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페미니즘은 어디에나 필요하다

<이상성욕자? 선량한 변태들의 목소리> 3화


※ 음란함, 이상함, 혹은 폭력적이라는 선입견의 베일에 덮인 채 야동을 비롯한 미디어에서 왜곡된 이미지로 재현되고 있는 bdsm에 관하여, 기록노동자 희정 님이 성향자들을 만나 그 목소리를 담은 기록을 4회 연재합니다. -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bdsm 성향 여성들의 발목을 잡는 것


여성들은 어릴 적부터 수많은 ‘변태’를 만난다. 골목 으슥한 곳에서 하의를 벗고 기다리는 남성,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대가로 성기를 만지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남성, 엉덩이를 치고 도망가고, 불법촬영물을 몰래 찍어 유포시키는 남성…. 불쾌감을 표현하기 위해 ‘변태’라 지칭하기도 하지만, 실은 ‘일반’ 남성들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만연한 폭력이다.


bdsm 성향의 여성들 또한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사회 일반의 ‘성적’ 위험과 카테고리를 같이 한다. 협박, 불법촬영, 물리적 폭력, 합의 없는 강제 행위. 심지어 이 여성들은 성적 기호를 드러낸, 그러니까 (세상 언어로) ‘문란한’ 여성들 아닌가. 정보를 얻으려고 만든 sns 계정 메시지함에는 살색 사진들이 가득 찬다. “걸레”라는 욕과 함께, “너랑 자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한다.


연인 관계에서 유출된 ‘몰카’ 범죄도 “못 잡아요”라며 성의를 보이지 않는 공권력이 인터넷을 통해 만난 사람과의 bdsm 행위가 찍힌 불법촬영물에는 다르게 반응할까. 더 성의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경찰이라니_가해자인줄’ 해쉬태그가 떠오른다.


▶ bdsm은 지배와 복종, 속박과 훈육, 가학과 피학의 롤 플레잉, 감금, 본디지 등 다양한 성적 활동과 상호작용을 가리킨다. (위키백과 참조)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안전이별’이라는 단어가 일상어가 된 요즘이다. 이성애 관계에서 상상할 수 있는 위험은 여성의 발목을 잡는다. 마찬가지다. bdsm 성향 여성들의 발목을 잡는 것도, 상상할 수 있는 위험이다. 원래 발목 잡으려고 강조하는 것이 ‘위험’이기도 하다.


짧은 치마를 못 입게 하는 건 위험 때문이다. 밤길을 못 걷게 하는 건 위험 때문이다. 다양한 형식의 연애나 성애를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그녀’들에게 bdsm 같은 건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위험 때문이다.


실재하지 않는 여성들이 생겨난다. 무법의 도로를 운전하다가 나는 차 사고처럼, 폭력을 당하고 더는 운전을 하지 않는 여성들이 생겨난다. 흔히 bdsm 세계에서 30~40대 여성을 보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라고들 한다. 그 나이가 되기 전에 운전하기를 멈춘다. 많이들 사라진다. (나이 든 여성이 자신의 욕망과 성적 기호를 드러내는 것이 쉽지 않은 현실도 원인이긴 하다.)


“나이가 있는 사람 중에 롤 모델로 삼을만한 사람이 없어요. 나이 든 사람이 여기에 있다 그러면, 주로 남자. 이상한 사람, 위험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서… 편견을 가지게 되는 것도 있고. 나는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좀 막막해요.”(아람/ 새디스트)


무엇이 폭력인가


인터뷰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이들 대부분은 20대였다. 궁금해서 물었다.

“나중에 30대나 40대가 되어도 (bdsm) 플레이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답이 돌아왔을 때, 내가 늙었음(?)을 깨달았다.

“나랑 섹스를 해줄 사람이 없으면 자위를 하면 되는 거고요.”

교복 차림의 가연이 해준 이야기다.


“어렸을 때부터 제 몸을 알아 왔고, 저의 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제 몸을 어떻게 다루면 제가 만족을 얻을 수 있는가를 배워왔기 때문에. 타인을 통해 충족하지 않아도 제 몸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나랑 안전한 섹스를 할 수 있는가도 알고요.”


자신과의 안전한 섹스를 할 줄 안다는 가연은 세상이 성에 대해 걱정할 수 있는 대부분의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섹스하는 청소년 여성. 그냥 섹스만 하나, bdsm 성향자다.


어릴 적 애니메이션을 보면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혼나는 장면이 나오곤 했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좋았다. 흥분된다고 할까나. 가연은 자신이 무엇에 끌리는지 알게 됐다. 마조히스트. 피학에 끌렸다.


그런 가연은 지금 청소년 인권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계기가 재미있게도 ‘교사체벌에 반대’하면서부터라 했다. 모순되어 보이지만, 실은 당연하다. 가연은 모든 폭력에 끌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용인하고 합의한 가학 플레이에만 끌린다. 체벌은 동의한 적 없는, (혹은 강제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권위에 의한 폭력이다.


가연은 두 사람이 합의한 가학/피학 플레이에는 ‘이상 성행위’란 낙인을 찍으면서, 결코 합의한 적 없는 체벌에는 ‘사랑의 매’라는 이름을 붙이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폭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교육해야 해요.”


주체가 되지 말라는 교육


세상이 걱정하는 위험 또한 마찬가지다. 강간당할 것을 조심하라고 하지만, 무엇이 강간인지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았는데 행해지는 모든 순간이 강간이잖아요.”


그런데 동의와 합의란 무엇인가? 가연은 학생 신분으로 동의의 ‘주체’가 된 적이 없다고 했다.


“저는 대한민국에서 자라는 여성청소년들이 한 번도 존중받는 느낌을 배운 적 없다고 생각해요.”


‘학생이’, ‘여자가’ 그리고 ‘여학생이~’라는 말을 들으며 십수 년을 키워졌다. 요구되는 것은 의무 뿐. 얌전히 공부할 의무, 밤늦게 돌아다니지 않을 의무, 드세거나 튀지 않을 의무. 동의한 적 없는 의무가 보호라는 이름으로 주어진다. 보호 대상은 동등한 합의 파트너가 될 수 없다. 세상은 가연에게 주체로서, 동의하고 결정하고 합의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존중에서 배제된 것은 청소년만이 아니다. 여성 또한 마찬가지다. 이 사회에서 독립적 개인이 될 수 있는 지위는 ‘남성시민’뿐이다.(남성일지라도, 시민 자격을 획득하는 데는 정상성, 경제적 지위, 노동력 유무 등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 특정 젠더에 속하지 못하면, 시민권을 얻지 못하면, 보호(또는 배제) 대상으로 취급된다.


“어디 여자가!”도 보호의 다른 이름이다.(“어디 여자가 밤늦게 돌아다니냐.”) 여성을 동등한 합의 파트너로 보지 않는 세상은 ‘동의’의 조건을 모른 척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동의 여부’보다는 ‘저항 여부’로 성관계의 강제성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들의 동의는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그리고는 화살을 돌린다. 왜 저항하지 않았니. 왜 그곳에 따라 갔니. 왜 여자임을 드러냈니.


무법의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하면, 네가 다친 것은 운전대를 잡은 너의 책임이라고 운전자에게 화살을 돌린다. 섹스하는 청소년에게도, bdsm 성향자에게도 말한다. 위험을 겪기 싫으면 운전하지 말라고. 그래, 운전자가 사라지면 사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도로가 안전해졌다고 할 수 있을까? 도로는 여전히 폭력의 공간인 채 남아 있는데. 다치지 않고 운전할 수 있도록, 도로에 새로운 질서가 필요한 게 아닐까?


▶ 베를린의 BDSM 공동체 ‘슈벨라 지벤’의 인물들과 일상을 자연스럽게 담아낸 다큐멘터리 <Violently Happy>(파올라 칼보 감독) 예고편 중 한 장면. 관련 기사: ‘고통과 쾌락’을 실험하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다 http://ildaro.com/8332


우선 내 몸에 먼저 귀 기울여야 한다


가연은 존중에 대해 한마디 더 보탠다. 자신은 bdsm을 통해 존중을 배웠다고.


“내가 나의 몸을 알고, 상대도 나의 몸(과 감정)을 존중한다는 느낌.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저에겐 존중과 bdsm은 같이 가는 거예요. 웃기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철저하게 같이 간다고 보거든요. 합의가 전제되어야 하는 관계이고, 합의가 전제되기 위해서는 많은 걸 고려하는 섬세한 존중이 필요하니까요.”


합의와 동의는 ‘나랑 할래?’ 따위에 ‘예스’라고 답하는 것이 아니다. 가연은 “존중을 bdsm에서 배웠어요”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bdsm이라는 특정 행위가 아니라 자기 몸의 감정과 욕구를 안 후 상대와 합의하는 과정이라는 뜻이리라.(더불어 세심하게 고려하는 것 중 하나는 자신을 보호할 방안이다. 파트너를 결정하는 데도 신중을 기한다.)


우선 나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거절할 것인가 동의할 것인가 판단할 수 있다. 학교가 가르쳐준 적 없는 것을 배운 데는 이유가 있다. 가연은 자라온 환경이 남달랐다고 했다. 페미니스트 부모를 둔 덕분이다.


“저는 자위를 일찍 배웠고. 잘 배웠어요. 페미니스트에게 강의를 통해 배웠거든요. 저의 쾌감을 일찍 찾은 편이에요.”


어릴 적부터 페미니즘을 접했다. 세상 소리보다 내 몸에 먼저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런데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가 열리고, 더는 페미니즘을 접하는 것이 독특한 환경이 아니게 됐다. 인터뷰 중 페미니즘은 한 번씩은 나오는 단어였다.


관계와 폭력에 관한 답을 ‘페미니즘’에서 찾다


복숭아는 온라인 여초카페와 트위터 등 sns을 즐겨하는 ‘평범한’ 20대다. 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성향이 서브미시브-마조히스트라는 것 정도.


서브미시브의 역할은 도미넌트의 지배와 훈육에 따르는 것. 처음에는 파트너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곧 알게 됐다. 그게 아니구나.


“그 전까지는 관계를 위해서 내가 참아야 할 부분이 있고, 행위에 있어서도 파트너가 원하는 대로 이끌려가는 방식이었는데… 알게 된 거죠. 내가 싫으면 어떤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구나.”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을 접하고 나서부터다. 몇 해 전 ‘#나는_페미니스트입니다’ 해쉬태그 운동을 트위터를 통해 접했다. 복숭아도 이때부터 페미니즘 서적을 하나둘 읽게 됐다. 페미니즘이 알려준 것은, 나의 동의가 없이 이뤄지는 모든 관계가 강제 행위이자 폭력이라는 사실. 20대가 훌쩍 넘어 알게 됐다. 세상은 이 단순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복숭아는 파트너(레드샤크)와 함께 인터뷰에 응했는데, 인터뷰 내내 누구도 말을 독점하지 않은 커플이라 인상 깊었다. 의외로 드문 일이다. 특히 이성애 커플 사이에서는. 말은 권력인지라, 관계에서 누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가는 인터뷰를 할 때 자주 티가 난다. 때로는 인터뷰가 둘 사이에 권력 경합장이 되기도 한다.


잠깐 엿본 그 평등함은 두 사람이 애써 온 결과다. 그 노력의 원천을 복숭아는 페미니즘이라 했고, 레드샤크는 “bdsm에는 남자-여자는 필요없다”는 말로 표현했다.


“성별 역할이 여기서는 통하지 않도록 한다는 주의였어요. 페미니즘을 알기 전부터.”


이런 원칙을 가지고 커뮤니티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bdsm도 현실에 기반을 두고 행해지는 일. 성별 뿐 아니라, 나이 권력 등 사회적 지위에 따른 위계가 성향자 간의 원치 않는 불평등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커뮤니티 안에서 이를 예방하려 여러 시도를 해 왔다고 한다. 그러다 평등에 대해 말하는 페미니즘을 만나게 됐다.


bdsm 영역에 페미니즘이 필요하다는 말은 다른 이들에게서도 들을 수 있었다. “왜 필요하죠?” 라고 묻자, 복숭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페미니즘은 어디에나 필요해요.”


bdsm 가시화: 우리 존재를 지우지 마세요


이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뒤, 트위터 계정에서 ‘#bdsm_가시화’라는 해쉬태그를 보게 됐다. 복숭아와 제리 등 인터뷰에 응한 이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흥미롭게 지켜봤다.


누군가 bdsm 성향과 관계성을 포르노그래피로 소비하는 내용의 글을 트위터에 올린 것이 논란의 발단이 됐다. 그에 대한 반박은 해쉬태그 운동으로 이어졌다. 해쉬태그를 단 트위터 내용의 일부를 옮겨본다.


<우리는 합리적인 계약과 합의를 중시하며 평등한 관계를 기본으로 두고 있습니다. 단지 유흥으로 소비하기 위해 들어오지 마세요>


<저를 포함한 다수의 에세머들은 정말 많이 깊이 고민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우리 존재를 지우지 마세요>


여기서 존재를 지우지 말라는 얘기는, bdsm 문화 안에 페미니즘이 필요하다고 말한 이들에게 비난이 쏟아졌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비난의 내용은 이러했다. bdsm이 강간신화 등 남성폭력 문화를 강화하는데, 그걸 행하는 이들이 페미니즘을 말하는 건 모순이라는 것. 그리고 이들이 bdsm을 운운할수록 뭣 모르고 위험에 빠져들 피해자들이 생겨난다는 것.


이러한 주장이 힘을 얻는 까닭은 현실 폭력에 있다. sm 플레이에서 사용되는 도구 중 하나가 채찍이지만, 아내가 남편에 의해 채찍질 당하지 않게 된 것도 백년이 지나지 않았다. 현대에 와서 포르노그래피 산업이 재현하는 폭력의 모습이 bdsm 이미지와 겹쳐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bdsm 자체는 폭력이 아니다. 가연의 말처럼 무엇이 폭력인지는 구분되어야 한다. bdsm을 논하지 말라고 한다면, 성향자 여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bdsm 행위를 하지 말거나, 조용히 음지에 숨어있을 것. 그건 도움이 안 된다. 단지 성향자들의 안전에만 도움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안전은 ‘차단’이 아닌 ‘안전할 권리’에서 온다


차를 없앤다고 안전하지 않은 도로가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한쪽 도로를 통제한다고 ‘우리’가 무사해지는 것도 아니다. 사고가 난다는 저 도로는, 실은 ‘무법’이 아니다. 우리가 ‘일반’이라 부르는 도로의 질서 속에 있다.


‘안전’은 통제와 차단을 뜻하지 않는다. 안전은 안전할 수 있는 권리로부터 온다. 존중하고 존중받는 법을 배울 권리, 진정한 동의와 합의의 주체로 설 권리. ‘안전할 권리’를 요구하고 행할 수 있는 주체들의 권리. bdsm 성향자 여성들도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권리를 말하고 있다.


bdsm 성향자들의 #가시화 운동은 별 호응을 받지 못하고 끝났다. 그네들은 숨겨졌으나 도로가 안전해진 것은 아니다. 이들의 목소리를 닫아 둔다고 폭력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얼마 전 출간된 책 이름처럼, 여성의 권리는 낡은 세상의 질서에 관해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이다. 폭력을 재생산하는 기존 세계의 낡은 질서를 깨트리는 시도들은 어디에나,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필요하다.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