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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자에서 ‘지구의 마을사람’으로

<지구화 시대 ‘이주’의 감수성> 라오스 사람처럼 살기①



여행, 출장, 이주노동, 어학연수, 유학, 국제결혼, 이민 등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고 있으며, 국내에도 많은 이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일다>는 지구화 시대를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이주’의 감수성을 들어봅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한 해의 절반은 라오스에서, 절반은 한국에서

 

손가락을 꼽아 본다. 2007년부터니까 이제 곧 아홉 해가 된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해외봉사단원으로 라오스에 파견되어 꼬박 2년을 살고 나서부터, 올해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ECPI, Energy and Climate Policy Institute) 라오재생가능에너지지원센터 센터장으로 보통 한 해의 절반은 라오스에서 지내고 있는 지금까지의 시간이 말이다.


▲  2014년 라오스 싸이냐부리 지역 재생가능에너지 교육훈련 사업 중인 필자(왼쪽 여성)   © 이영란

 

“어머! 막무앙(망고)을 안쪽으로 깎네!”

 

2007년, 내가 한국해외봉사단원으로 라오스 싸이냐부리 읍내의 중학교에 파견된 지 두어 달 지났을 때였다. 이젠 자주 집으로 놀러와 라오스 음식도 해먹고 술도 함께 마시는 아짠(라오스 말로 교수라는 뜻. 교사, 선생님을 부를 때도 쓴다)들이 처음 내가 망고 껍질 깎는 모양을 보고서 놀라며 재미있다고 한 말이었다.

 

그때 나도, 아니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아짠들이 말한 그대로, 한국 사람들은 과일껍질을 몸 안쪽으로 깎고 라오스 사람들은 바깥쪽으로 깎는다는 차이, 그냥 또 하나의 재밌는 차이를 발견한 것 때문이 아니었다.

 

한국과 라오스의 차이

 

라오스의 평범한 시골마을인 싸이냐부리는 관광객은 고사하고 국제원조단체 활동가들도 잘 오지 않는 그런 동네였다. 그때 2년을 이곳에 눌러 살겠다고 온 한국해외봉사단원들은 그들의 눈엔 같은 동양인이라도 생긴 것부터 말하는 것, 집에 숟가락 몇 개까지 일거수일투족이 얘깃거리가 되는 무척이나 신기하고 재밌는 손님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들과 가까이 지내며 특히 집까지 놀러와 내밀한 사생활을 엿볼 수 있었던 아짠들은 동네의 이야기꾼으로서, 이야기의 원천인 우리들보다 더 다른 아짠들이나 학생들, 동네사람들에게 우리들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래서 더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인기 있는 이야기꾼 아짠들의 주요한 레퍼토리가 바로 한국과 라오스, 한국 사람들과 라오스 사람들의 차이였다.


▲ 싸이냐부리 지역의 거의 유일한 관광자원은 코끼리다. 

2011년 무렵 설립된 싸이냐부리 라오스 코끼리보호센터(ECC)에서 코끼리의 저녁 목욕. © 이영란

 

칠백만 명이 안 되는 인구임에도 연구자들에 따라 60여, 100여 소수민족들로 분류되는 라오스 내 민족 구성과 달리, 한국은 인구가 칠천만 명이 넘는 데도 단일민족(오해는 마시길. 순수 혈통임을 강조하기 위해 쓰는 민족주의 개념어가 아니라 현재 달리 구분해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없어서 사용하는 번역어일 뿐이다)이라는 것. 라오스는 언어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소수민족들이 별문제 없이 이웃으로 살아가는데 반해, 한국은 같은 말을 쓰는 같은 민족이면서도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있고 전쟁까지 벌였다는 것.

 

2007년 한국 공무원의 초봉이 라오스 공무원 초봉의 30배쯤 됐다는 것. 라오스의 쇠고기 값은 1kg에 3,4만낍(그때 환율로 환산하면 3,4천원)인데 한국은 100g에 1만원이 넘는다는 것. 한국의 그 수많은 대학의 등록금은 라오스 유일의 대학교 학비의 대략 100배가 된다는 것.

 

라오스는 두 시간의 점심시간을 포함해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가 업무 시간인데, 한국은 한 시간의 점심시간을 포함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라는 것, 게다가 한국의 직장인들은 거의 대부분 6시 넘어서까지 일한다는 것.

 

라오스 여자들은 보통 이르면 10대 후반, 늦어도 20십대 중반에 결혼하는데 한국 여자들은 일러야 20대 중반, 늦으면 30대 중반이 넘어도 결혼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 라오스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자기 땅에 자기 스스로 집을 짓고 사는데(시골 사람들은 심지어 논과 밭, 농장과 연못을 가지고 있고 산과 강을 공유재로 자유롭게 향유한다), 한국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 집을 짓지 않고(못하고) 사거나 빌려야 한다는 것 등등.

 

라오스 사람들과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정말 한국이라는 선진국, ‘잘사는 나라’에서 온 것이 맞는지, 여기 이 라오스 시골 사람들이 내가 도와야할 ‘못사는 나라’ 사람들이 맞는지 하는 의문이 드는 게 보통이었다.

 

한국 사람들과 라오스 사람들의 차이

 

▲ 라오스 사람들 중에서도 큰 감동과 공감, 도움을 준 분들은 나이 든 아짠들이다. 우리 학교 교감선생님과 그녀의 어머니.  ©이영란


그런데 이야기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거시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짠들은 그저 한국해외봉사단원들이 오기 전까지는 까올리(코리아)라고 하면 당연히 북한을 이르는 것으로 배우고 가르쳐온, 같은 사회주의 국가의 교사로서 남한과 북한이 실제 어떻게 다른지, 왜 다른지 궁금했던 거였다.

 

우리가 한국서 가져온 좋은 물건들을 보면서 얼마냐고 물었고, 이런 좋은 물건들을 살 수 있는 거면 어느 정도 월급을 받는 지 궁금했던 거였다. 나를 제외한 다른 단원들 모두 비혼이었으니 같은 선남선녀로서 나이가 궁금했던 거였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의 ‘가족을 이룸’(라오스에서 결혼의 의미)과 그 살아감에 관심이 많았던 거였다.

 

나는 라오스가 지금의 선진국들이 이룬 발전경로, 특히 한국의 발전경로를 답습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그 선진국에서 온 원조 공여자로서 우월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우리들의 자세를, 라오스와 한국을 평등한 개발원조의 파트너로 보아야 한다는 국제협력의 이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들을 종종 써먹었다.(지금도 그런다.)

 

그런데 정작 나 자신은 이런 결론으로 유도되고 마는, 매번 반복되는 뻔한 비교가 식상하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라오스로 파견되기 전 배웠던 해외봉사단원의 시각이 아니라 마칠 인류학자인 것처럼 라오스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곤 했다.

 

매일의 새벽 탁발은 물론, 주인집 둘째 아들이 반드시 불경을 암송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 라오스 달력엔 어김없이 라오스 음력뿐 아니라 불력도 함께 표기된다는 것, 절이 여전히 마을공동체의 큰 행사의 주요 공간이자 근대적 학교 기능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것 등을 관찰했다. 라오스에, 최소한 라오스의 지배적인 민족에게 불교가 얼마나 삶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알아갔다.

 

아열대기후 탓에 새벽과 저녁 무렵 활동하기가 가장 좋고, 한낮에는 꼭 그늘에서 쉬어야하는 생활 습관을 갖게 된 것도 피부로 배우고 또 몸으로 익히게 되었다. 역시 그 탓에 “씻었어요?”라는 말이 우리의 “밥 먹었어요?”와 같은 인사말이 된다는 것도, 점심 무렵 “같이 자요”라는 말이 “같이 쉬어요”라는 말과 같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추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고, 일 년 열두 달 자연 산물이 풍부하여 굶어죽을 염려도 없다. 게다가 친족들, 이웃들 사이 유대 관계가 깊어서 우리로 치면 거의 ‘확대가족’이나 마찬가지인 보살핌과 정서적 안정, 물질적 지지와 지원을 서로 나눈다. 이러한 문화는 관찰자들에게도 전염되어서, 라오스 사람들이 주는 이런 느낌이 한 번 라오스를 경험한 여행자들이라면 꼭 다시 라오스를 찾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되는 것 같다.

 

한국해외봉사단원, 관찰자, 이주여성

 

▲  영어 교사로, 한국해외봉사단의 라오스어 선생님이자 라오스 삶의 모습을 정성스레 가르쳐준 아짠 깰라컨   © 이영란


그런데 한편으로 이러한 라오스의 문화는 개인으로 타인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에 익숙해진 우리에겐 나태하고 의존적이고 그래서 무능력하게 보이게끔 작용하기도 하였다. 국제뉴스의 단골 소재인 민족 분쟁이나 종교 갈등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지만, 아짠들 사이에서 미묘하게 드러나는 소수민족 차별과 지역 차별, 인종 차별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한국해외봉사단원을 넘어서 보다 중립적이면서도 섬세하게 그들을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다른 존재였다. 그런데 그 ‘칼의 방향’ 때문에 나는 그냥 ‘이주여성’이 되었다.

 

그때 나는 나로 대표되는 한국인의 습관을 옹호해보려는 논리로, 칼의 방향이 내 쪽을 향해야 설사 잘못하더라도 내가 다치게 되니 남이 다치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고 말했다. 아짠들은 그러면 아예 사람이 없는 바깥쪽으로 향하게 하면 둘 다 문제없지 않겠냐며, 나의 궁한 논리를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렸다.

 

나는 내 논리가 부실한 것은 겸연쩍어하며 함께 웃었다. 그러나 실은 머릿속에 광속으로 지나가는 수많은 생각들에 당황했다. 그리고 일그러지는 내 표정을 감추기 위해 웃은 것이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 사회에 부쩍 늘기 시작한 결혼이주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들, 이주여성들이 남편의 가족을 포함해 한국 사회에서 부닥치게 되는 차별, 그 불화의 꼬투리들 중 하나로 거론되었던 것이 이 ‘칼의 방향’이었다.

 

이해는커녕 눈만으로도 잘 읽혀지지 않았던 이주여성에 대한 수십 건의 기사들, 성명서, 논문 등이 한꺼번에 내 몸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또 내 자신에게까지 기만적인 나의 숨은 우월감에 대한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이런 게 나였구나!


▲ 싸이냐부리 도(道) 에너지광산국이 설치한 '문제 있는' 태양광패널을 들여다보며, 어떻게 할 지 같이 고민하는 직업기술학교 전기과 학생과 교사, 교육청 직원 그리고 필자 (오른쪽)    ©이영란

 

그 후로 늘 한 발짝 떨어져서 사람 좋은 척 웃기만 하던 해외봉사단원은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도와야 하는’ 라오스 사람들에게 그냥 ‘이주여성’이기도 한 나라는 사람은 이해가 안 되는 건 물어보고, 틀리다고 생각하면 항의하고 싸우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많이 노력한 건, 여기 라오스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이들을 배우고 닮으려고 한 거다. 이 과정에는 싸움보단 감동이 더 많아 행복하다. 이 과정은 지금도 진행 중.  이영란(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라오재생가능에너지지원센터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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