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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염소, 효리가 아프다
<이 언니의 귀촌> 충남 홍성에서 소소의 이야기(상)
생명이 반짝이는 만큼 죽음도 일상적인 농촌
효리가 아프다. 그래서 나도 아픈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다. 효리를 생각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무력감과 그나마도 정성껏 잘 돌보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에, 사실은 피하고 싶다. 나는 아픈 효리로 인해 정말로 마음이 아픈 건가. 아니면 무력한 나 때문에 마음이 아픈 건가. 정말로 마음이 아픈 건가. 아픈 척 하는 건가. 안 아픈 척 하는 건가.
▲ 효리는 농장에서 키우는 유산양(乳山羊, 젖염소)이다. © 소소
효리는 농장에서 키우는 유산양(乳山羊, 젖염소)이다. 진초록 풀밭에 매어놓으면 새하얀 털이 눈부시다. 사람이 지나가면 아는 척 해달라고 꼭 ‘매에-’ 하고 운다. 가까이 가면 뿔 없는 머리부터 쓰윽 들이민다. 예쁘다고 쓰다듬어주면 옷자락이나 머리카락을 물어뜯기 일쑤다. 해가 밝은 날엔 노란 눈에 까만 눈동자가 납작한 한 일자(一字)가 된다. 나는 녀석의 신비로운 푸른 눈도 기억한다.
효리가 아프다. 어느 날 갑자기 다리 하나를 뒤뚝뒤뚝 절길래 매놓은 줄에 걸려 염증이 생긴 줄 알았다. 하루 이틀 지나 증상이 더 심해져서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다. 요마비(腰痲痺)란다. 모기를 통해 감염되는 기생충으로 인해 허리 아랫부분 신경이 마비되는 병이다. 병원에서는 회복 가망이 없으니 살 빠지기 전에 잡으라고 했다. 농장 사람들도 효리가 일어나지 못하면 욕창도 생기고 배에 가스가 차면 점점 더 괴로워질 테니 지금 보내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럴 수 있다. 효리가 아프지 않을 때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효리를 잡아 먹자고도 했다. 누구에겐 옆집에서 키우는 닭이나 소와 다를 바 없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농촌에서 지내다보니 뭇 생명들이 가까이에서 반짝이는 만큼 죽음도 일상적으로 만난다. 계절이 바뀌면서 지는 한해살이 풀꽃들도 그러하고, 농사짓는 작물들도 거두기 전에 병이 들거나 한순간 손을 놓쳐 땡볕에 타 죽이는 일도 종종 있다. 작물을 먹는 달팽이나 애벌레는 일부러 잡아 죽이기도 한다.
재작년엔 농장에서 함께 닭을 키웠는데 고양이가 물어가고 들개가 침입해서 죽은 닭이 열 마리가 넘는다. 그러고 보면 복실이도 올해 목줄이 풀려 이장님댁 닭과 새끼고양이 두 마리를 물어 죽였다. 들짐승들은 논에 풀어놓은 어린 오리들을 야금야금 물어갔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로드킬 당한 동물들의 사체를 목격한다. 나도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새끼뱀을 밟고 지나갔다.
어느 댁 누가 돌아가셨단 이야기도 자주 듣는다. 장례식장에 갈 일도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먹는 모든 것이 사실은 살아있는 그 무엇이었다는 당연한 사실도, 농사지으며 새삼스레 되새기는 깨달음이다. 그러니 내가 죽으면 누가 나를 먹어도 괜찮겠다 싶다. 이왕이면 어린 나무를 키우는 거름이 되면 좋겠다. 그렇게 둘레의 죽음이 자연스러워졌다.
논둑을 지키는 할아버지는 무얼 보시는 걸까
하지만 죽음이 자연스럽다고 해서 살아있음이 가벼워지진 않는다.
그래서 나는 농사가 참 어렵다. 농사는 그 생명과 깊이 관계하는 일이다. 눈곱만한 씨앗을 심고, 흠뻑 물을 주고, 이삼 일 기다리다 보면 새싹이 빼꼼 고개를 디민다. 그 순간 그와 나의 세계가 시작된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은 많지 않다. 그저 때를 기다려 물을 주고, 터를 옮기고, 또 흙을 길러 먹이는 일이다. 다만 한 곳에서 꾸준히 정성스러워야 하는데 그게 정말 어렵다. 물론 마음을 다해도 너무 가물거나 병이 돌아서 어쩔 수 없을 때도 있지만, 대개는 한 번 더 들여다보고 한 발 더 빨리 움직이면 되는데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 농장에 나가는 아침마다, 집에 돌아오는 오후에도 논둑에 앉아계신 할아버지를 본다. © 소소
내게 농사일은 아직까지 재밌고 신기한 만큼이었다. 돌이켜보니 이 땅을, 이 작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책임져보겠단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곁에 있는 사람들 덕분에 어디 가서 농사짓는다고 우물쭈물 겨우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진짜 농부가 되려면 한참 멀었다.
농부가 된다는 건 어떤 걸까. 아니, 어쩌면 나는 농부가 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농장 가는 길, 매일같이 아침이나 늦은 오후에나 논둑을 지키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신다. 할아버지는 농장 하우스 건너편 뒷집에 혼자 사신다. 할아버지의 농사치는 그 논 한 배미가 전부다. 가끔 이장님 댁 일손을 돕기도 하고 면소재지에 마실 나가 앉아계시기도 하지만, 거의 매일같이 농장에 나가는 아침마다, 집에 돌아오는 오후에도 논둑에 앉아계신 할아버지를 본다.
모 내고 벼가 한참 자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한겨울 칼바람이 지나가자마자 2월 말, 3월 즈음부터 그렇게 계신다. 논에 물대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할아버지는 매일같이 논둑에 나와 한참을 앉아 계신다. 대체 무얼 보시는 걸까. 나는 사실 그 마음을 알게 될까봐 한편 두렵기도 하다.
엄청나게 마음 편하게, 배우는 존재로 살기
3년 전, 농촌에 내려와 살아 보겠다 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고, 지킬 것이 없어서였다.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이 되어 부모님이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연봉을 받아 효도하고 싶었던 마음은 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미 포기했다. 그 때는 내가 스스로 용기 내어 모두가 어쩔 수 없이 떠밀려 가는 길이 아닌 조금은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인정해야했다. 사실은 아등바등 애쓰며 남들처럼 열심히 살아낼 자신이 없었다.
대신 정성스러워야겠다고 매번 다짐하게 되는 관계들이 있었다. 좋은 사람들 곁에서 마음 쓰며 살다보면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관계들 안에서 자꾸 확인받고 싶은 존재가 어느새 무거워졌다. 좋은 관계만으로 충족되지 않는 삶의 조건들도 있었다. 전환이 필요했다. 때마침 만난 ‘건강한 삶과 관계’, ‘농(農)적 진로’ 따위의 말을 좇아 불쑥 이 곳에 왔다.
▲ ‘건강한 삶과 관계’, ‘농(農)적 진로’ 등의 말을 좇아 불쑥 이 곳에 왔다. © 소소
그 어느 때보다 존재는 가벼웠고 관계는 느슨했다. 이름 앞에 어떤 직함을 붙이지 않아도, 통장에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지 않아도, 누구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려고 마음 쓰지 않아도 하루하루가 꽉 찼다.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싶을 만큼 매일 아침 집을 나서는 길은 한가하고 아름다웠다.
주변의 도움으로 지낼 집을 구하고, 월세를 낼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받으며, 농사짓는 하루를 배웠다. 무엇을 이뤄야겠다는 목표가 없으니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지역에서 걸쳐지는 일들을 하나하나 받아 안으면서도 힘들지 않았다. 굳이 내 생각, 내 자리를 만들려고 하지 않아도, 무엇을 잘 해내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먼저 고민하고 애써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잘 따라가면 되었다. 그를 잘 믿고 배울 수 있음이 그 전에 경험했던 고마운 관계들의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이 시간들이 뱃속에 든든하게 차곡차곡 쌓이고 있음이 느껴졌다. 온전히 배우는 존재로 이곳에 있을 수 있었다.
나는 앞으로도 당분간 그렇게 지낼 것 같다. 대체 뭘 하고 사는지, 어떻게 벌어먹고 사는지 단순명료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객관적으로는 엄청나게 마음 편하게, 몸은 바쁘게 잘 살고 있다.
이쯤에서 고백해야 한다, 나는 두렵다
내가 만약 나의 구체적인 일상―아침에 일어나서 철마다 다른 새소리를 들으며 저수지 길을 돌아 논둑을 지키는 할아버지께 인사를 하고 농장에 도착하면, 효리와 복실이 밥을 챙기고 오전 내내 수다를 떨거나 공상에 잠겨 상추를 따고, 지역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엔 사람을 만나거나 수업을 듣고, 저녁엔 책상머리 일을 하거나 빈둥거리다 잠이 드는 하루, 그리고 그 하루와 일주일, 한 달과 일 년이 어떻게 가능한지―을 먼저 이야기했다면 앞에서 이야기한 농적인 삶, 새로운 삶의 양식, 자유로운 존재, 느슨한 관계, 든든한 협업, 지역의 기반, 비빌 언덕, 뿌리내림 등등 이런 말들을 잔뜩 늘어놓으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하게 될 것이 뻔하다. ‘자, 봐봐, 나는 이렇게 잘 살고 있어’ 하고 말이다.
▲ 아침에 농장에 도착하면 효리와 복실이 밥을 챙기며 나의 일상이 시작된다. © 소소
그러니 이쯤에서 고백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별 일 없이 잘 살고 있어서 창피해졌다. 효리가 아프기 때문이다. 마치 전에 쓰윽 밀어두고 모른 척했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만 같다. 이렇게 평온하고 풍성한 일상을 누리는 나는 사실 아픈 염소 한 마리에게 주는 마음 하나 어쩌지 못하고 자꾸만 도망치고 투정하고 싶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다른 사람에게 판단을 미루고만 싶다.
그리고 아프지만 이 비겁함을 한 겹 더 걷어보면 나는 사실 그만큼이었던 거다. 처음부터 그랬고 여전히 두렵다. 만약 엄마나 아빠, 가족이 아프면 어떻게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으면 어떻게 하나. 그 때도 도망가고 싶으면 어떻게 하지.
봄이 오기 전부터 논둑을 지키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기 두려운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나는 온전히 그 무엇을 농사지을 수 있을까? 그저 달뜬 호기심과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무심함으로는 넘을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는 걸까. 부모님을 부양하느라, 대출금을 갚느라 오랜 기간 마음 고생하면서 취업 준비를 하고, 가끔은 꾸역꾸역 하기 싫은 출근을 하지만 주변을 잘 돌보고 일상을 알뜰하게 꾸려가는 친구를 보면서 어느 순간, 진짜 농사는 네가 짓고 있구나 싶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온전히 농사지을 수 있을까? 여기에서 얼마나 머무를 수 있을까?
각자 역할을 다하고 있는 이 사람들 덕분에
그래서 지금 효리는 세 달 가까이 앉아만 있다. 이제 일어나 스스로 걸을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움직일 수 없으니 매일 먹을 풀을 주변에서 구해 가져다 줘야 한다. 한 자세로만 앉아있어서 체중이 닿는 부분에 욕창이 생겼다 나았다 한다. 일어나지 못해서 답답하고 아플 텐데 안타깝게도 효리의 고통을 알 길이 없다. 다행히 어마어마한 먹성은 그대로다. 잘 먹고 잘 싼다. 괴롭지 않은 건가? 녀석은 그냥 이대로 살면 되는 걸까.
▲ 안타깝게도 효리의 고통을 알 길이 없다. 녀석은 그냥 이대로 살면 되는 걸까. © 소소
나를 제외한 농장 사람들은 대부분 효리를 그냥 보내주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했지만, 결국 마음을 정하지도 못하고 농장을 자주 비우는 나를 대신해서 매일 효리가 먹을 풀들을 갖다 주고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위치와 자세를 바꿔주는 일을 다 하고 있다. 이장님과 사모님은 효리가 아직 앞발에 힘도 있고 먹성도 좋아서 일어날 지도 모르니 지켜보자고 하신다. 매일 아침마다 들여다보고 소 사료도 한 바가지씩 챙겨주신다.
또 다른 이웃은 효리에게 휠체어를 만들어 주자고 한다. 살아 있고, 살 수 있는 효리를 이대로 방치하거나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농장에서 할 수 없다면 마음 있는 사람들끼리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여기저기 알아보겠다고 한다. 아무도 어떻게 하는 편이 좋다거나 옳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각자가 할 수 있는 이야기와 역할들을 하며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효리를 어찌할 바 모르겠다. 다만 이렇게 어찌할 바 모르고 있는 나를 직면하고 있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여기에 있고, 효리도 지금,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건 모두 이 사람들 덕분이다. ▣ 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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