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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말하는 것이 사대주의로 치환될 때…
<도영원의 젠더 프리즘> ‘인권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도영원님은 영국 글래스고대학교에서 인권과 국제정치 석사를 전공하고, 현재는 한국에서 프리랜서 인권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영어’가 ‘한국어’에 정치적 올바름을?
얼마 전, 한 K팝 아이돌그룹 멤버가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그가 TV쇼에서 했던 짧은 랩이 문제였다. “내가 왓썹(왔어)”이라는 한국어 가사를 흑인을 비하하는 영어 표현인 “n****, wassup(what’s up)”으로 들은 성난 해외 팬들이 줄을 이어 항의했다. 이에 맞서 한국 팬들은 비(非)영어권 TV쇼에서 들은 말을 자연스럽게 영어 단어로 해석하는 영어사용자들의 오만함을 지적했다.
과연 영어를 세상의 유일한 언어라고 착각하는 듯한 영어권 사람들의 태도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러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SNS계정의 프로필에 Black Lives Matter(흑인에 대한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는 반(反)인종차별 운동)를 써 놓은 시민운동가들인 것을 보면서, 문제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느꼈다.
성난 해외 팬들은 사건의 진상을 알고 난 후에도 ‘사회적 약자를 비하하는 단어로 들릴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할 때에는 각별히 신중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순히 의사소통에서 비롯된 오해를 가지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인권의 이름으로, 국제 사회에서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 정치적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어떤 표현이 공동체에서 정치적으로 부적절하게 여겨지는 것은 종종 그 말이 사용되어온 사회적 맥락 때문이다. ‘N****’라는 단어는 특히 흑인 노예 제도와 인종분리 정책, 그리고 흑인에 대한 유구한 제도적이고 문화적인 차별이 존재했던, 지금도 존재하는 많은 서구 사회에서 이러한 차별의 역사와 깊은 관련을 가지는 표현이다. 따라서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사회의 시민에게, 해당 표현의 부적절함에 대해 적절한 인식을 갖추는 것은 직접 차별을 행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 공동체들 사이에서는 문화의 교류가 일어나고, 역사는 국경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한국 가수의 ‘비하 표현처럼 들리는 가사’에 항의한 해외 팬들은 ‘영어 랩을 사용할 거라면 특정 영어 표현들의 부적절함도 마찬가지로 이해하기를 요구’함으로써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정치적인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기준을 비(非)서구권인 한국인 가수와 팬들도 공유하도록 제안한 것이다.
문제는 주변부 언어가 세계공용어인 영어에 대해 갖는 위상의 차이이다. 언어가 가진 힘의 차이만큼 문화의 전달도 그 방향이 뚜렷하다. 대부분의 경우, 비(非)영어사용자들이 영어사용자의 ‘상식’에 영향을 받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것은 많은 비(非)영어권 사회에서 중요한 자원으로 여겨지고, 그러한 능력을 갖추려면 해당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非)영어권에서 영어사용자의 일반적인 인권의식은 정치적 논의 이전에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갖추어야 할 상식'의 기준이 된다. 비(非)영어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그들에게 고유한 경험을 통하여 합의를 이루어 낸 시민의식이 영어권에서 존중받기 힘든 것과는 상반되는 일이다.
다른 언어를 이해하고 문화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에 문제는 없다. 언어는 분명히 닮고 싶은 문화를 효과적으로 실어 나르는 용기(vessel)가 된다. 주변부 사회의 소수자들은 이것을 전략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내 마누라 내가 팬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라는 한국어 문장을 “She is my wife, I can beat her”라는 영어 문장으로 듣고 비로소 충격적으로 느껴졌다는 한 네티즌의 일화는 ‘선진국’의 인식을 어떻게 억압자에 대항하는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지를 암시한다.
그러나 ‘N****’가 흑인을 비하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기계적으로 외울 수밖에 없는 비(非)영어사용자가 그만한 세심함을 갖추기까지 과연 영어사용자와 동등한 노력을 할까? 서구문화의 영향에 직접적으로 닿아 있지 않는 사람은 이 문화를 체득하지 못한 내가 하는 말이 국제사회에서 의도치 않게 부적절할 수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검열한다. 표준으로 여겨지는 언어를 사용하는 원어민이라면 설령 차별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문화에 대한 감각'만으로 능숙하게 그러한 혐의를 피해갈 수 있는 것과는 상반되게 말이다.
그래서 언어의 위계는 의사소통의 불평등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권의 지리적인 중심과 주변부의 구분은 언어의 권력차로 더욱 공고해진다.
서양의 트렌드는 베끼면서 인권의식은?
그렇다고 한국 사회에 인종차별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특히 K팝 문화의 인종차별을 비판하려 한다면, 유감스럽게도 레퍼런스는 어디에나 있다. 동남아시아인 및 중국인을 희화화하고 비하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유구한 사용은 예능 프로그램을 조금만 보다 보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한국 TV엔터테인먼트 수출 산업이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의 수요에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일차적으로 소비자 기만적인 태도이다. 그런데 더욱 무책임한 일은 제3세계 출신 외국인노동자의 값싼 노동력에 의지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이렇게 미디어가 비(非)한국계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활발하게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인이 아닌 비(非)한국인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타자화하는 TV쇼들은 대중에게 한국계 원어민이 아닌 사람들은 영원한 2등 시민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엄연히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이들의 소외와 주변화를 ‘승인’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서양의 트렌드를 받아들여 가수나 노래, TV쇼 포맷을 베끼고 유사한 이미지를 추구하면서, 이들 문화에서 사회적 약자를 존중하는 방식만큼은 받아들이지 않는 모순적인 태도도 무책임하긴 마찬가지다. 다국적 팬들을 의식하고 상품을 만드는 한국 TV엔터테인먼트 쇼와 기획사들이 아직도 미국 원어민을 인디언이라 칭하고, 흑인을 희화화하는 ‘블랙페이스’를 코미디 프로그램에 등장시키며,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의도적인 무지를 가지고 힙합과 같은 문화를 ‘쿨한 것’으로 전유하는 자세는 너무나 옳지 못하다.
이처럼 다양성에 무지한 K엔터테인먼트 문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일원적이고 폐쇄적인 팬덤 문화는 이들 콘텐츠에 들어간 인종차별적인 코드가 무비판적으로 소비되는 데에 일조한다. K팝 가수의 인종차별 논란이 있을 때, 영어사용자들의 태도를 비판하기 위해 팬덤이 만들어낸 해시태그를 클릭했던 나는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영어사용자들의 자문화 우월주의적 태도를 비난하면서 스스로도 외국인 혐오 발언으로 맞서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한국어를 하지 못하면 한국 가수를 좋아하지 말라든가, 해외 팬들을 ‘외퀴’라는 비하적인 속어로 부르는 상황에서 비(非)한국계 팬들이 한국 사회와 자신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이처럼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문화를 공유하는 팬덤의 일원들이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에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리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국제 사회의 기준이라는 칼바람에 창문을 꼭꼭 닫아 놓고 자기들만의 방어적인 차별 문화를 더욱 공고히 다듬는 것은 외면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일면이다.
▶ 강남구가 해외관광객 유치 목적으로 압구정 로데오역 앞에 조성한 'K스타 로드'. 정부나 기획사가 콘텐츠 제작에 해외 K-pop 팬들의 수요를 고려하는 것에 비해, 다양한 팬들이 요구하는 PC함(정치적 올바름)을 갖추는 데는 소극적이다.
‘인권의 주변부’ 한국에서 인권을 말하기
‘국제 사회에서 한국 여성의 지위 통계 115위’(세계경제포럼 성격차지수). 지수를 매기며 ‘줄 세우기’는 사회적 약자에게 지금도 유효한 무기이지만, 이제는 인권을 평가하는데 더 이상 그런 일관적인 기준이 쓰여도 되는지에 대해 회의가 느껴진다. 탈(脫)맥락화 되고 표준화된 인권의 기준은 일방적으로 인권을 부정하는 변명으로도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권 국가에서 인권을 공부하고 와서 한국 사회에서 인권을 논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특히 이런 주장을 할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스스로의 말하기에 대해서 몇 가지 규칙을 세웠다. 첫째로, 에둘러서 ‘한국보다 서양이 낫다’고 말하지 않는다. 효과는 더 이상 없고 부작용만 낳을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어디가 더 낫다고 말할 때는 해당 문화권의 보편적인 우월함으로 치환하지 않고 대상을 명확히 지정한다. 문화와 제도는 가변적인 것이며 인종의 우월성과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한다. 예컨대, 어느 나라의 임신중단에 대한 정책이 한국보다 더 여성의 권익을 효과적으로 보호한다고 말하는 식이다.
셋째, 나의 당사자적 경험에 기반하여 말한다. 데이트를 했을 때 한국 남성들의 이러한 행동보단 스위스 남성들의 이러한 행동이 더 적절했고 편안했다, 그러므로 한국 남성들에게는 여성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식이다. 현상을 일반화할 수밖에 없다면 적어도 나의 위치를 분명히 하여 내 주장에 맥락을 부여할 수 있다.
서양의 무엇이 우리나라보다 낫다고 말하면, 사대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 반대로 서양의 무엇이 생각보다 좋지 않다고 말하면, 그것을 ‘우리나라 여자들은 호강한다’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편 영어사용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 나는 한국의 열악한 여성 인권이나 유색인종 인권의 상황에 대해 고발하며, 동시에 이것이 비(非)서구 나라의 문화적인 열등함에 대한 오래된 인식을 재생산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럴 때 나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발언하는 사람은 정말로 ‘미끄러운 비탈길’에 서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하나의 문제를 지적하면 그것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문제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일들이 늘 생기는 것이다.
서양과 한국의 인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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