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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한 해 페미니즘 이슈를 꼽아보며…

새해를 맞이하는 2030 페미니스트들의 대화(상)



2015년 메갈리아의 탄생과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이후 페미니즘 리부트(reboot) 현상과 영영페미니스트의 등장, 그리고 끊임없이 지속되어 온 페미니즘을 둘러싼 여러 논쟁 속에서 보낸 2017년.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이 한 해가 어떤 의미였을까?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네 명의 2030 페미니스트와 대담의 자리를 마련했다.


2017년이 며칠 남지 않은 12월 19일(화), 서울 홍대입구역 근처 카페에 모인 네 사람은 초면의 어색함을 금세 이겨내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해를 돌아보며 페미니즘 키워드를 꼽아보고, 앞으로의 사회문화적 트렌드에 대해서도 논의해 본 이 날 대담의 내용을 2회에 걸쳐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 2017년 페미니즘 키워드를 꼽아보는 대담에 참여한 오픈바이, 미성 ⓒ일다(박주연) 


- 시간 내어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각자 다른 분야에 있는 2030 페미니스트들을 모셨는데요. 간략한 자기 소개를 부탁드려요.


남순아: 남순아라고 하고요, 영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픈바이: 전 퀴어-프렌들리(queer-friendly)하고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심리상담소에서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오픈바이라고 합니다.


미성: 미성입니다. 사회적 경제 영역을 지원하는 조직에서 일했고요, 지금은 구직 활동 중입니다.


도영원: 저도 얼마 전에 일을 그만 뒀어요. (다같이 웃음) <일다>에 젠더 프리즘 칼럼을 기고했고, SNS를 통한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프리랜서 인권노동자 도영원입니다.


- 이 자리를 마련한 건, 2017년을 보내야 할 시점이 오면서 페미니스트로서 한 해를 어떻게 마무리하고 내년을 맞이하면 좋을지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었어요. 정초부터 정말 많은 사건들이 있었는데 어떤 것들을 꼽을 수 있을까요?


남순아: 올해는 상반기의 키워드는 탁현민이고 하반기는 애호박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다같이 웃음) 그리고 또 생각해봤는데 영화 <토일렛>, 왁싱샵 살인 사건, 갓건배 살해 협박 사건… 올해 인상 깊었던 일들이 왜 다 이런 것들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올해 좀 힘들었던 것 같아요.


※영화 토일렛: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그린 영화로 강남역 화장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구성과 내용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왁싱샵 살인 사건: 인터넷 방송 BJ가 혼자 일하는 여성이 있는 왁싱(제모)샵을 소개했고, 이후 한 남성이 그 샵을 찾아가 성범죄를 저지르고 여성을 살해한 사건이다. 또 하나의 여성혐오 살인 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다.


※갓건배 살해 협박 사건: 여성 게이머이자 유튜버인 갓건배에 대해, 남성 BJ가 ‘메갈’이라며 살해 협박을 하고 신상을 털고 집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생중계했다. 경찰이 체포했지만 범칙금 5만원을 내고 풀려났다.


▶ 여성비하로 논란이 된 탁현민의 <남자 마음 설명서>, 강남역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의 영화 <토일렛> 포스터, 페미니스트 논쟁을 벌이며 애호박 게이트로 불리게 된 배우 유아인의 트위터


작년 이 즈음에는 ‘XXX_내 성폭력’ 고발 등으로 페미니즘이 힘을 받는 느낌이 있었는데, 올해의 경우에는 그런 고발이 있었고 ‘그럼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저 개인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거예요. 내가 뭘 해야 하지? 하는 생각에 좀 방황을 한 것 같아요.


오픈바이: 전 제일 먼저 대선 과정이 생각나는데요. 대선 토론에서 당시 후보였던 문재인의 ‘동성애 반대’ 발언이 나오고 난 후, 그 때부터 이 사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주변 친구들의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제 인간관계가 정리되기도 했고 좀 힘든 부분이 있었어요.


미성: 올해에 있었던 일 중에 무고죄와 관련한 이슈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작년에 성폭력 고발들이 해시태그를 통해서 있었는데, 그 가운데 법원에서 무혐의 처분이 난 사건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무혐의 처분=무죄’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많은 사람들이 당황했던 것 같아요. 법의 영역에서 혐의없음(증거불충분)이라고 해서 정말 문제가 없었다는 건 아니잖아요. 몰카 찍는 성범죄 전담 판사도 있고, 미성년자를 강간한 40대 남성에 대해 (사귄 거라며) 무죄라고 판결한 사건도 있죠.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 해시태그(#Me too)를 보면서 느꼈던 게 ‘한국이 정말 빠르구나’ 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미 작년에 ‘XXX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있었죠. 그 때 저도 좀 고양되었던 느낌이었어요. ‘우리가 더 많아질 수 있구나’라는 느낌이 있었죠. 물론 우리가 다 같은 건 아니지만.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피로도가 올라간 것 같아요. 저도 올해가 힘들게 느껴졌는데, ‘한샘 사건’(신입사원 성폭행 사건)도 그렇고… 계속해서 (성범죄) 사건들이 해결되지 않고 이어졌기 때문이죠.


도영원: 제가 느낀 것과 다들 비슷한 것 같은데, 저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서 조금 마음이 식은 부분이 있어요. 작년, 재작년까지는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끼고,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완전히 동화되어서 함께 가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이제 조금 거리를 두게 되었달까. 왜일까 생각해 봤는데, 이 움직임의 다음을 보고 싶었던 같은데 그걸 찾기가 어려웠던 것 같아요. 정치적으로 무언가 변화하고 사람들의 생각이 변화하고 그래야 하는데, 그게 느껴지지가 않았고…. 고양감을 불러오는 것까지만 계속 생산되고 있다는 느낌을 좀 받았어요.


그 안에서 제 위치가 어디인가를 봤을 때 오히려 소외감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전 젠더플루이드(genderfluid, 유동적인 젠더), 에이로맨틱(Aromantic, 無로맨틱)인데 이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이 잘 알려져 있지 않거든요. 성소수자 혐오 관련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그 혐오에 대항하는 게 통쾌하고 좋았는데, 저의 성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에 대해서는 그런 반응을 보기가 힘든 거죠. 무언가의 세력을 만들기도 힘들고… 그런 일들을 좀 겪고 나니까 ‘내가 변화를 봤었는데, 그 변화가 진짜 일어나고 있나?’ 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 2017년 페미니즘 키워드를 꼽아보는 대담에 참여한 도영원, 남순아 ⓒ일다(박주연)


- 그래도 조금의 변화가 있진 않았나요? 페미니즘이 가져온 긍정적인 영향들이요.


미성: 페미니즘에 대한 인지도는 조금 더 높아진 것 같아요. 그러나 저의 경험을 생각해 보면 아직 시민단체, 시민사회 중간지원조직과 출연기관에서도 ‘직장 내 성평등’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 같아요. 세대 간의 인식 차이도 꽤 크고요. 다양한 루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교육해야 할 것 같은데 아직은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요. 다만 예전에 비해 의무적으로나마 하고 있죠.


또 한편으로 제가 느꼈던 건, 성평등 교육이 지침이나 매뉴얼만 의무적으로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 이런 말은 하면 안 되고 이런 말은 쓰면 안 됩니다 같은, 조심해야 하는 것들만 전달하는 거죠. 주의사항만 잘 지킨다고 해서 성평등한 환경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인식이 바뀌어야 하니까요. 양질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오픈바이: 페미니즘이나 여성 이슈에 대한 반응이 변하고 있는 것 같긴 해요. 요즘 웹툰 <며느라기> 인스타 댓글을 보면, 예전에 비해 반응이 호의적이거든요. 전에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만 나왔던 페미니즘 관련한 이야기들이 이제 인스타에서도 이야기되기 시작한다는 점도 변화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페미니즘 관심 없었던 친구들도 점점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그래서 전 조금씩 변화되고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다만 사람들이 페미굿즈를 사고 각자 가시화하고자 했지만, 변화가 생각보다 빨리 일어나지 않아 조금 의기소침해 있는 상태 같아요.


※며느라기: 결혼한 여성이 며느리로서 겪는 다양한 이야기를 다룬 웹툰(@min4rin)이다.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얻으며 인기 웹툰으로 성장했다.

▶ 웹툰 <며느라기>의 장면 중 ⓒ며느라기 페이스북 facebook.com/min4rin


- 변화는 더디고, 기대를 품었던 페미니스트들이 조금씩 지쳐가는 것 같네요. 이런 상황 속에서 각자 어떤 고민들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더 얘기해주세요.


남순아: 전 ‘찍는페미’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지금은 활동을 안 하는 상태인데요. 그러고 나니 소속된 곳이 없으니까 페미니즘 관련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동료들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저도 다음 단계를 고민하고 있는데요. 피해를 호소하며 ‘힘들어요’ 라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무엇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어떤 변화를 가지고 와야 하는가? 등에 대한 고민을 해요. 개인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에 대해서도요.


미성: 젠더감수성 교육을 진행하면서 고민한 건데, 대부분의 페미니즘 세미나나 강의는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잖아요. 그런데 단체/기관에서 전체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자발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잘 기획해야 해요. 모두에게 친절히 떠먹여줘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페미니즘이 조금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여러 단계의 교육이 개발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페미니즘 관련한 교육을 들으면서 고민했던 것도 같아요. 계속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그 다음 스텝을 고민하는 사람들도 꽤 본 것 같아요. 스터디 모임을 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갈증도 있고요. 올해 작년에 비해 페미니즘 관련 책이 두 배 이상 팔렸다는 기사가 나왔더라고요. 전 이런 통계가 페미니즘 책의 종수가 늘어난 이유가 더 크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잠시 했어요. 분명 몇 년 전에 비하면 많아졌지만, 최근 우리(페미니스트)의 범위가 정말 넓어지고 있는가에 대해 조금 의문이 들기도 해요.


-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네 분이 올해 고민한 내용이 비슷하네요. 2015년부터 페미니즘이 다시 부각되면서 많은 여성이 용기 내어 다양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체감 상 크게 바뀐 것은 없는 것 같은데 해결되지 않는 논쟁은 심화되고… 과연 내가 해야 하는 건 뭘까, 라는 생각이 깊어진 한 해였군요. 미처 이야기하지 못한 올해의 키워드나 고민이 있다면?


오픈바이: 전 ‘매일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고 싶어요. 올해 초,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을 때 했던 페미니스트 대통령 선언은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후에 일어난 일들과 최근 애호박 게이트까지 보면서 ‘페미니스트 선언’이라는 게 진정성이 사라지는 걸 목격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누군가는 페미니즘을 자신을 포장하는 포장재로 쓰는 게 아닌가? 라고 생각되는 거죠.


도영원: 정확한 키워드를 뽑은 건 아닌데, 저는 새 정부가 들어서고 이전보다 더 힘든 부분이 생긴 것 같아요. 예전에는 SNS에서 여성이나 성소수자 관련된 정책 등에 대해 잘못된 부분을 짚으면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요. 올해는 (정부에 대해) 어떤 비판적 발언을 하면 왜 그런 말을 하냐는 식의 공격을 받는 일들이 있었어요. 한두 번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그런 말을 저 스스로도 안 하게 되었어요. 정신적 소모도 너무 크고 상처받기도 하고 그래서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게 맞는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더 힘든 것 같아요. 굉장히 많이 나아진 것도 아닌데,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는 힘들어졌으니까요.


또, 요즘 ‘페미니즘이라는 기호’에 대한 쟁탈전이 생긴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요. 예전에는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도전 같았는데, 이제는 오히려 나도 페미니즘하고 너도 페미니즘하고 이러면서 내가 하는 페미니즘이 옳아, 이게 진짜 페미니즘이야,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되고 그 안에서 세력이 나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오픈바이: 하나 더 얘기하고 싶은 게 ‘나중에’(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가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장을 묻는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들에게 ‘나중에’ 발언할 기회를 주겠다고 말하고 참가자들이 ‘나중에’를 연호한 것에서 비롯된 용어)라는 키워드에요. 최근에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나중에’라는 말이 나오는 것 같거든요. 그게 또 다른 소수자를 배제하는 것 같아서 좀 걱정스러워요.


2017년 연말, 페미니즘은 지금 어떤 위치이고 페미니스트인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걸 고민하는지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한 해의 사건들을 되돌아보니 유쾌한 이야기가 나오진 않았지만, 현재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며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또 서로의 고민을 나누며 공감을 얻기도 했다. 한숨을 돌리고 그 이야기를 정리한 후, 2018년은 어떤 한 해가 될 수 있을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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