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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를 쓰는 밤

<나를 구성해온 일들의 기록> 첫 번째 이야기


※ ‘줌마네’에서 지난해 9월 <인간적으로 돈버는 힘 기르기: 나를 구성해 온 일들의 기록>이라는 이름의 캠프를 열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거나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그래서 가시화되지 못한 여자들의 일 경험에 이름을 붙이고 당사자 스스로 그 의미를 찾아내기 위한 자리였다. 그 1박2일간의 이야기를 참가자였던 오보의 시선으로 담아낸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서른 살의 한 여자가 이력서에는 담을 수 없었던, 지난 시간들 속의 자신과 마주하는 과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력서의 채워지지 않는 빈 칸


이력서를 쓰다보면 어느새 밤이 된다. 이름까지는 딱 적기 좋다. 다음은 생년월일과 나이. 벌써 서른이다. 자격증은? 없고, 경력에 해당되는 건 딱 하나, 나머지는 다 경험들뿐이다. 한 칸 한 칸 다음 항목을 읽어 본다. 가치, 포부, 미래, 계획, 좌우명, 상상, 자유롭게 서술…. 이런 단어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한참동안 아무것도 적지 못한다. 세상이 나를 보는 눈과 마주하는 시간들. 이력서 앞에서 난 내가 자신이 없다.


난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은 생각하지도 않고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첫 영화는 다큐멘터리였는데 중간에 주인공의 군 입대로 엎어졌다. 다음엔 영화제작 모임에 들어가 영화를 만들었다. 조명, 촬영, 연출, 소품, 편집 등 영화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했다.


사실 난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일로 멀어지고 혼자가 됐다. 교실에서 투명인간이 된 후 ‘왜 사느냐’라는 물음을 가졌고 그게 긴 우울증의 시작이었다. 그 물음에 답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지구의 저 내핵 속으로 서서히 내려가는 내가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영화제작 현장을 찾은 건 살아보겠다는 나름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다 3년 전부터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어중이떠중이가 될 것 같아서다.


그날도 이력서를 쓰고 있었다. 채워지지 않는 빈 칸을 보며 시름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영화 스크립트 알바를 하면서 알게 된 ‘줌마네’에서 여자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캠프가 있다며 나를 초대했다. 나는 고민도 않고 가겠다고 했다. 그게 뭐든, 혼자서 끙끙 앓는 이 시간들을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후의 토요일 아침, 난 캠프장으로 향하는 노란 버스에 몸을 실었다.


당근전


버스에 올라타 낯선 이들과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하나 둘 빈자리가 채워지고 두어 시간이 지나 버스는 한적한 마을에 도착했다. 주위엔 멋지고 큰 나무들, 넓고 넓은 하늘, 그리고 메밀밭. 어느 드라마 속 도깨비가 된 것 마냥 아련해졌다. 난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왔을까.


▶ 숙소에 도착한 후, 캠프 참가자들은 부엌으로 가서 함께 점심을 준비했다. ⓒ줌마네


부랴부랴 한옥 숙소에 짐을 두고 부엌으로 가서 함께 점심식사를 준비했다. 요리하며 서로 얼굴을 익히는 자리 같았다. 채식밥상을 연구한다는 유이의 진두지휘 아래 부엌은 복닥복닥했다. 모르는 얼굴들 틈에서 내가 과연 하룻밤을 잘 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그럼에도 나는 태연하게 당근전을 부쳤다. 손목스냅을 이용해 한 번에 전을 뒤집으며 칭찬까지 들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열장 넘게 전을 부치는 동안 몇몇이 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달갑지 않았다. 이 더위에, 옷에 당근 기름까지 묻혀가며 식사를 준비하다니! 나는 왜 여기에서까지 이렇게 열심인가.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저 사람들은 왜 다들 즐거워 보이는 거지?


식사 후 캠프에 온 스무 명의 여자들이 작은 강당에 둘러앉았다. 나는 약간 긴장한 채 나눠준 팸플릿을 읽었다. 제목은 “줌마네 캠프 2017: 인간적으로 돈 버는 힘 기르기. 나를 구성해온 일들의 기록.” 그제서야 난 이곳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알게 되었다. 곧 진행자 오솔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들려왔다.


“이력서나 자기소개서에 사용하는 프로필 중에서 제일 센 거 하나씩만 돌아가면서 얘기해 볼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무기 중 가장 강력한 걸로 하나씩만.”


운전면허는 없지만 7년간 공부해서 얻은 박사학위가 있다는 오늘, 노무사 자격증이 있는 은희, 사회복지사2급 자격증이 있다는 꽃바람, 생협에서 일하며 식생활강사 자격증을 땄다는 아사. ‘증’은 없지만 IT디자이너인 리나, 작은 사회적기업을 창업한 씩씩이, 출판사 대표이자 게스트하우스 운영자인데다 여행 책까지 엮어 펴낸 유이, 해외에서 레스토랑을 런칭한 나윤, 본인이 연출한 작품명을 말하는 영화감독 가람까지….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뭐라도 말해야만 했다.


“저는 제가 참여한 다큐멘터리가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거든요….”


내가 연출한 것도 아니고, 스태프로 참여한 단 한편의 영화가 나의 가장 강력한 무기라니.


가벽 뒤의 시간


“좀 전엔 가장 강력한 프로필을 이야기했는데, 그런 ‘사회적 경력’들만이 우리를 구성해온 일들이었을까요? 이 캠프는 이런 질문에서 시작됐어요. 이제부턴 세상이 알아줄 것 같진 않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혹은 자꾸 떠오르는 일터에서의 한 장면을 나눠봤으면 좋겠어요.”


다시 마이크는 참가자들에게로 넘겨졌고 꽃바람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2007년이었어요. 제가 둘째를 낳고는 마음이 좀 급했어요. 돈벌이 같은 것에 대해서요. 남편이 회사생활 잘하고 있었는데도 조바심이 나서 새벽에 우유배달을 1년 정도 한 적이 있어요. 그날은 추운 겨울이었어요. 두 살 된 애를 자전거 뒤에 앉히고 근처 빌라촌으로 수금을 하러 갔어요. 초인종을 누르고 사람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갑자기 애 생각이 나서 괜찮나 하고 돌아봤는데, 뒤에서 조그마한 아이가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거예요.”


꽃바람은 요즘도 가끔 그때의 순간이 떠오른다고 했다. IT 디자이너 리나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의 기억을 이야기했다.


“거의 매일같이 새벽 두세 시에 퇴근했어요. 하도 야근들을 하니까 밤만 되면 회사 앞에 택시들이 대기를 하고 있을 정도였죠. 그때는 너무나 힘들어서 몸이 많이 아팠어요.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악순환의 연속이었는데, 다들 그러고 다니시니까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 회사를 나오고 나서야 이건 아니란 생각을 했죠.”


당연한 것. 순간 낮에 땀 흘리며 부친 당근전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나도 나를 육체적, 정신적으로 혹사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뭐든 열심히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심지어 남의 영화에 내 돈까지 써가며 밤샘 촬영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 줌마네 캠프 2017. 둥그렇게 둘러앉은 참가자들  ⓒ줌마네


몇몇 참가자들은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준 장면들을 떠올렸다.


“대학교 다닐 때 도서관 책 정리 알바를 했어요. 책장이 앞뒤로 있고 햇빛이 희미하게 들어오는 작은 책상이 있었는데 거기는 사람이 잘 앉질 않았어요. 그쪽으로 카트를 밀고 가서 일하는 척하면서 계속 책만 봤던 기억이 나요.”


나윤은 분노와 억울함에 가득 차있던 시절, 그 순간들이 자신을 다독여줬다고 했다. 배우 겨울의 말이 이어졌다.


“몇 년 전 상업영화 주인공역의 스탠딩 배우를 했는데요. 선배님이 오시기 전에 제가 먼저 동선을 체크하는 일이었어요. 슛이 들어가고 북적북적하면 저는 세트장에 세워진 큰 가벽 뒤에 빠져있거든요. 거기 바닥에 앉아 있으면 어두운 공간으로 빛이 새어 들어와요. 그 시간이 제일 평온했던 것 같아요.”


나를 드러내 보이지 않아도 되는 가벽 뒤의 순간들. 겨울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나도 한 장면이 떠올랐다. 바쁘게 돌아가는 영화촬영 현장에서 혼자 멀리 떨어져 소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목장갑을 낀 채 근처 화단에 걸터앉아 촬영현장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불안을 진정시키곤 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잊고 있던 순간들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졌다.


첫 번째 이야기 시간이 끝나고 다 같이 짧은 산책을 했다. 이곳에 왜 왔는지는 진즉에 까먹었고 당근전을 부치며 순식간에 밀려왔던 고단함도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그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의 출처가 무엇인지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정리하지 못한 채 저녁식사를 끝내고 또다시 이야기하는 시간을 맞았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필자 소개] 오보: 간간이 시나리오 작업을 하며 지역신문 모니터링, 스크립트 알바, 라디오 방송녹음, 다큐멘터리 연출부, 영상회사 편집부 등의 일을 해온 구직자.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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