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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너리 건물이라는 그 공간
<여라의 와이너리 시즌2> 어느 와이너리에 들어갈까
와인을 좋아하게 된 것은 내가 와인 생산 지역 근처에서 오래 산 것도 계기였지만, 무엇보다 들로 산으로 다니기 좋아하는 이유가 크다. 도시 밖으로 나가 길 따라 다니다 보면 포도밭이 널려있고, 도시에서 소풍 나온 여행자에게 캘리포니아의 넉넉한 시골인심으로 와이너리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지금은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적어서, 길을 떠나기 전에 와인 지역을 정하고 방문할 와이너리 리스트를 미리 뽑아놓고 거의 대부분 예약을 한다. 그래서 변수가 별로 없고, 기대했던 것보다 좋은 와인을 만나면 더 재미있고, 와인 맛이나 서비스가 기대치에 모자라면 실망한다. 와인관광이 산업으로 자리 잡기 전엔 길 가다 불쑥 와이너리에 들어가는 뜻밖의 만남이 많았다. 지금도 외진 곳이거나 비수기엔 그런 재미를 가끔 쏠쏠하게 경험할 수 있다. 나파, 소노마처럼 대명사격 와인 지역이라도 말이다.
▶ 와인관광 산업의 발달에 따라, 와이너리 건물도 기능뿐 아니라 작품으로 이해하고 지어진 곳들이 생겨났다. ⓒ여라
공간, 프로그램 별로 다르게 기억되는 와이너리
번듯한 건물에 크고 유명짜한 와이너리들은 손님 맞을 준비를 잔뜩 하고 있어서 대개 예약할 필요가 없다. 때로 좀 오래 기다려야 하는 일이 생기긴 한다. 또, 예약으로만 방문객을 받는 와이너리도 많다. 테이스팅비도 천차만별이다.
길가 자그마한 건물에 차고 문이 열려 있고 “오늘 시음 가능함”이라는 조그마한 팻말이 세워져있기도 하고, 포도밭 말고는 주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길 입구에 그런 팻말 하나 매달아놓은 데도 있다. 이런 곳은 대개 와인 한 병 사면 테이스팅비는 따로 받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노하우가 생기고, 감이 오기도 하고, 나의 취향도 빚어져 점점 모양이 난다. 어느 와이너리에 들어갈까 하는 나의 기준은 주로 와이너리가 앉아있는 자연지형이나 건물이 주는 느낌이 정한다. 길 가다 방문할 때에도 그렇고, 인터넷이나 책에서 와이너리 설명이나 사진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그 지역에 주목해야 할 와이너리라고 하여 찾아갔더니 테이스팅 센터를 새로 지었다며 페인트와 온갖 마감재 냄새가 채 빠지지도 않은 건물로 안내를 했다. 새집증후군이 당장 안겨줄 것 같은 냄새들이 부어주는 와인 향과 뒤섞여 테이스팅도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서둘러 나왔다. 그 뒤로는 새 건물은 아무리 매력 있게 보여도 꺼리게 되었다.
본디 와이너리 건물은 주변 포도밭에서 포도를 걷어 들여와 와인을 만들고 숙성, 저장하는 공정에 필요한 시설이 있는 곳이다. 와인이 포도로부터 태어나 병에 담기기까지 자라나는 집이다. 거기에 방문객을 위한 응접실, 시음을 위한 공간, 구매할 수 있는 와인과 함께 이야기가 있는 전시 공간, 와인과 같이 먹을거리나 기념품을 파는 공간이 더해진다.
와인의 집을 공정 따라 구석구석 구경시켜주는 와이너리도 있고, 그러면서 동굴 깊숙이 데려가기도 하고, 가보로 전해지는 소장품이나 취미로 모아놓은 그림을 보여주기도 하고, 숙성중인 와인을 맛보게 해주는 곳도 있고, 포도밭에서 포도 공부를 시켜주거나 자연경관과 기후의 연관 관계를 설명해주고, 어떤 곳은 마당에서 노닥거리며 마냥 놀 수 있게도 해준다. 다양한 공간 따라 프로그램 따라 와이너리가 각기 다르게 기억된다.
옛것과 내일이 함께 하는 현재의 공간
2010년 말에서 이듬해 봄까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은 와인 특별기획전시를 열었다. 와인이 어떻게 현대화되었나(How Wine Became Modern)를 주제로 그 계기와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테루아, 와인 라벨, 와인 잔 등 일곱 분야 중 하나가 ‘건축과 관광’이다.
특히 캘리포니아 와인에게는 1976년 ‘파리의 심판’이, 스페인에선 1975년 프랑코 독재 정권이 무너지며 와인 산업이 재부흥기를 맞게 되는 등 현대 세계 와인사에 커다란 지점을 연거푸 지나면서 와인은 관광산업의 한 줄기로 자리 잡게 되었다. 와이너리라는 건물도 단순한 기능보다는 작품으로 이해하고 지어진 곳들이 줄줄이 생겨났다.
▶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었던, 스페인 리오하 와이너리 건물 사진 중에서. 자하 하디드의 건축.
얼마 전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갑작스런 죽음이 알려졌다.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건축가. 야구 구경 다니던 동대문운동장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들어선 우주선 같은 건물은 내게 30년 이상 지녔던 공간 이미지에 시각적 단절과 충격을 던졌다. 그래서 그 건물에 대해서도, 하디드에 대해서도, 근사하다는 생각보다는 미움 섞인 아쉬움이 쉬이 지워지질 않는다.
사실 남자들이 득시글한 건축계에서 자기 이름을 날리기까지는 쉽지 않았을 터이다. 그렇다고 하디드를 여성건축가라 부르는 것은 차별이 될 거라고 믿어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다. 여류시인, 여류화가, 여의사, 여자변호사, 여배우, 여가수, 여선생, 여성국회의원… 다 구태의연하고 쓸데없는 표현이다. 잠깐이라도 생각해보면 여성이라고 구별해야 할 이유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솔직히 이런저런 서류에 왜 성별을 밝혀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건축가 하디드가 스페인 리오하 와인 지역의 중심도시인 아로(Haro)에 있는 ‘비냐 톤도니아’의 방문객 공간을 디자인했다. 오래된 와이너리에 하디드의 미래 감각이 더해져 옛것과 내일이 함께 하는 현재가 되었다. 그의 부고를 듣고 문득, 리오하에서 보고 느낀 와이너리 건물들이 떠올라 스페인에 금방이라도 다시 가고 싶어졌다. ▣ 여라/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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