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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비혼모의 ‘공부’할 권리를 위해
서울 정릉의 ‘자오나 학교’를 찾다
“공부하다 보면 안 풀리고 그래서 화가 나서 방에 딱 들어가면, 애기가 팔 벌리고 ‘엄마!’하고 뛰어와요. 그러면 너무 행복해요.”
비혼모(非婚母)인 수진씨(21세, 가명)는 중학교 때 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나왔다. 청소년 쉼터에서 살다가 17살에 독립해 남자친구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임신했다는 사실을 안 후, 두 사람은 애를 낳기로 같이 결정했지만, 아이 아빠는 돈을 벌거나 아이 양육을 함께 책임지겠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혼자 애를 낳아 키우기로 결심한 수진씨는 아이를 데리고 이곳에 들어왔다. 여기에 와서 전산회계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를 하고 됐고, 청소년지도사가 되겠다는 꿈도 갖게 됐다. 또래 친구들과 요리 수업이나 사진 수업도 듣는다. 학교를 그만두고 가출한 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공부를 이곳에서 하고 있다. 수진씨가 공부하는 동안 아기는 아기돌보미 자원봉사자들이 돌봐 준다.
▶ 서울 정릉에 위치한 자오나 학교의 수업 시간.
이곳은 바로 서울 정릉의 ‘자오나 학교’다. 자오나 학교는 천주교 ‘원죄없으신 마리아 교육선교 수녀회’가 2014년에 설립한, 학교 밖 청소녀들을 위한 대안학교다. ‘학교’이긴 하지만 기숙사가 함께 있어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수진씨 같은 10대~20대 초반의 양육 비혼모들이 또래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며 아이도 기르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학교 밖 십대여성들에게 ‘나무’가 되어주자
자오나 학교의 이름은 ‘자캐오가 오른 나무’(자캐오는 성서에 등장하는 돈 많은 세관장으로, 사람들의 멸시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키가 작은 자캐오는 군중 속에 가린 예수의 얼굴을 보고 싶어 나무에 올라갔다. 예수는 그런 자캐오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의 집에 머물렀다)의 준말이다. 교장 강명옥 수녀는 학교 이름을 지은 날을 이렇게 회상한다.
“플립(Flipped, 2010)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주인공 소녀가 나무에 올라가서 그동안 부분적으로만 보던 세상을 전체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장면이 인상 깊었어요. 마침 그 날 저녁의 복음이 자캐오였지요. 보잘 것 없는 자캐오가 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세상에 눈 떴듯이, 우리도 학교 밖 청소녀들에게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나무가 되어 주자고 생각했어요.”
‘원죄없으신 마리아 교육선교 수녀회’는 120년 전 스페인에서 까르멘 살례스(1848~1911) 성녀에 의해 설립됐다. “사회가 교육으로부터 소외된 여성들에게 다른 기회를 주었다면?”이라는 물음으로 시작된 창립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에서도 30년 전부터 유치원, 어린이집, 지역아동센터 등을 설립해 교육에 힘써왔다.
2012년, 수녀회 창립자인 까르멘 살례스 수녀가 성인이 된 그 해 한국의 수녀들은 질문을 품었다. “만약 그 분이 한국에 계시다면 누굴 제일 교육하고 싶어 하셨을까?” 답은 ‘빈곤, 폭력의 악순환에 걸려들기 쉬운 탈학교/탈가정 청소녀들, 그리고 학령기에 놓여있지만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이유로 학습권을 박탈당한 청소녀 비혼모들’이었다.
그렇게 수녀원 3층에 개교한 자오나 학교에는 현재 두 명의 양육 비혼모와, 다섯 명의 학교 밖 청소녀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학교는 중등 2년 고등 2년 과정으로 운영되며, 1년은 4학기로 구성된다.
▶ 자오나 학교 강명옥 교장(좌)과 김정수 교감(우). ⓒ 일다
청소년 비혼모의 학습권 박탈하는 사회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낸 <학생 미혼모 학습권 보장 방안>(정해숙, 최윤정, 최자은. 2014)에 따르면, 우리나라 십대 출산 건수는 공식적으로 연간 약 3천 건 정도로 추산된다. 하지만 십대의 임신은 ‘청소년답지 못한 행동’, 일탈 행위로 여겨져 학교에서 징계를 받아 전학이나 자퇴를 강요당하거나 스스로 학업을 포기해 왔다.
2009년 국가인권위원회는 학교의 이러한 행태가 ‘차별 행위’라고 결정하고, 비혼모의 학습권을 보장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교육부와 시도 교육청은 재학 중 학생이 임신할 경우 징계하는 학교생활규정을 개정하고, ‘미혼모 위탁형 대안교육기관’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미혼모 위탁형 대안교육기관’은 학교에 다니고 있던 청소년이 임신한 경우에만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청소년 비혼모들의 학업 중단 시기는 주로 임신 이전이 많다. 이미 탈가정/탈학교를 한 상태에서 임신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학생 미혼모 학습권 보장 방안> 연구는 ‘청소년 특화 미혼모자시설 확보’를 제안하고 있다. 현재 미혼모자 시설의 경우 청소년이나 성인 구분 없이 운영되고 있다. 청소년 비혼모들의 경우엔 성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공부를 하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미혼모자 시설에서 검정고시를 따고 직업 훈련을 받을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빨리 자립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 목표다. 자격증을 따면 그 일밖에 못하게 돼 이후에 직업을 바꾸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한번 놓친 ‘배움’의 시기는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기초 학습부터 엄마 되기 훈련까지
이러한 현실에서 자오나 학교는 청소년 비혼모에게 자립을 강요하거나 독촉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을 해야 하는 시기에는 충분히 배우며 자신의 미래와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게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 자오나 학교에서 학생들은 기초 학습부터 다양한 활동과 진로 수업, 그리고 양육법도 배운다.
국어, 영어, 수학 등의 기초 학습은 거의 일대일 수업으로 이뤄진다. 학생 별로 실력 편차가 크기 때문이다. 일대일로 하다 보니 수업에서 자연스럽게 상담도 같이 이루어진다. 요리, 사진 같은 활동 수업이나 진로 수업도 진행된다.
청소년 비혼모들은 기초 학습이나 진로 수업 말고도 ‘엄마’가 되기 위한 체계적인 훈련을 받는다. 사회복지사가 기숙사에 상주하면서 아이와 어떻게 애착관계를 형성하는지, 아이의 성장 주기별로 무엇이 필요한지, 이유식은 어떻게 먹이고 어떻게 놀아줘야 하는지 교육한다.
“이곳에 들어오는 청소녀들 대부분이 제대로 된 양육을 경험해 보지 못하고 자랐어요. 자신도 성장이 안 된 상태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거죠. 그래서 저희는 체계적인 양육자 훈련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요.”(김정수 교감)
천천히 ‘삶의 리듬을 찾아가는 과정’을 함께해
자오나 학교에서 아기엄마인 청소녀들과 그렇지 않은 청소녀들이 서로 잘 어울려 지내는지, 그 사이의 역동이 궁금했다. 물어보니 엄마 아닌 청소녀들도 아기를 무척 좋아하고 아기엄마들이 바쁠 땐 대신 아기를 봐주기도 한단다.
“이모들(엄마가 아닌 청소녀들)이 애를 더 잘 봐요.(웃음) 아기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저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요. 자신들은 어렸을 때 제대로 돌봄 받지 못했지만 이 아이는 잘 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나 봐요. 아기가 내적 치유에 도움을 주는 셈이죠.”(강명옥 교장)
강명옥 교장은 가난과 가정폭력으로 힘들었던 집에서 나와 오랜 노숙 생활에 익숙해진 청소녀들이 이곳에 오면 ‘삶의 리듬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전한다. 규칙적으로 먹고 씻고 생활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과정은 지난한 설득과 소통의 과정이기도 하다. “약속을 왜 지켜야 돼요?” “꿈같은 거 없어요”, “할 얘기 없어요”라고 말하던 청소녀들. 거리에서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이 지상 과제였던 청소녀들. 다른 쉼터에서 입소와 퇴소를 반복하고 그래서 “안해 본 프로그램이 없는” 청소녀들이 이곳에 와서 안정감을 느끼며 자신의 일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청소년이 아기를 낳았다고 죄인 취급을 당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본 적이 없기에, 이들이 조금씩 성장해서 “저 OO하고 싶어요”, “이런 거 해보는 거 어때요?”라고 말할 때, 교사들은 보람과 고마움을 느낀다.
졸업 후에도 ‘탄탄한 자립’ 지원할 시스템 갖춰갈 것
학교 안에서 일상을 회복하고 힘을 길러도, 자립해서 사회에 나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가족’이라는 자원이 없는 비혼모나 탈가정 청소년들이 자립해서 살아가기에는 사회의 장벽이 너무 높고 많다. 그래서 자오나 학교를 졸업하는 청소녀들이 좀 더 탄탄한 자립 기반을 갖출 수 있도록 시스템을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다. 작년부터 시작된 아산나눔재단의 지원 덕분이다.
▶ 자오나 학교 학생들이 만든 물건들. 앞으로 온오프라인 매장을 열 계획이다.
그 중 하나가 학생들이 만든 물건을 팔 수 있는 온라인, 오프라인 매장을 여는 것이다. 매장을 오픈하면 학생들이 만든 수세미나 향초를 팔 거라고 한다. 메이크업아티스트 자격증을 딴 청소녀는 쇼핑몰 모델의 메이크업을, 전산회계 자격증을 딴 청소녀는 이곳의 회계를 맡는 식으로 배움과 직업을 연결할 셈이다.
탄탄한 자립을 위해 추진 중인 다른 하나는 학교 인근에 공동주택을 마련하는 것이다. 졸업생들이 공동주택에서 함께 생활하면 월세를 아끼면 돈도 좀 더 모을 수 있고, 힘들 땐 자오나 학교에 찾아와 교사들과 얘기도 나눌 수 있을 게다.
‘졸업과 동시에 무조건 자립’이라는 등식에 의해 등 떠밀려 세상 속에 내던져지지 않도록, 강명옥 교장은 “졸업생들에게 든든한 나무가 되어주고 싶다”고 말한다.
“힘이 생겼어요, 조금씩 제가 변해가는 게 보여요”
자오나 학교는 미등록 비인가 대안학교다. 운동장과 3개 학년, 한 학년에 기본 한 학급으로 최소 60명의 학생이 있어야 하는 현행 학교 기준에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규모로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고자 하는 걸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청소녀와 비혼모가 함께 있기 때문에 청소년 시설이나 미혼모자 시설로 인가를 받을 수도 없다. 그래서 자오나 학교는 전적으로 후원자들의 후원을 통해 운영되고 있다.
자오나 학교를 다니면서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비혼모 수진씨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아기 데리고 밖에 나가서 눈치를 되게 많이 봤어요. 애 안고 있다고 자리를 양보해줘도 앉지를 못했어요. ‘어린 애가 애를 낳았네’, ‘혼자 다니는 거 보니까 애 아빠가 없구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요. 계속 눈치보고 긴장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힘이 많이 생겼어요. 자리 양보해 주시면 아기한테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고맙다고 인사해야지’라고 말해요. 조금씩 제가 변해가는 게 보여요.”
아이 때문에 포기해야 할 부분이 많은 건 여전히 힘들고 ‘애 데리고 여기서 나가서 어떻게 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애가 있어서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되기도 한단다. 수진씨에겐 애를 낳아 키우기로 한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자오나 학교에서 수진씨와 아이에게 준 전폭적인 지지 덕분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하지 못하고 있는 일을 소명으로 삼아 뚝심 있게 나아가는 자오나 학교. 자오나 학교와 학생들의 미래를 응원한다. ▣ 나랑 기자.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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