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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하면서 ‘탈(脫)연애 선언’을 한다고?

탈연애선언 좌담회 “정상연애 탈주하기” 이야기



독자들에게 TMI(Too Much Information의 준말, 굳이 알 필요 없는 정보를 전할 때 쓰는 용어)를 털어놓자면, ‘다시’ 연애를 시작했다. 다시라는 말을 강조한 이유는 이 연애가 처음이 아니라는 걸 알리기 위함이 아니라, ‘결국 또다시 연애를 시작하고 말았다’는 여러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원치 않은 연애를 시작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겠지만 나도 ‘망한 연애’를 여럿 거쳤다. 하지만 그 망한 연애들 사이에서 ‘연애가 왜 망했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곧바로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곤 했다. ‘옛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잊는 거’라고 믿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계속 연애를 하고 있어야 내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변의 측은한 시선을 받기 싫었다는 점도 분명 한몫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새도 없이 선뜻 내민 손을 잡거나, 내 손을 뻗어 상대를 낚아채 오는 과정 혹은 그걸 위한 ‘썸’을 지난하게 겪었다. 그런 관계에 지쳐갈 즈음 페미니즘을 접했고, 페미니즘을 통해 내 연애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관계에 무슨 문제가 있었고, 무엇이 폭력적이었는지, 나와 상대에게 어떻게 상처가 되었는지 인지하는 힘을 얻은 거다.


그렇지만 ‘나는 페미니스트이다!’라고 외치고 난 후에 시작한 연애도 생각보다 잘 굴러가진 않았다. 너무 오만했던 걸까, 아직 부족한 걸까. 그 연애가 끝나고는 오랜만에 ‘싱글라이프’를 즐겼다. 혼자 할 수 있는 일, 혼자 즐길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차츰 ‘연애를 안 해도 괜찮지 않을까? 연애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다녀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 삶에서, 혹은 내 관계에서 ‘연애라는 방식’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은 언제나 자리하고 있었다. 같은 걸 보고도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논쟁을 하거나, 어떻게 똑같은 생각을 했냐고 맞장구치고 싶었다. 때론 누군가의 뜨거운 입김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순간의 짜릿함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연애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때때로 연애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건 대체 뭔지, 그놈의 연애가 뭐길래. 그 답을 찾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이 “무수한 ‘정상연애’에 실패하고 나서야 다른 식의 관계 맺기를 상상하게 되었다.”라는 <탈연애선언>을 접한 후 그 앞에서 멈춰 섰다.



탈연애선언 좌담회 “정상연애 탈주하기”를 알리는 포스터 ©탈연애선언


고백하건대, 모순적이게도 연애를 또 망치지 않고 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날 ‘탈(脫)연애’라는 주제로 이끈 거다. 그래서 4월 30일 저녁, 서울 망원동 오네긴 하우스에서 열린 탈연애선언 좌담회 “정상연애 탈주하기”에서 나올 이야기가 궁금해 찾아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가지고 있던 복잡한 생각과 욕망은 이제 ‘연애를 하면서도 탈연애 선언을 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정상연애 탈주하기” 좌담회에서 진솔하게 각자의 경험과 고민을 이야기하며 탈(脫)연애의 의미와 의의를 공유해 준 패널들의 발언이 나를 ‘탈연애선언’으로 이끌었다.


연애는 사적인 것? 연애 안팎의 ‘구조’를 보라


“정상연애 탈주하기” 좌담회에는 비혼지향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 홍혜은 대표, 디자이너 수리, 시인 희음, 여행자 윤다온, 칼럼니스트 도우리 씨가 패널로 나와 발언했다. 탈(脱)연애는 말 그대로 연애에서 벗어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비(非)연애가 아니라 탈(脱)연애라고 하는 이유를 들어보자.


탈연애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미(未)혼’(아직 혼인하지 않음) 취급하는 일에 반대하는 정치적 용어 ‘비(非)혼’에서 파생한 ‘비(非)연애’에서 다시 파생한 용어”(홍혜은)다. 넓게 보면 비연애와 탈연애 모두 “가부장제를 유지하려는 거대한 흐름, ‘정상시민’이 되기 위해 ‘정상가족’을 이루고, 이를 위해 ‘정상연애’를 하고, 이를 위해 ‘정상성’을 가꾸고, 이를 위해 여성이 동원되고 희생되는 것에 저항하는 흐름”(도우리)이다.


다만 ‘비연애’가 연애를 안 하는 상태를 강조하거나 연애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단절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면, ‘탈연애’는 좀 더 연애라는 관계를 들여다본다. 복잡한 미로에서 길을 찾는 과정이랄까? 무모하게 덤볐다가도 빠져나갈 길이 어디에 있는지 예상하고 분석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하는 그런 과정 말이다.


탈연애선언 좌담회 패널로 참석한 비혼지향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 홍혜은 대표, 디자이너 수리, 시인 희음, 여행자 윤다온, 칼럼니스트 도우리. 홍혜은, 수리, 도우리는 “탈연애선언” 공동대표다. ©일다


그런데 ‘그렇게 비연애, 탈연애라고 할 정도로 연애가 나쁜 거냐?’ 반문할 수 있다.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는 일이니 연애는 당연히 힘든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힘든 연애를 왜 자꾸 하라고 하는지 또 의문이 생긴다. 연애의 다음 단계로 여겨지는 결혼도 마찬가지다. ‘다 참고 사는 거지’라며 한숨 쉬거나, ‘좋은 시절 다 끝’이라며 울부짖는 걸 농담 소재로 끊임없이 반복하면서도 국가와 지자체까지 나서서 여성과 남성이 만나 결혼에 이를 수 있게 장려하는 소개팅 자리까지 만드는 이유는 뭘까?


“두 사람이라는 짝짓기-연애 관계는 기존 ‘인구의 효율적인 유지 관리’와 관련”되어 있다. “연애 당사자들로 하여금 서로에 대한 ‘부분 돌봄’을 자발적/자연적으로 감당하고 수행하도록 할 수 있고, 또 그 행위가 보다 적극성을 띠게 될 때라면 두 사람을 잠정적 재생산 그룹, 즉 혼인 집단으로 편입시킬 수도 있기 때문”(희음)이다. 즉, 연애는 보통 사적인 관계로 치부되지만 알고 보면 “인구 관리와 생명정치 차원의 오래된 국가적 기획”(희음)이라는 설명이다.


사실 이 연애 앞에는 보이지 않는 괄호가 있다. 그 괄호 안에 들어있는 건 ‘정상’이라는 말이다. 연애를 할 수 있도록 장려되는 사람, 심지어 연애가 ‘허용’되는 사람은 모두가 아니다. “이성애자이고, 출산능력이 있고, 비장애인이며, 미혼(또는 비임신 상태)이며, 비(미등록)이주민인 ‘젊은’ 여성과 남성들”(희음) 뿐이다. ‘정상적’으로 재생산과 양육 그리고 돌봄을 해낼 가부장 가족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그렇게 ‘추려진’ 사람들 사이에도 더 뛰어난 ‘정상성’을 획득하고 더 좋은 ‘정상연애’를 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게다가 모든 과정은 오롯이 개인 책임이다. 연애를 못 하면 ‘고자’라고 비하되고, 연애/결혼 과정에서 데이트폭력이나 가정폭력을 겪어도 감내해야 한다.


‘정상연애’의 목표가 가부장제 국가를 위한 ‘정상결혼’과 ‘정상가족’을 이루기 위한 것임에도 연애는 사적인 걸로 취급되고,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까지 개인이 끌어안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연애 문제는 개인의 차원이라기보다 연애 안팎의 구조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도우리)는 걸 깨닫게 되면 비연애/탈연애가 필요해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 우리 사회에 낭만적 사랑의 이데올로기는 뿌리 깊지만, 그 사랑과 연애는 모두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나의 반쪽? 1:1 관계가 정말 기본값이어야 할까


흥미롭게도 이미 세상에는 그 ‘정상연애’를 비켜나가는 연애들이 있다. 그것도 많이. “이성애자이고 출산능력이 있고 비장애인이며 미혼(또는 비임신 상태)이며 비(미등록)이주민인 ‘젊은’ 여성과 남성들”이 아닌 사람들의 연애 말이다.


그런 연애 중 하나인 동성 커플의 연애는 국내에선 ‘정상결혼’과 ‘정상가족’ 구성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연애들도 ‘정상연애’가 겪는 문제들을 복사하는 경우가 많다. 연애에 성공하기 위해 꾸밈노동을 해야 하고, 스펙을 관리해야 하고, ‘선택과 사랑을 받기 위한’ 과장된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동성 간임에도 관계 내에서 불평등이 생기기도 하고, 데이트폭력/성폭력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유가 뭘까.


연애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고 각자의 취향과 성적 욕망도 개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의 욕망과 그에 따른 선택들은 모두 사회가 ‘그러해야 한다’고 규정해 놓은 범주 안에서 구성될 것이 아닐까?”(윤다온)


설사 완전한 ‘정상연애’ 기준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많은 이들이 최대한 ‘정상연애’에 가까워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정상연애-정상결혼-정상가족’은 통치 권력이 만든 아주 오래된 견고한 틀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와 어떻게 사랑해야 하고 그 결론은 어디로 항해야 하는지를 정해놓은, 보이지 않는 격자들. 즉 이 사회가 규정한 ‘정상연애’의 문법”(윤다온)은 사람들과 사회를 장악하고 있다. 그 문법을 깨기 위해 해야 하는 질문 중 하나는 이거다. 1:1 관계는 정말 기본값이어야 하는가?


나의 ‘반쪽’을 찾아야 하고 그럼으로써 내가 완성된다는 연애의 환상은 ‘1:1 관계, 독점연애’라는 굳건한 틀을 지속해 오고 있다. 하지만 뒤집어 얘기하면 나는 반쪽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꼭 필요로 하고, 누군가에게 종속될 수 있으며 또한 나의 반쪽을 소유할 수도 있다는 관념을 파생시킨다. 바로 이 ‘종속과 소유’에 대한 착각이 관계의 불평등과 집착, 폭력 등을 야기한다.


때문에 독점연애를 벗어나자는 주장은 ‘아무나 만나자’거나 ‘여럿을 만나자’는 얘기가 아니다. “연애가 기존 로맨스 문법에서 이야기하는 달콤하고 환상적인 ‘하나 되기’가 아니라 이 개별 주체들의 협상, 조정, 소통의 과정이라는 걸 드러내자”(윤다온)는 의미다.


독점연애의 경우 주어진 대본에 따라 적당히 연기할 수 있지만, 다자연애의 경우 각 주체들의 요구에 맞춰 새롭게 각본을 짤 수밖에 없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내 욕망을 스스로 이해하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연애 상대가 ‘말을 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나’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서 설득과 대화, 타협의 대상, 즉 정치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다자연애에서는 보다 쉽게 드러난다.”(윤다온)


다자연애의 가능성이라는 건, 다른 관계들을 제치고 연애를 최우선으로 두면서 그것만을 특별하게 여기는 형태의 ‘독점연애’를 벗어나서 다양한 관계망 속에 나를 둘 때, 내가 정말 원하는 사랑/연애가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할 틈이 생긴다는 것이다.


지난 3월 8일 여성의 날에 맞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진행되었던 <탈연애선언>의 탈연애선언 퍼포먼스 중. ©일다


가부장제 사회의 지형과 언어를 바꾸는 탈연애선언


솔직히 다자연애란 게 정말 얼마나 잘 실천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고, 말 자체에 반감이 들기도 한다. 다자연애를 무책임한 연애, 혹은 프리섹스 개념으로 잘못 사용해 온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혹은 사회가 그렇게 이름 붙였던 탓이기도 하다.


BDSM(지배와 복종, 속박과 훈육, 가학과 피학 성향의 롤 플레잉, 다양한 성적 활동 및 상호작용을 가리키는 용어)도 마찬가지다. 맞고 때리는 걸 좋아하는 변태들이라는 사회적 낙인이 워낙 강해서, “연애가 사회가 규정한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역할극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버린 사람들이 그 역할극이라는 걸 오히려 사유하고 가지고 노는 일”(수리)인 BDSM의 의미를 지워버렸다.


항문섹스에 중독된 문란한 동성애자들이라는 낙인도, 동성 간의 사랑과 연애를 사회적으로 배척해야 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동시에 여성 동성애자의 섹슈얼리티는 아예 삭제시켰다.) 하지만, 이제는 그 잘못된 의미를 바로잡고자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통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정상연애’ 개념이 잘못된 것이지, 동성 간의 연애가 잘못된 게 아니라고 말이다.


이처럼 탈연애를 향한 과정은 독점관계와 이성애 중심주의를 기반으로 유지된 가부장제 사회에 개인들이 오랫동안 빼앗겼던 언어를 찾아오는 과정이기도 하다. “정상연애에서 탈주하기로 결심한 우리에게는 더 다양한 고민과 언어가 필요하다.”(홍혜은)


탈연애의 의미와 지향을 접하고 나면 ‘연애하면서 탈연애 선언을 하겠다’는 말의 의미를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황당하게 들리기도 하는 이 선언이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지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도 일부 달려 있다. “나 개인이 아무리 ‘짱 쎈 페미’로 바뀌어봤자 계속 가부장제 안에서 맴돌게 된다. 우리가 점이 아니라 선으로, 면으로 그리고 입체적으로 연결되어 정상연애에 대해 질문하고 이 가부장 사회의 지형을 바꿔나가야 한다”(도우리)는 <탈연애선언>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날 수 있기를! (박주연)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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