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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는 해체되고 있는 걸까?

<혜원의 젠더 프리즘> 성별에 관한 페미니즘의 역설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소개: 혜원. 싸우는 여자, 비혼, 페미니스트, 아직은 한국.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1. 여성혐오에 뿌리를 둔 사건들을 접하며

 

말을 잃어버린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고작 말 따위에 담기엔 버거운 감정들이 몸속에 쌓여갔다. 글도 마찬가지였다. 제법 확신에 차 선동적인 단문들을 쓰고 나르던 얼마 전의 나와는 사뭇 달랐다. 말과 글 따위로 섣불리 잡아두기에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너무나 크고 무거웠고, 이를 둘러싼 우리의 감정들은 몹시 습하고 먹먹하였다. 알림창에 빠르게 밀려드는 죽음의 소식들이 남긴 생채기들이 쉬이 낫질 않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들 앞에 우리는 스스로 말을 잃는다. 오직 침묵으로만 표현될 수 있는 어떠한 감정들이 있다.

 

언제부터 이 시기가 시작되었을까? 강간 사건은 너무 흔해 보관조차 하지 않고 기록을 삭제한다던 경찰의 인터뷰를 보던 날이었을까? 혼자 왁싱샵을 운영한다는 이유로 남성 유튜버에 의해 성적 대상화되고, 이후 강간 살해까지 당했던 여성에 관한 기사를 보았을 때부터? 게임계의 지긋지긋한 여혐에 질려 미러링을 했다가, 남혐으로 타겟팅 당해 살해 협박을 받았던 게이머의 이야기를 듣던 날이었을까? 아니면 ‘여자아이들에게 운동장을 돌려주자’고 말하며 학교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던 교사가 일베에 의해 신상이 털리고 위협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이었을까?

 

언제부터였는지 돌이켜 보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깊은 여성혐오에 뿌리를 둔 사건 사고들은 끊이지 않고 터져나왔다. 범죄율이 갑자기 치솟았을 리는 없고, 이제서야 사회가 그 폭력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반증이리라. 미디어는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지점을 놓치지 않고 기사 거리를 발굴한 뒤 기존의 가부장적 언어를 그대로 답습하여 쏟아낸다. 가해자는 그저 사람이고 피해자에게만 ‘여’라는 성별 표시를 붙여 온갖 선정적인 표현으로 그 죽음을 상세히 묘사하거나, 혹은 온전히 가해자에게 이입하여 그의 범행 동기나 변명을 타이틀로 붙인 기사들이다.

 

하루에도 몇 건씩이나 터져 나오는 사건 사고들임에도 무뎌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이를 받아들이는 나의 감정적 반응은 점점 민감해져만 갔다. ‘나일 수도 있었다’, ‘안전하지 못하다’ 라는 생각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기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익명의 여성들과 나를 분리하는 경계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가끔 꿈속에서는 그들이 나이고, 내가 그들이기도 하였다.

 

남자에 의해 죽거나 강간당한 여성의 뉴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데 책에서도, 영화에서도, 만화에서도, 나를 둘러싼 모든 매체들이 이를 포장하거나 미화하거나 적당히 그럴듯하게 정당화하며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나의 절망은 더욱 깊어졌다.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곧잘 빠져들곤 했던 공상의 세계마저도 현실 세계의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 이현재 <여성혐오 그 후>(들녘, 2016)


성별 위계에 기반한 차별과 억압의 구조에 대해 알면 알수록 세상은 점점 더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바깥세상을 바라보던 시선이 안으로 향하여 자기 자신의 내면과 삶을 돌아보기 시작하면 고통은 더더욱 커지기 시작한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나고 자란 우리들 중 여성혐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현재 선생님은 <여성혐오, 그 후>에서 우에노 치즈코의 표현을 빌어 여성혐오의 논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치즈코에 따르면 위계적 젠더 이분법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여성혐오의 논리를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중력처럼 시스템 전체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 중 누구도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혐오, 그 후> 중에서

 

더구나 ‘여성이 내면화한 여성혐오’가 더욱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하기 때문이다. 기사 속 여성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의 모습을 찾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깊은 자기혐오와 낮은 자존감, 사적인 관계에서 되풀이 되곤 했던 폭력적인 경험들, 이로 인한 트라우마와 심리적 유약함, 학습된 무기력, 눈치 채기 어려울 만큼 숱하게 겪었던 미묘한 차별과 억압들까지… 나의 성별은 나의 삶에 너무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엄마에게 충동적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릴 때부터 남동생보다 내가 늘 공부를 잘했음에도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나는 등록금이 싼 국립대를 선택했고, 동생은 재수를 거쳐 원하는 사립대에 입학하였다. 그 사실이 새삼 사무쳤다. 엄마는 지금의 내 직업이 ‘한국에서 여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직업’이기 때문에, 나의 미래를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조금 울었다.

 

2. 여성혐오의 구조에서 벗어나기

 

한참 ‘나는 페미니스트다’ 선언과 강남역 살인사건의 피해자 추모 행렬이 이어지던 어느 날, 페미니즘 감수성을 갖고 있어 비슷한 고민을 종종 나누곤 했던 친구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페미니즘을 알게 되고부터 그동안 불편했던 것들이 ‘왜 불편했는지’ 하나씩 알게 되었다고. 이제 다시는 그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이미 한 번 눈 뜬 이상, 다시 눈 감고 살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차라리 모르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으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것은 더이상 희망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눈물 나게 잔인하고 서러운 바깥의 현실이 내게 줄 수 있는 타격에는 한계가 있다고 그동안 믿어왔다.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정체화한 지 이미 여러 해, 페미니즘은 그동안 나에게 삶의 지향이자 삶 그 자체였다. 오히려 현실의 잔인함은 내가 페미니즘을 놓을 수 없는 이유가 되어주곤 했다. 부당한 것으로부터 눈 돌리거나 피하지 않고 제대로 마주하는 것이 내 삶의 중심을 더욱 단단히 해주리라 믿었다. 분노라는 감정은 강렬한 만큼 거센 동력이 되어주니까.

 

그러나 긍정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나날이 터질 것처럼 차오르는 요즈음의 분노는 조금 달랐다. 도저히 풀릴 길 없는 강한 분노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여 자꾸 소진되게 만드는 것이다. 분노에 차오르면 차오를수록 오히려 그 원인이 된 사회 구조는 더욱 견고하고 부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되어버리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억압구조의 견고성을 강조하는 방식은 특히 여성의 행위자성을 고려할 때 곤경에 처한다. (중략) 그렇다면 어떻게 여성들은 여성혐오의 구조에서 탈출할 수 있는가? 여성혐오의 구조가 강고함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우리는 이로부터 빠져나올 구멍이 없음을 자인하는 셈이 되는 것이 아닌가? -<여성혐오, 그 후> 중에서

 

억압의 구조를 강조하면 피해자가 되어 주체의 행위자성이 축소되어 버리고, 개인의 자유와 선택에 집중하는 행위자성을 강조하면 주체를 둘러싼 구조의 맥락이 지워져 버리는 이 딜레마는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하여 위치 짓는 순간 행위자성이 축소된다는 말이 이해가 되면서도, 피해의 호우 속에서도 매일 숨을 쉬며 살아가는 우리가 젖은 옷을 하소연하지 않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 4월 15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보트_포_페미니즘(Vote_for_Feminism) 행사에서.  ⓒ출처: 한국성폭력상담소

 

3. 젠더 이분법에 도전해야 한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구조와 맞서 싸워야 하는 페미니즘 진영 내부에서도 수많은 갈등과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적이 정해진 싸움은 쉽다. 그리고 더 강력하다. 더 강한 싸움을 위해서는 ‘적’이 필요하고 적과 나를 구분할 수 있는 ‘경계’가 필요하다. 경계를 통해 집단은 동일성을 강화하고 싸움의 전선을 명확히 한다. 그 경계가 이른바 신체적으로 약하여 강간과 폭력의 대상이 되며, 원치 않는 임신을 할 가능성을 가진 ‘생물학적 여성’인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과 안전의 욕구마저 충족되지 않는 여혐국가 한국에서 이 싸움은 정당화된다. 다만 이 경계가 기존의 페미니즘이 끊임없이 싸워왔던 위계적 젠더 이분법, 젠더 체계에 근거한 ‘생물학적 성별’이라는 점으로 인해, 싸우면 싸울수록 역설적으로 그 차별의 근간이 되는 체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순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나 또한 생존과 안전조차 보장되지 않는 지독한 가부장 사회 한국에서는 이러한 전선이 유효한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곤 했다. 그러나 한편 모순과 마주하기를 거부하고 점점 혐오와 배제의 방식으로 적을 그대로 닮아가는 이들을 볼 때면 서글픔이 밀려온다. 새로 등장한 페미니즘의 흐름이 그동안 내 삶의 근본으로 삼아오던 페미니즘과 너무 다름에서 오는 충격, 또한 계급, 인종, 젠더, 성적 지향 등 다양한 차별의 위계를 부수기 위한 싸움들이 이들에 의해 너무나도 쉽게 멸칭으로 불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나에게 외부와의 싸움보다도 더욱 큰 상처를 남겼다. 집단의 동질성을 강화하는 방식은 집단 내 차이를 쉽게 무시해버리는 오류를 불러온다.


…또 다른 곤경은 여성혐오 비판 담론이 여성혐오 구조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비판하고자 하는 젠더 이분법을 전제로 하게 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가령 여성혐오 구조 담론에서 모든 남성은 가해자로서의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하나의 단일한 집단으로 상정되며, 모든 여성은 피해자로서의 동일한 경험을 가진 하나의 단일한 집단으로 상정된다. (…) 만약 집단 내의 이러한 차이들을 고려하지 못한다면, 여성혐오 비판을 중심으로 타오르는 강렬한 운동은 오히려 성별 이분법을 강화한다는 오해 속에 고립될 수 있다. -<여성혐오, 그 후> 중에서

 

‘강간범을 처벌하자’는 구호는 듣는 이로 하여금 강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싸움의 의지를 북돋는다. 그러나 ‘이분법적 젠더 위계를 해체하자’는 말은 전자에 비해 다소 추상적이고 멀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싸우란 말인가? 강간과 폭력과 같은 실질적 위협에 대응하는 싸움은 선명하게 느껴지는 반면, 이 뿌리 깊은 차별의 위계 자체를 부수는 일은 너무 어렵고 힘들게 다가온다. 사실상 이 두 싸움이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님에도 후자의 것은 지나친 이상주의로, 이를 추구하는 것이 마치 현실의 싸움을 가리거나 지우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결코 서로 다르지 않다. 현재 공고히 유지되고 있는 여혐 구조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서있는 서로 다른 맥락 위에서 위계적 젠더 이분법에 도전하고 이를 해체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의 실천을 이어가야 한다.

 

…페미니즘의 어려움은 또 기존의 정체성에 기반하면서도 이를 해체해야 한다는 데 있다. 가령 나는 사회가 ‘여성’에 부여한 억압을 경험한다. 나는 바로 이러한 여성 경험에서 페미니스트가 된다. 그러나 나는 억압을 가져왔던 여성으로서의 경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해체할 때에만 해방된다. 이런 점에서 페미니즘은 기존의 정체성을 확인하거나 인정받는 정체성 정치가 아니라 그 정체성을 해체하는 실천의 과정이다. 내가 가진 작금의 페미니스트 정체성은 완결판이 아니라 잠정판이다. -이현재, “참을 수 없는 ‘페미니스트의 가벼움”(여성신문 6월 14일자 기사) 중에서

 

4. 페미니즘과 함께 살아가기

 

며칠 전 농담 삼아 ‘페미니즘 휴가 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직장은 여름휴가라도 있지, 한국에서 사는 우리들은 휴가를 낼래야 낼 수도 없다고. 이 글을 쓰면서도 혹여나 함께 싸우는 이들에게 마음의 짐을 더 얹는 게 아닌가 많이 망설였다.

 

쓰다 보면 어느새 늘 응원으로 글을 마치게 된다는 내 페미니스트 친구의 글을 나는 너무나 사랑한다. 나 또한 내 자신에게, 또 글을 잃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곤 한다. 나에게도 페미니즘이 자유와 해방, 사랑과 연대였던 때가 있었다. 그 사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임에도, 어느새 지쳐있는 나 자신의 깊은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제 나에게 페미니즘은 또한 생존이다. 숨 쉬는 동안 내내 페미니즘과 함께 살겠다고 마음먹었기에, 긴 삶을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호흡을 가다듬고 멀리 바라보며 걷기로 한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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