니 “백천조? 아니다 백억천조?” 웃고 싶었지만 꾹 참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가 아들 얼굴 가까이에서 조용히 빠르게 한마디만 해봤다.
“일십백천만,억조경해,불가사의,무량대수!” 아들도 딱 한마디만 하더라. “우와~엄마 수학천재구나.” 이것 막 틀린 건데, 아, 초딩이란.
자식에게 지식을 자랑하라는 게 아니다. 아이는 끊임없이 나도 엄마만큼 알아, 이걸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인정받을 때까지 말을 건다. 하지만 엄마 수준이 자기 수준만 못하다는 걸 알면 그 다음의 대화부터는 무지막지하리만큼 시시해한다. 그 기준은 객관적인데 있지 않다. 엄마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아이가 직감할 뿐이다.
아이보다 더 많이 알아야만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너보다야 자신 있지, 그러나 너무 겁주지는 않겠어, 그래서 정공법도 썼다, 기대했던 답변을 슬쩍 비껴가기도 했다, 쥐락펴락 좀 해줘야 다음에도 이야기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그런데 엄마가 대화가 시작되자마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긴장한 나머지 괜시리 정색하고 있다면?
성적인 주제에 있어 많은 부모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 초딩아들이 성기를 일컫는 단어만 말해도 반사적으로 정색하는 거다. 초딩은 새로운 단어이기만 하면 뭐가 되든 낄낄대며 물어와서는 자랑질을 한다. 덕분에 요새 자기 반 애들은 음경을 ‘거스’라고 한다거나, 3학년이 되면 영어를 배워서 음경을 ‘fire egg’라고 바꿔 부를 수도 있다는 둥 이런 시시껄렁한 소식까지도 들어야 하지만.
이처럼 고작해야 아는 체 좀 해보려던 초딩 앞에서 그 단어가 단지 ‘성적’이라는 이유로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하고 난감해 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애가 ‘엄마 조 다음 뭔지 모르지?’ 할 때 흔들리는 눈빛으로, 애써 난감한 낯색을 감추려 “너 어디서 그런 단어 들었어? 벌써부터 그런 걸 알려고 그러니? 몰라도 돼. 크면 다 알게 돼.” 이렇게 말한다면 아이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엄마, 조 다음 뭔지 모르는구나. 모르니까 저러는 거야. 에이, 엄마 맨날 수학 다 아는 척하더니. 다시는 안 물어봐.’ 엄마의 당혹한 모습과 우왕좌왕하는 기색을 눈치 못 챌 수가 없다.
성적 호기심과 성적 가해를 구분하길
정색하고 가르쳐야 애가 다른 데 가서 그런 단어 안 쓰고, 여자애들 안 놀린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치명적 실수는 아이의 성적 호기심과 성적 가해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거다. 아이가 성기에 대한 단어들을 듣고 와서 호기심에 엄마에게 ‘대화’를 하려고 물꼬를 트는 것인지, 그런 단어를 사용해서 누군가를 희롱하거나 괴롭히는 것인지 구분 좀 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유익하기보다 악랄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같은 학원 친구의 성기를 만지고 발로 차면서 비속어를 사용했다고 치자. 혹은 같은 반 여자아이에게 ‘화장실로 가서 성기를 보여 달라’고 했다 치자. 이럴 때 가해아이의 부모는 애들이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 거라고 변명한다.
반대로, 아이가 엄마에게 와서 ‘엄마 고추랑 아빠 고추랑 만나서 내가 생긴 거냐’며, 이런 질문을 하면 길길이 뛰면서 다른 데서는 그런 질문하면 절대 안 된다고 아이를 겁박한다. 호기심의 표현을 성희롱으로 받아들이고, 정작 성희롱은 그저 호기심이 가져온 실수 취급한다. 이런 잘못된 구분, 엇나간 대응들이 진짜 폭력이다.
이는 누가 봐도 부모가 성을 난감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벌어진다. 내 아이가 성적 가해를 했다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아서. 다른 가해도 아니고 ‘성적’ 가해라니. 그때 문득 ‘성은 섹스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어머나, 섹스? 포르노? 우리 애가? 말도 안돼! 했겠지.
다른 한편 아무렇지 않게 성에 관해 물어오는 아이 얼굴이 너무 태연해 말문이 막힌 것 아니겠나. 역시 그때 머리 속에서는 임신? 그럼 섹스를 말하라고? 민망하게, 어쩌지? 했을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 경우 다 섹스라는 성적 행위로만 치환시킬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성적 행위와는 사뭇 다르다. 하나는 타인에 대한 폭력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존재에 대한 질문이다. 이렇게 단어를 바꿔 놓고 보면 전혀 난감할 것도 당황할 것도 없이 그 다음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과감하게 초딩아들의 성교육은 ‘섹스나 성적 행위가 아닌 것’부터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내가 이토록 당혹스러워 아이와의 대화에서부터 전패를 기록할 것이라면 왜 돌아서 가려 하지 않는가. 성을 둘러싼 수많은 주제 중에서 성적 행위는 대략 5장, 6장쯤에 나와도 되지 않을까? 1장, 2장은 당장 초딩아들에게 중요하고도 꽤나 흥미를 끌만한 것으로 시작하면 어떨까.
애니메이션을 봐도 힘 센 악당과 정의로운 영웅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녀석에게, 막대기만 보면 칼 싸움부터 하는 녀석이 좋아할 만한 것으로. 이를테면 ‘권력과 힘’ 이런 것 말이다. ▣ 김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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