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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죽음은 추모 받을 권리가 있어요”

<아맙이 만난 베트남 사회적기업> 마린(Marin)


공정여행과 공정무역을 통해 한국과 베트남을 잇는 사회적 기업 ‘아맙’(A-MAP)이 베트남 곳곳에서 지역공동체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과 모임을 소개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열사 유가족을 위한 법률 지원 및 자문센터 ‘마린’(Marin)


2004년에 창립된 마린(Marin)은 베트남전쟁 당시 희생된 열사들의 유해와 무덤, 국립묘지와 관련된 정보를 유가족들에게 제공하고, 유해 발굴 및 무덤을 찾는 사업을 하고 있는 비영리단체다. 약 90만 명(베트남 전체 열사의 약 80%)에 관한 정보와 전국 각지의 국립묘지에 안장된 약 30만 명에 대한 정보를 온라인에 공개하고 있다. 온라인 위령비를 설립해 유가족 간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물론, 다음 세대를 위한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2010년에는 베트남 사회적기업 지원센터(CSIP)로부터 ‘올해를 대표하는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열사 유가족을 위한 법률 지원 및 자문센터 <마린>(Marin)의 부센터장 응오 티 투 항.  ⓒ아맙

 

전쟁이 끝났지만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평화의 봄은 왔지만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긴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것은 전사통지서 한 장이 전부였다. 허름한 통지서를 읽고 또 읽었지만 어디서 죽었는지, 시신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조차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유가족들은 실낱같은 단서라도 있으면 죽은 이의 유해를 수습하러, 무덤을 찾으러 어디든 달려갔다. 불발탄과 지뢰가 묻혀 있는 과거의 전장을 누비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용하다고 소문난 주술사를 찾아가 매달려 보아도 헛수고였다. 복채를 대느라 재산을 탕진한 이들도 있었다.


평화의 시대가 왔는데 무덤을 찾느라 방방곡곡 헤매는 유가족들의 서러움을 누가 알랴. 언제쯤 망자의 거처를 찾아 향불을 피울 수 있을까. 전쟁 유가족들을 도와 유해를 발굴하고 무덤을 찾는 일을 지원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 <마린>을 찾아갔다. 이곳에서 전쟁의 상처와 슬픔을 보듬고 살아가는 베트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구수정(아맙 前 베트남 본부장, 현재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이하 수정): <마린>의 이야기를 듣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을 벌이고 피해자 지원 사업을 해온 <아맙>의 이야기와 <마린>이 걸어온 길이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응오 티 투 항(마린 부센터장, 이하 항): 한국인이 베트남에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 반갑고 놀라웠어요. 저도 군인들의 무덤을 찾으러 다니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민간인 피해자들의 무덤과 집단묘지를 보곤 했습니다. 그중에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도 있었어요.


컴퓨터공학과 학생 여덟 명의 기행에서 시작된 일


▶ 전직 기자였던 응오 티 투 항 <마린> 부센터장. ⓒ아맙


수정: <아맙>과 <마린>이 이렇게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웃음) 어떤 계기로 이런 사업을 시작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항: 2004년에 하노이의 대학생 여덟 명이 자전거를 타고 베트남전쟁 때 희생된 열사들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기행을 떠났습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친구들이었어요. 유가족을 위한 일이었는데 2004년에 베트남소리방송(VOV)에 소개되기도 했죠. 그때 저는 호찌민시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었는데요, 이 학생들의 이야기를 보도했습니다.


그 후 학생들은 자신의 전공을 살려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거나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열사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고향, 매장된 장소와 이들의 이야기들을 정리해 공개하는 웹사이트 서비스를 시작했어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유가족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열사들에 대한 신뢰할 만한 데이터를 구축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공유함으로써, 베트남 역사에 대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죠.


열사(烈士)를 의미하는 영어 Martyr의 베트남 식 발음이 마린(Marin)하고 비슷한데요. 사업의 의미를 살리면서 베트남 사람도 부르기 쉽고 국제적으로도 친근감 있는 명칭을 고민하다가 단체의 이름을 <마린>이라고 지었어요.


수정기자로 활동하다가 <마린>을 창립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항: 제 큰아버지도 항불전쟁(1946-1955,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벌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희생되었어요. 할머니가 제 어머니에게 큰아버지 유해를 꼭 찾아달라는 유언을 남기셨죠. 우리 남매가 유치원 과정을 마칠 무렵부터 어머니는 큰아버지의 유해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 헤매고 다니셨습니다. 용하다는 무당과 주술사들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했어요. 하지만 끝내 찾지 못했죠.


어른이 된 저는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다시 유해 찾기에 나섰고, 결국 큰아버지가 누워 계신다는 국립묘지를 찾았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50위 가량의 무명용사의 묘들 가운데 정확히 큰아버지의 묘가 어느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영혼이 있다면 큰아버지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큰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계실 것이라 믿으며, 무명용사들의 묘비 앞에서 묵념을 올리고 향불을 피워드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큰아버지의 유해를 찾는 지난한 과정 속에서, 자연과학대 학생들이 운영하는 웹사이트를 만나게 되었고 저도 함께하게 됐지요. 그런데 학생들이 차례로 대학을 졸업하면서 이 웹사이트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됐어요. 저는 어떻게든 이 사업을 이어가야겠다고 생각했죠. 결국 기자직을 그만두고 하노이로 이주해 <마린>을 창립한 겁니다.


유해를 찾아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까지…


수정유가족들이 유해나 무덤을 찾을 수 있도록 <마린>에서는 어떠한 도움을 주고 있나요?


항: <마린>은 용사들이 전사한 장소나 매장된 장소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국방부는 물론이고 지방의 성, 현, 사 단위의 노동보훈사회부를 찾아다녔습니다. 국경을 넘어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전장까지 누볐어요. 이렇게 수집한 자료들을 홈페이지에 공개해 유가족들이 직접 유해나 무덤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있죠. 하지만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아요. 정보를 쥐고 있는 지방 관리들의 무관심이나 냉담한 반응에 상처를 받기도 했죠. 과거의 전장이 지금까지도 군사 지역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접근이 어렵고요. 아직까지 제거되지 못한 불발탄이나 지뢰도 많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무릅써야 할 때도 있었죠.


정보 공유뿐 아니라 <마린>은 유가족들이 정부로부터 받은 전사통지서를 바탕으로 유해를 찾을 수 있도록 자문을 해주고 있어요. 보통 통지서에는 군사 기밀을 이유로 군인이 어디서 어떻게 사망했는지 구체적으로 적지 않죠. 단지 “남부 전선에서 희생”이라고 적혀 있거나, “KT, KB, KN, KH, P2, P, 470, 471…” 등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암호나 군부대 번호만 기재된 경우가 많아요. <마린>의 암호 해독과 안내, 자문이 없이는 유가족들이 전사자가 소속된 부대, 전사 장소 등의 구체적인 단서를 찾아내기 힘들죠.


<마린>에서는 인터넷 사용이 어려운 유가족들을 위해 24시간 핫라인도 운영하고 있고요, 필요한 경우에는 유가족과 함께 직접 유해를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현재 <마린>에는 전국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연구자들과 지역전문가, 베트남전 참전군인, 대학생 등의 자원봉사자들이 유해 발굴 사업을 돕고 있어요.


▶ 무명열사의 묘지. 묘비에 적힌 LIET SY는 열사, CHUA BIET TEN은 이름 모름이라는 뜻이다. ⓒ아맙

 

수정베트남의 유해 발굴 사업은 어느 정도 진척이 되었나요?


항: 항불전쟁에 이은 항미전쟁(1960-1975,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 과정에서 미국과 벌인 전쟁)을 거치면서, 그리고 그 후에도 캄보디아전쟁(1975년 냉전 체제에서 벌어진 베트남과 캄보디아 간 전쟁)과 중월전쟁(1979년 당시 중공의 국경수비대가 베트남령에 침공하면서 일어난 전쟁)을 치르면서, 수백만 명의 군인들이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희생됐어요. 하지만 이제 겨우 약 30%의 유해만이 발굴되어 신원 확인을 거쳐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을 뿐입니다. <마린>이 가야 할 길이 아직도 까마득히 멀기만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수정지금까지 <마린>의 웹사이트에 등재된 열사들의 통계 데이터는 얼마나 되나요?


항: <마린>의 홈페이지에는 약 90만 명의 용사에 관한 정보가 등재되어 있는데요, 지금까지 확인된 베트남의 열사 총 110만 명 가운데 약 80%를 차지합니다. 또한 전국 수천 곳의 국립묘지에 안장된 약 30만 명에 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희생자의 행방을 전혀 모르는 유가족들도 <마린> 웹사이트를 방문해 같은 시기에 동반 입대했거나 같은 부대원이었던 전우의 정보를 찾아서 그것을 단서로 유해를 찾는 경우가 늘고 있어요.


한 명 한 명 이렇게 모인 정보가 축적되면서 더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죠. 다른 유가족이나 참전군인들의 열성적인 도움으로, 수십 년간 찾아 헤매던 유해를 발굴하는 기적이 벌어지기도 해요. 정말 신기한 것은 실낱같은 단서가 하나라도 나오면 결국엔 유해를 찾게 된다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망자의 영혼이 우리의 발길을 인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 <마린>이 주최한 유가족과의 만남 행사 중에서. 열사의 유골을 찾아 유가족에게 전달하고 있다.  ⓒ아맙

 

베트남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온라인 위령비’


수정<마린>의 홈페이지에 온라인 위령비가 건립되어 있더군요.


항: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열사들은 사회적으로 그 유지가 받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세월 따라 점점 빛이 바라고 분주한 일상사에 묻혀 잊혀져가는 게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온라인상에서나마 이 분들의 이름과 나이, 본관, 이력, 사진, 전사 장소와 경위 등의 정보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위령비를 건립해 추모공간을 마련한 것이죠.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들은 정규군이었기 때문에, 전사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도 쉽고 전사 장소와 전투명, 날짜 등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베트남은 유격대원으로 게릴라전에 참여하거나, 가명으로 비밀 결사조직에서 활동하거나, 인민들이 전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신원 미상의 전사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국가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열사들의 명단이나 국립묘지에 안장된 묘비, 위령관에 새겨진 명단에도 누락된 희생자들이 많은 것이죠. ‘무명’으로 기재되거나, 이름이 확인되었다 하더라도 나이나 본관, 직책 등 세부 항목이 빠져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온라인 위령비는 희생자들의 정보가 아직 미확인 상태라 하더라도 언제든지 수정, 보완하거나 업데이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또 클릭 한 번으로 관련 정보를 열람하고, 쉽게 참배에 동참할 수도 있습니다. 온라인에서 향이나 촛불을 밝히고 헌화를 할 수도 있고, 추모사를 남길 수도 있으며, 묘지에 직접 조화를 보내는 것도 가능해요. 열사와의 추억, 유가족과의 소통 등 이야기를 남길 수 있는 게시판도 운영하고 있죠. 비록 사이버 공간에 존재하지만 온라인 위령비는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쟁 세대와 현 세대 그리고 미래 세대를 잇는 추모와 소통의 장으로서 실질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수정2010년에 베트남 사회적기업 지원센터(CSIP)로부터 지원을 받았더군요.


항: 사실 오랫 동안 <마린>의 활동이 법적 근거를 갖기가 어려웠어요. 정부가 해야 할 사업을 민간단체가 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현재는 사법부 직속의 베트남빈민사법지원회 소속으로 단체로 등록되어 있어요. 2010년 CSIP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당시에, 저는 <마린>을 사회적 기업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고 답변했었죠. 하지만 CSIP는 <마린>의 온라인 사업 방식과 사회적 기여도를 높이 평가해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지금은 <마린>도 법률 자문을 통한 수익 창출 방안을 고민하고 있어요. 기존의 유가족을 위한 무료 법률 자문 서비스는 유지하되, 유료 법률 상담과 자문 서비스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방안도 구상 중입니다. 유가족들이 유해를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사기를 당하거나 배상금을 갈취당하는 등의 사건도 많이 발생하고 있거든요. 묘지 관련 민원이나 국립묘지 조성 시 토지 보상 문제 등 법적인 문제에 부딪히는 경우도 적지 않죠.


▶ 마린은 지역 곳곳을 방문해 유가족들을 위한 자문과 상담 서비스를 하고 있다.  ⓒ아맙


이편이든 저편이든,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전쟁의 희생자’


수정신문 기사를 통해 <마린>을 이끌어 나가는 항 씨의 이야기를 먼저 접했어요. <마린>의 사업 내용을 볼 때 민간단체에서 해결하기엔 어려운 일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정부의 협조나 국제기구 또는 다른 NGO 단체의 지원이 있나요?


항: 말씀하신 대로 <마린>의 사업은 국방부나 노동보훈사회부 등 정부의 협조가 없으면 실효를 거두기가 어렵죠. 제가 호치민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접고 수도인 하노이로 옮겨온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행정 협력은 있었지만 예산을 확보할 순 없었어요. 옥스팜이나 CSIP 등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사무실 운영비나 인건비를 충당하기에도 빠듯했지요. <마린>의 사업비는 대부분 유가족과 참전군인,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준 후원금에 의존해 왔습니다.


사재를 터는 것도 한계에 이르러, 제가 취업을 해서 월급으로 사무실을 꾸려가기도 했어요. 새벽 다섯 시면 <마린>에 나와 업무를 처리한 후 회사에 출근하고, 퇴근 후엔 다시 <마린>으로 돌아와 자정을 넘겨서까지 일하는 강행군이 계속됐죠. 유해를 찾아나서는 출장이 많아 주말에도 쉴 수 없었어요. 급기야 2011년에는 쓰러져서 2년간 <마린> 활동이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2013년에 다시 문을 열었는데요, 합법적인 활동이 보장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2014년부터 다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죠. 수백만 명에 달하는 유가족들의 신뢰와 후원이 없었다면 <마린>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했을 거예요. 지금은 <마린>의 지속 가능한 활동을 위해 사회적 기업으로의 전환을 적극 고민하고 있습니다.


수정베트남전쟁 과정에서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의 피해도 정말 많았습니다. 민간인 희생자들의 경우에는 베트남 열사로 추인되거나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도 없고, 국가의 배상을 받을 수도 없는데요.


항: 열사의 무덤을 찾아나서는 길에 일반 군인들의 무덤, 한때는 적군이었던 남베트남 군인들의 무덤, 그리고 또 수없이 많은 민간인들의 무덤을 만났습니다. 가끔 열사가 아닌 경우에도 시신이나 무덤을 찾아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기도 해요. 처음엔 저도 열사, 일반군인, 민간인 등으로 죽음을 구분하기도 했어요. 전사, 사고사, 병사 등 사망 유형에 따라 행정 분류를 하기도 했고요. 그들을 추모하는 제 마음의 깊이도 달랐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점점 그런 구분이 무의미해지더군요.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차별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두가 전쟁의 희생자이니까요. 그 사람이 북베트남 군인이든, 남베트남 군인이든, 혹은 민간인이든, 심지어 미군이든 한국군이든 그들의 어머니가 흘렸을 눈물과 고통에는 차이가 없겠지요. 인간의 모든 죽음은 추모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정부가 민간인들의 죽음까지 책임지고 배상하기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죠. 국가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민간인 희생자와 유가족들에 대한 별도의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미군이나 한국군에 의한 학살 피해자에 대해서도 관련 국가의 배상과 시민 사회의 인도적 지원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기록 정리: 권현우 한베평화재단 베트남 지부 <아맙>(AMAP) 팀장


-한베평화재단 베트남 지부 <아맙> 카페: cafe.daum.net/doanhnhanxahoi

-후원 및 문의: 한베평화재단 kovietpeac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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