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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젊은 예술인들 ‘사건’을 일으키다
<아맙이 만난 베트남 사회적기업> 제로스테이션
공정여행과 공정무역을 통해 한국과 베트남을 잇는 사회적 기업 ‘아맙’(A-MAP)이 베트남 곳곳에서 지역공동체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과 모임을 소개합니다. - Feminist Journal ILDA
▮ <제로스테이션> 2010년에 창립된 제로스테이션은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자유로운 창작 공간을 지향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술을 찾고 지역공동체와 함께 호흡하는 호찌민시의 대안예술공간이다. 화가이자 큐레이터, 비평가, 번역가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응우옌 느 후이가 창립한 이곳에서는 연중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전시회, 좌담회, 공연, 장터, 축제 등의 행사가 열린다. 또 베트남을 방문하는 해외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 레지던스 프로그램과 베트남 청년들을 위한 예술교육 및 실습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 제로스테이션의 프로젝트 <달리는 공동체> 상영회. ⓒ아맙
호찌민시에 뜬 무지개, 대안예술공간 열려
호찌민시 7군의 럼반벤 거리. 평소에는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가 제로스테이션의 벼룩시장이 열리는 날이면 호찌민시 문화예술의 해방구로 변한다. 값싼 중고품이 한데 모이는 보통의 벼룩시장과 달리, 이곳에는 예술공예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청년들과 개성 넘치는 옷차림을 한 사람들로 북적인다.
전시회를 열고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작가, 장터를 흔드는 아마추어 밴드의 라이브 공연, 앞치마를 두르고 목판화 체험을 하는 사람, 타로 카드를 펼치는 사람, 요가를 하는 사람, 힙합 복장의 그래피티 아티스트들까지…. 각자의 터전에서 반짝이던 작은 별들이 한자리에 모여 마음껏 아우라를 내뿜는다.
이렇게 제로스테이션은 저마다 각기 다른 모습의 사람들이 삶과 예술을 나누는 문화의 정거장이 되어, 호찌민시에서 작지만 소중한 무지개를 띄우고 있다.
구수정(아맙 베트남 본부장, 이하 수정): 몇 년 전 한국의 가수 ‘별음자리표’가 <제로스테이션>에서 공연을 했었죠. 그때 말로만 듣던 제로스테이션을 처음 방문해 ‘아, 호찌민시에도 이런 곳이 있구나!’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응우옌 느 후이(제로스테이션 대표, 이하 후이): 그동안 아시아의 여러 예술가들과 다양한 작업을 해왔는데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 편이에요. 광주, 안양, 청주, 부산, 제주 등에서 전시회와 세미나, 창작 레지던스에 참여하기도 했죠. 안양의 <스톤앤워터> 같은 한국의 대안예술공간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 제로스테이션 대표 응우옌 느 후이. ⓒ아맙
베트남 젊은 예술인들, 해방구를 찾아서
수정: 호찌민시에 대안예술공간은 제로스테이션이 유일하지 않나 싶은데요, 처음에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나요?
후이: 2005년에 일본, 호주의 예술가 친구들과 함께 ‘A Little Blah Blah‘라는 그룹을 만들었어요. 우리는 예술이 우리 삶과 지역공동체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기존 예술의 틀에서 벗어나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는 다양하고 기발한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 결과물을 온라인 잡지에 연재하기도 했죠.
커피숍, 식당, 공원, 가정집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게릴라식 예술 이벤트를 열었어요. 대중 예술에 대한 토론이나 교육 프로그램을 개최하기도 했죠. 틀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시도들과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는 ‘열린 예술’의 매력에 푹 빠져 지낸 시간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2년여밖에 활동하지 못했지만, 그때의 경험이 제 예술 인생에 큰 자산이 되었어요.
베트남은 전시회나 퍼포먼스 등 예술 이벤트를 하려면 당국의 허가와 검열을 받아야 하는 제약이 있는데요, ‘A Little Blah Blah’를 할 때도 늘 허가 문제로 골치가 아팠죠. 그래서 게릴라처럼 치고 빠지는 식의 이벤트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10년 무렵부터 예술 활동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많이 느슨해지면서, 저를 비롯한 베트남 예술가들도 다양한 시도들을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전 예전의 ‘A Little Blah Blah’를 다시금 떠올렸고 지역공동체와 호흡하는 대안예술공간 제로스테이션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수정: 미술을 전공한 화가이기도 하지만 큐레이터나 비평가로도 많이 알려져 있더군요.
후이: 대학 때 베트남 옻칠화인 선마이(Son Mai)를 전공했지만, 졸업 후 단 한 번도 선마이를 해본 적이 없어요. (웃음) 아버지는 화가였고 누나는 영화배우인데요, 저 역시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걸 무척 좋아했죠. 부모로부터 예술가적 기질을 물려받은 것 같아요. 대학 때부터 예술 활동뿐만 아니라 예술 이론이나 비평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영어에도 재능이 있어 틈틈이 번역 작업을 해왔어요.
‘A Little Blah Blah’에서 활동할 때 독립잡지를 운영하는 아시아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초청을 받아 말레이시아, 싱가폴,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의 예술가들과 함께하는 포럼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도통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영어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당대 예술의 흐름을 알지 못하니 대화의 맥락을 파악할 수 없었던 거죠. 그때 베트남과 세계 예술 사이의 간극을 실감했습니다.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소통을 돕는 큐레이터의 필요성도 절감하게 되었고요.
전쟁화가 아니면 세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베트남 예술의 현실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예술을 베트남에 소개하고, 또 베트남 예술을 세계에 알리는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디렉터, 평론가, 번역자 등 다방면의 활동을 하게 되었죠.
▶ 제로스테이션 근처 골목길에서 그래피티 아트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아맙
제로의 정거장에서 반짝이는 예술꾼들의 향연
수정: 제로스테이션이라는 이름이 인상적인데요,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궁금합니다.
후이: 책상에 컵 하나만 올려놓아도 예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나와 다른 무언가와의 만남입니다. 제로스테이션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열린 공간만 있을 뿐 특별한 무언가를 갖추고 있지는 않아요. 그러한 비물질적인 ‘제로’의 공간에서 사람들이 만남을 통해 새로운 예술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나가죠. 규율이나 형식은 물론, 예술이라는 기존의 관념에서조차 자유로운 창작 공간이 되어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위한 플랫폼이 되는 것이 제로스테이션의 역할입니다.
수정: 대안예술공간 제로스테이션의 일상을 알고 싶네요. 이곳에서는 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나요?
후이: 제로스테이션도 다른 예술 공간들처럼 회화, 사진, 설치 미술 등 다양한 장르의 전시를 열고 작가와의 만남, 작품 설명회, 좌담회 등의 행사를 개최합니다. 하지만 때론 음악인들을 위한 공연장으로 변신하기도 하죠. 베트남의 청년들을 위한 교육 공간, 예술가와 일반인이 함께 어울려 작업하는 창작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하죠.
또, 베트남을 방문하는 해외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 레지던스 공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화가든 사진작가든 행위예술가든 누구 할 것 없이 제로스테이션에 입주하면 저는 ‘먼저 예술을 내려놓으라’고 주문합니다. 그들이 이곳에 살면서 한동안 예술은 하지 말고 베트남을 바라보길 바라는 거죠. 예술의 첫걸음은 관찰에서 출발하고, 관계와 소통을 통해 예술 행위가 시작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제로스테이션을 통해 해외 예술가들에게 베트남을 날것 그대로 바라보고 현지인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볼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예술은 돌아가서 해도 늦지 않죠. (웃음)
▶ 제로스테이션에서 열린 벼룩시장 풍경. ⓒ아맙
수정: 제로스테이션의 벼룩시장이 베트남 국영방송 VTV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어떤 내용의 행사인가요?
후이: 벼룩시장에는 정말 다양한 친구들이 모여요. 예술가, 일반인, 프로, 아마추어 구분 없이 누구나 벼룩시장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예술 공예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시장이고요, 풍성한 이벤트나 축제가 펼쳐지는 놀이 공간입니다. 예술가들이 관객들과 함께하는 퍼포먼스 공연을 열고, 목판화 체험 교실을 열기도 합니다. 젊은이들이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수공예품이나 패션 상품을 파는 좌판을 열기도 하죠. 베트남 공정무역 커피를 파는 <베트남커피바이크> 친구들이 장사를 하면서 공정무역을 홍보하기도 하고요.
벼룩시장이 열리는 내내 아마추어 밴드의 라이브 공연이 이어지고, 한쪽에서는 요가 음악을 들으며 명상을 즐기고, 저녁에는 독립영화 상영도 합니다.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이들의 만남과 소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한 만남의 장을 마련해 보자는 취지에서 벼룩시장을 기획했습니다. 제도화된 전시회장이나 백화점이 아닌 자유롭게 열린 장터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서로의 끼와 재능을 나누는 공간, 벼룩시장이 일상 속에서 개개인이 가진 예술성을 뽐낼 수 있는 플랫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예술을 하지 않아도 좋아,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면
수정: 제로스테이션에 관한 글을 읽어보면 대중예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제로스테이션이 특히 대중예술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면요?
후이: 저는 스스로 예술가를 자처하는 사람, 예술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제일 무섭습니다. (웃음) 정작 예술을 망치는 사람이 바로 예술가라고 생각하거든요. 제로스테이션은 지역공동체와의 소통을 중요시하고, 예술가가 중심이 되는 기존의 예술관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즐기는 예술을 추구해요.
예술이란 기존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행위, 다시 말해 일종의 ‘사건’을 일으키는 것인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예술이라는 틀에 박힌 사람들은 그런 ‘사건’을 일으키지 못하죠. 저는 순수예술이니 고급예술이니 하는 개념을 거부합니다. 세계화, 국제화라는 것도 믿지 않아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이웃과의 소통을 통해 ‘사건’을 일으키는 예술이 제로스테이션에서 벌어지길 바랍니다.
▶ 제로스테이션 사진 전시회 <사이공, 여기, 오늘> ⓒ아맙
수정: 제로스테이션이 어떤 곳인지 보여주는 독특한 예술 프로젝트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후이: ‘날것의 아이디어’(Raw Idea)라는 프로젝트가 떠오르네요. 하노이 출신, 호찌민 출신, 그리고 베트남 재미교포 출신의 예술가 세 사람이 함께한 이야기입니다. 예술 프로젝트였지만 이들은 한 달 동안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만 나누었어요. 이들의 화두는 ‘왜 예술을 하는가’였습니다. 매일 세 사람이 둘러앉아 ‘나에게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을 멈추면 죽을 만큼 절박한가’ 등의 질문을 던지며 토론을 이어갔죠.
한 달이 지난 후, 한 사람은 예술을 그만두었고 또 한 사람은 커피숍을 열었어요.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 대화를 영화로 만들어 일본에서 열린 요코하마 비엔날레에서 주목을 받았고 세계 각지를 돌며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우리가 예술에 대해 어떤 의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 우리의 삶이 예술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깊은 질문을 던진 아주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프로젝트였죠.
수정: 앞으로 제로스테이션이 준비하고 있는 사업이나 계획이 있다면요?
후이: 제로스테이션은 커피숍과 도서관을 꾸릴 예정이에요. 커피를 마시고 책을 보며 일상을 공유하는 마을 공동체를 일궈보는 것이죠. 그리고 베트남 예술계에 전문 큐레이터가 부족한 고질적인 문제가 이어지고 있는데요, 제로스테이션에서는 큐레이터를 양성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수료자들이 전시회를 기획,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고요.
현재 한 달에 한 명꼴로 동남아 예술가들을 초청하고 있는데, 제로스테이션에서 더 많은 해외 예술가들과의 교류가 이루어지길 희망하고 있고요, 벼룩시장도 더 자주 열 계획입니다. 이젠 특별한 행사가 아니라도 커피와 책을 즐기는 사람들로 제로스테이션이 더욱 북적이게 될 것 같아요. 굳이 예술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제로스테이션에서 지금보다 더 자유로운 만남과 다양한 사람들의 교감이 이어진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각기 다른 사람들이 만나 어울리다 보면 분명 무슨 ‘사건’이 벌어지지 않겠어요? (웃음) Feminist Journal ILDA
* 기록 정리: 권현우 (아맙 공정여행 팀장)
<아맙> 카페: cafe.daum.net/doanhnhanxahoi 연락처: 070-7554-5670 (베트남사무소)
<아맙> 후원 계좌: 신한은행 110-313-503660 (예금주: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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