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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몸’의 간격을 잇는 두 소년의 이야기

소설 <아리스토텔레스와 단테, 우주의 비밀을 발견하다>


십대 동성애자가 주인공인 성장소설이 나왔다. 제목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단테, 우주의 비밀을 발견하다>(돌베개)이고 저자는 벤하민 알리레 사엔스다. 벤하민 자신이 사제 서품 이후 환속해 쉰 네 살의 나이에 커밍아웃한 퀴어 당사자이자, 멕시코계 미국인들의 자긍심을 고양시키는 치카노 운동을 펼치며 문학을 교육하고 있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이 소설은 미국에서 큰 반향을 얻으며 유수의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 장기간 베스트셀러 목록에 등재되었다.


▶ 벤하민 알리레 사엔스의 장편소설 <아리스토텔레스와 단테, 우주의 비밀을 발견하다>(돌베개)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니 책을 퍽 잘 보이는 곳에 진열해 놓았다. 표지에는 사막에 주차된 빨간 트럭에 기대어 서로의 등을 감싸고 별을 바라보는 두 소년의 뒷모습이 있다. 두 개의 짧은 머리, 두 개의 평평한 어깨가 다정하다. 주말 떡볶이코트에 감싸여 서점에 놀러온 동성애자 소년소녀가 표지를 얼핏 보고선 눈치를 채고 콩닥거리는 설렘을 느끼며 집어 들게 되지 않을까, 처음엔 동반한 가족이나 친구의 눈치를 볼지언정 나중엔 용기를 내어 다시 찾아와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쩐지 그런 독자들의 존재를 상상하고 또 응원하게 되는 풍경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서른을 목전에 둔 나이. 이제는 사춘기, 중2병, 이어폰이 상징하는 십대 시절과 거리를 두고 차분히 추억할 수 있을 만큼은 자랐다고 저항하고픈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이 소설이 찾아왔다. 속절없이 휘말릴 밖에는 도리가 없다. 책장을 넘기는 감촉에 십대 때 도망치듯 숨어들었던 도서관의 공기, 햇빛과 먼지 냄새가 맡아지고 시내버스의 덜컹임이 느껴진다. 나와는 다른 자리에서 이 책을 펼쳤을 당신은 무엇에 휘말렸는지?

 

1987년 여름, 두 소년이 만나다

 

소설의 주인공인 열다섯살 소년 아리와 단테는 어둠과 빛, 침묵과 말이라는 두 세계에 각각 소속된 인물들이다. 굳이 나누자면 나는 아리 쪽에 가까운 사람이다. “말하지 않는 법, 내가 느끼는 온갖 감정을 내 속 깊숙한 곳에 묻어 두는 방법”을 태어날 때부터 습득하고 있는 사람. 반면 그런 자기 자신 자체를 감추는 방법까지는 모르는 대책 없는 사람 말이다.

 

단테는 그런 아리의 미숙한 혼란에 이끌려 다가갔고 선뜻 말을 걸었다. “고통이든 슬픔이든 죄책감이든 모두가 다 각자 자기 혼자만의 우주에 파묻혀 있다고. 모두가 다 외따로 살아가는 알 수 없는 존재라고. 이 그림을 보면 네가 생각나. 가슴도 아프고.”

 

단테는 여자 얘기나 하면서 시시덕거리는 안전요원들에게 수영을 좀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느니 혼자서 물에 둥둥 떠 있기를 선택하는, 참으로 요령 없는 아리에게 수영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하기를 가르쳤다. 아리 곁을 맴돌면서 아리가 스스로와 세계를 인식할 계기를 던져주었다. 그렇게 둘은 친구가 되었다.

 

단테는 텍사스 앨패소 거리의 멕시코계 미국인 남자애들이 쏜 비비탄에 맞아 죽은 새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그런 모질지 못한, 밝고 순수한 아이다. 일상적인 거리 풍경과는 이질적인 단테의 눈물을 본 아리는 그 새의 존재를 발견하고, 단테가 대체 왜 새를 이렇게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이 새는 왜 존재하는지, 그 원인과 의미를 궁금해 한다.

 

이렇게 한 소년의 눈물이 다른 한 소년으로 하여금 한 마리 새의 죽음을 하나의 비밀로 변화시키는 마법이 일어난다. 새, 날개를 가진 것, 하늘에 관해 가르쳐주는 것에 대한 최초의 관심으로 소년들은 스스로의 생을 연구로, 철학으로 변성시키는 “여름의 다른 규칙들”에 입문한다. 그리고 비본질적인 규칙들로부터 자유로워지려한다.

 

그리하여 아리는 교통사고로 인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걔가 들고 있던 새는 어떻게 됐어요?”라는 얼빠진 질문을 하면서, 내 인생에 뛰어든 그 아이가 들고 있던 구체적인 새를 염려하기 시작한다. 가족의 금기를 깨뜨리면서 형의 비밀을 탐구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억압된 말과 감정들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이 입문 과정은 단테에게서 거울상처럼 뒤집어진 형태로 진행된다. 단테는 비오는 찻길 한복판에서 날개가 부러진 새를 구하려던 자신의 행위가 아리를 죽게 만들 뻔했다는 외상을 입고, 앞으론 멍청한 새 따위에게 신경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아리를 만난 앨패소를 떠나 이사 간 시카고에서 단테는 새보다는 키스, 약물, 수음과 같은 보다 인간적인 것들을 실험하는데 몰두하면서 그 경과를 아리에게 보내는 손편지들 속에 기록한다.

 

“엄마 아빠한테 실망을 안겨 줄 생각을 하면 끔찍해, 아리. 너도 실망할 거라는 거 알아… 사람들한테 거짓말하기는 싫어, 아리. 부모님한테 거짓말하는 건 더더욱 싫고… 그건 싫어. 구차하게 애걸하고 싶지는 않아.”

 

1987년의 여름에 일어난 사고로 맺어진 두 소년은 다시 돌아온 이듬해 여름 재회한다. 비는 두 여름의 시간적 간격을 건너오는 매개체다. 비가 내릴 때, 소년들은 둘을 연결하고 있는 불가해한 사고를 기억하는 의식처럼, 아리의 1957년형 빨간색 셰비 트럭을 타고 사막에 나가 맨몸으로 빗속을 뛰어다닌다. 엄마들에게 통보한 소년들의 알리바이는 별을 관찰한다는 것이지만, 이들이 실제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서로의 몸이다. 그리고 별과 몸, 양자 사이의 간격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이야말로 우주의 비밀이므로, 이 소년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말하고 싶었다. 단테가 내 삶을 바꾸어 놓았다고, 내가 예전과 똑같이 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어찌 보면 단테가 내 목숨을 구해준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닌 것 같다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을 털어놓을 마음이 들게 해 준 첫 번째 사람이 단테였다고.”


▶ 벤하민 알리레 사엔스의 장편소설 <아리스토텔레스와 단테, 우주의 비밀을 발견하다>(돌베개) 

 

두 소년을 사랑하는 가족들

 

소설의 배경은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도시 앨패소다.

 

소설 초반 아리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형, 아빠, 단테와 자신이 마주보고 서 있는 꿈을 꾼다. 한 사람은 미국령 앨패소에, 한 사람은 멕시코령 후아레스에 있다. 아리는 영어로 한번 에스파냐어로 한번 세 사람에게 말을 걸었지만 서로가 말을 알아듣게 하는데도, 서로가 만나게 하는데도 실패한다. 소설의 종반 아리는 다시 꿈을 꾸는데, 자신의 집 뒤뜰에 형과 아빠, 엄마, 단테가 모여 있다.

 

꿈은 아리의 회복을 보여준다. 아리는 단테와의 관계로부터 침묵과 금기를 깨고 자신의 가족사를 이해하고 싶은 욕망을 깨달았고, 이를 가족 구성원들에게 표현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아리가 독감으로부터, 골절로부터, 우울과 분노로부터 회복될 수 있었던 건 가족의 윗세대가 기꺼이 자신들의 비밀과 상처를 개방하면서 아리를 향한 신뢰와 애정을 전달하고 그를 가족의 일원으로 맞이했기 때문이다.

 

아리는 자신의 형이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갔다는 사실을, 이 때문에 엄마가 신경쇠약을 겪었음을, 아버지가 베트남 전쟁에서의 외상 후유증으로 악몽에 시달려 왔음을, 자신을 예뻐했던 이모가 오랜 세월 동성 파트너와 동거했던 레즈비언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자기 기억의 빈 구멍을 메울 수 있었고 자아의 시간성을 회복하면서 아리는 자연스럽게 좋아진다. 아리의 알고 싶어 하는 마음에 ‘너 또한 알 권리가 있다’는 정당한 승인이 주어졌을 때, 가족공동체는 아리의 지지기반이 된다. 그 사랑과 앎의 과정 속에서 아리는 단테와의 사랑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단단해진다.

 

두 소년의 사랑은 소설의 진행 내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망설이다 삼키는 의미심장한 말들, 혼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외롭고 서로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느낌, 보고 싶음, 질투 등으로 줄곧 새어나온다. 그러나 이 몸짓들이 비로소 사랑으로 해석되기까지는 상호간의 돌봄 노동이 각자의 역량과 가족공동체의 역량을 키워내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만큼 단테와 아리의 사랑을 목격한 두 가족들은 정직하게 조력한다.

 

이들은 운이 좋고, 누구나 부러워할 것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우리가 기대하고 재현하고 싶어 하는 이상적인 환경 속에 있다. 가출하여 약물중독에 시달리고 자해나 자살 기도를 했거나 폭력에 노출된 아이에게 되돌려주고 싶어 하는, 그 아이에게 결핍되었음을 안타깝게 여기게 되는 그런 환경 속에.

 

발달단계를 일러주거나 상담 치료를 권유하는 보호자일 뿐만 아니라 나와는 다른 나이와 경험을 가진, 안정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는 사람들의 존재. 아이에게서 죄나 위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넌 혼자가 아니야, 너를 사랑해, 너는 아름다워”라는 사랑의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의 존재.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구조되지 못하고 익사한 아이들의 그림자 속에서 이 소설을 읽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랑했던, 우리를 사랑한 인물들

 

나는 십대 시절 퀴어(queer, 성소수자)인 주인공이 나오는 단 한편의 공식적인 서사도 경험하지 못했다. 우리를 정상적 이성애 로맨스, 이성애자 성장소설을 보면서도 훌륭한 상상력과 감정이입 능력으로 정체성과 자아상을 구축해온, 지지적인 가족 기반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자기를 스스로 양육해온 생존자들이라고 하자. 이제 우리들이 아리와 단테를, 캐롤과 테레즈(토드 헤인즈 감독의 레즈비언 영화 <캐롤>이 현재 극장 상영 중이다)를 알게 될 것이고, 이 이름들을 기억할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좋다.

 

우리들이 아름답고 지적이며 시적인 퀴어 인물들과 관계들을 롤모델이자 친구로 갖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주인공의 친구이거나 가족이거나 서사의 변두리에 잠깐 출연하는 엑스트라가 아니라 주인공 그 자체로, 서사의 중심으로 빛나고 있으며 정당한 권리와 행복을 누리고 있는 인물들을 말이다. 이러한 시점의 차이, 여기서 발생하는 서사의 모든 디테일들의 차이는 ‘정상적 이성애’에 포섭되거나 전유되지 못하도록 적극 방어해야 할 퀴어 고유의 문화다.

 

공식적으로는 ‘생식하지 않는다’고 간주되고 그래서 비난받는 이 혈통, 이 종이 어떻게 지속되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알아봐지는지 자세하게는 모른다. 산 자와 죽은 자들, 실제와 가상의 인물들이 뒤섞여 있는 이 커뮤니티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매혹되고, 언어를 전수하면서, 퀴어 공동체라는 역사의 일부가 되는 건지, 그 신비를 다는 알지 못한다. 이것은 혈연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는 문학, 예술, 종교, 정치적인 것에 가까운 계통발달일 것이라 추측한다.

 

“어쩌면 키스는 인간의 조건에 속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는 인간이 아닌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는 자연법칙이 적용되는 만물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지 몰랐다.” 스스로를 죄나 위반, 열등함과 같은 부정을 넘어 더 큰 긍정으로 정체화하는 새로운 퀴어들의 탄생을 기원하고, 이들이 우주의 비밀을 새롭게 탐구할 때 우리에게 알려질 것들을 기다린다.

 

이 책은 우리가 사랑했던, 우리를 사랑한 인물들을 연상시킬 것이다. 우리의 꿈과 기억에 유령처럼 등장하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부정당하고 금지당한 것들을 떠오르게 할 것이다. 나의 반복되는 꿈 중의 하나는 어머니가 나의 사적인 공간, 방이나 집의 문을 두드리거나 강제로 문을 따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가 나의 동성애라는 비밀을 알게 되고, 그것을 추궁하는 꿈이다. 나는 내가 끈질기게 나의 일상을 회복하고 이 꿈과 테마가 그 힘을 상실하면서 다른 형태의 꿈으로 전환되기를 바란다. 이 책을 같이 읽고 나눌 많은 사람들에게 또한 그러했으면 좋겠다. ▣별.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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