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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임금격차’ 해소…독일 사회의 시도

독일 임금공개법 제정 경위와 효과



‘모든 남자들이 나보다 많은 돈을 받고 있었다’

 

1998년 3월, 미국의 대기업 굿이어(Goodyear)의 타이어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관리자 릴리 레드배터는 익명의 쪽지를 받고 충격에 휩싸인다.

 

“그 쪽지에는 나와 타이어실의 관리자 세 명의 이름이 있었고, 그 옆에 각각의 임금이 적혀 있었다. 내 임금은 한 푼의 오차 없이 정확했다. 몇 년 동안 같은 일을 하는 남자들보다 내 임금이 적을까봐 나는 줄곧 걱정해 왔지만 어떠한 근거도 없었다. 나는 구체적 증거도 없이 남편이 바람피운다고 계속 의심하는 부인 같았다. 하지만 이제 내가 언제나 두려워하던 그것이 까만 잉크로 쓰여 내 손에 있었다. 모든 남자들, 다른 관리자들은 내가 받는 것보다 많은 돈을 받고 있었다. 훨씬 많았다.” -릴리 레드베터, 러니어 스콧 아이솜 <기나긴 승리>(이수경 김다 옮김, 글항아리, 2014) 중에서


▶ 릴리 레드베터·러니어 스콧 아이솜 지음 <기나긴 승리: 골리앗과 투쟁한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이수경·김다 옮김, 글항아리, 2015)

 

쪽지에는 바로 자신과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남성 관리자들의 임금이 적혀 있었다. 1979년 굿이어 타이어 공장에 취직해 최초의 여성 관리자가 됐던 릴리 래드배터는 취직 당시에는 남성들과 같은 임금을 받았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후 그녀는 40퍼센트나 적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쪽지를 받을 당시 이미 61세였던 그녀는 퇴직을 하면서도 8년에 걸친 법정 싸움을 벌였지만 결국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대법원은 “회사가 더 적은 임금을 지급하기로 처음 결정한 뒤 6개월 이내에 릴리 레드베터가 문제를 제기했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릴리 레드베터가 회사 측의 “그런 처사를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법정 싸움은 패했지만, 2009년 그녀의 이름을 딴 ‘릴리 레드베터 공정임금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 서명한 법안이다. 공정임금법은 평등한 임금을 지급하지 않은 고용주에 대한 벌칙을 강화하고, 고용주에게 임금 실태에 대해 문의하거나 자신의 임금을 공개한 노동자에 대한 사측의 보복 조치를 금지한다. 이 법은 미국에서 1963년 제정된 동일임금법을 더 공고히 한 것이기도 하다.

 

2017년 독일에서 ‘임금공개법’이 제정되다

 

릴리 레드베터의 투쟁이 익명의 쪽지에 담긴 임금 정보에서 시작됐듯이, 여성노동자들이 동일한(또는 동일한 가치를 갖는) 업무를 하는 남성노동자들과 실제로 얼마의 임금 격차가 나며 이것의 근거는 무엇인지 그 정보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지난 달 30일 독일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임금공개법’이 제정돼 오는 7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4월 13일에 열린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 학술대회 <성별임금과 젠더>에서 황수옥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이번에 제정된 독일의 임금공개법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독일은 유럽 국가 중에서 상대적으로 가부장적 전통이 강한 나라로, 성별 임금격차가 21퍼센트다. (한국은 37퍼센트) 동일한 노동을 하는 남성과 여성의 임금 격차도 7퍼센트로 알려져 있다.

 

현 여성부 장관 마누엘라 슈베시히(사민당)가 성별 임금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2015년 독일 정부에 공정임금법 초안을 제출했다. 긴 시간의 논의 끝에 2016년 10월 대연정 정부가 이에 합의했다. 논의 과정에서 기업들의 거센 반발로 고용주의 의무 사항이나 노동자의 정보권 보장 범위가 축소되기도 했으나, 올해 3월 30일 끝내 독일 연방하원에서 임금공개법이 제정됐다.

 

독일의 임금공개법은 ‘동일노동(또는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그동안 금기시해 왔던 임금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사용자로 하여금 투명하고 공정한 임금 정책을 실행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 4월 15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페미니스트 직접행동 <나는 오늘 페미니즘에 투표한다> 참가자들의 퍼포먼스  ⓒ출처:한국여성노동자회 페이스북 페이지

 

임금공개법의 핵심은 여성노동자들이 자신과 동일하거나 동일한 가치가 있는 노동을 하는 남성노동자의 임금에 관해 정보청구권을 갖는 것이다.

 

임금공개법은 200인 이상 사업장의 고용주는 노동자가 요구할 경우, 임금에 관한 구체적인 기준을 서면으로 설명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업장 내에 사업장평의회가 있는 경우엔 사업장평의회가 노동자의 요청을 받아 임금리스트를 열람할 수 있다.

 

임금정보에는 기본급뿐만 아니라 성과급 여부, 회사에서 지급하지만 사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자동차 지급 여부 등 복지혜택에 대한 정보도 포함된다.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 최대 6명의 정보를 회사에 요청할 수 있고, 회사는 3개월 이내에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또한 500인 이상 기업은 정기적으로 사업장 내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이행을 위해 임금체계를 점검해야 하고, 경영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소규모 사업장 여성들은 어떡하라고…개정 요구

 

황수옥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에 따르면, 독일의 노동조합과 여성계는 임금공개법 제정을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독일 여성 60% 이상이 중소규모 사업장에서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임금공개법이 200인 이상 사업장에만 해당되는 것에 문제 제기 하고 있다.

 

때문에 공정임금법 제정을 추진했던 사민당을 비롯해 녹색당 또한 이 법률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임금 공개 의무를 ‘200인 이상 사업장’으로 제한하는 규정을 없애고, 사업장 규모에 상관없이 노동자들이 정보청구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또한 임금체계에 관한 심사를 기업에 자율적으로 맡기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독일의 일반평등대우법(성별, 인종과 민족적 혈통, 성별, 종교 또는 가치관, 연령, 장애, 성적 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으로 2006년 제정됨) 상 연방차별금지기관의 공증을 받는 등 절차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정보청구권을 통해 사업장에 임금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성노동자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혼자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집단소송권을 통해 효과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2017년 3.8 세계여성의날 조기 퇴근 시위 “3시 STOP”  ⓒ출처:한국여성민우회 페이스북 페이지

 

한국도 ‘평등한 임금’을 향해가는 발판 마련해야

 

기업이 임금공개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제재할 수 있는 뾰족한 방안이 없다는 것 또한 임금공개법의 한계로 지적된다. 그러나 황수옥 연구위원은 “이러한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이 법은 큰 상징성을 갖고 있으며, 평등한 임금을 향해 가는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성별 임금격차를 좁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동안 각종 통계를 근거로 삼아왔지만, 사용자들은 ‘이 통계를 어떻게 믿냐’고 반문해왔다. 싸우고 싶었는데 싸울 무기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이 사람보다 얼마나 적게 받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는 건 싸움의 무기를 가질 수 있는 거다.”

 

여성의 임금이 남성 임금의 63.4%에 그치는 한국 사회도 성별 임금격차를 해소하고 ‘공정한 임금’을 실현하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가 필요한 때이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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