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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의 일상은 그냥 회복되지 않는다

“피해와 생계 사이” 연속 집담회를 시작하며


※ 성희롱 성폭력 피해자의 ‘생계’와 ‘생존’을 키워드로 삼아 성폭력의 구조를 들여다보는 <피해와 생계 사이> 기사를 연재합니다. <피해와 생계 사이>는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성폭력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대안을 모색하는 연속 집담회로, 5월부터 매달 새로운 주제로 총 5회 열립니다. 이 기획의 의미를 알리는 첫 기사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김신아 활동가가 작성하였습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미투’는 성폭력이 개인 탓, 운나쁜 탓이 아님을 알렸다


미투(#MeToo) 운동의 의의 중 하나는 성폭력이 가해자 개인의 성적 일탈 또는 정신적인 문제이거나, 피해자가 운이 나빠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한국 사회가 인지하게 했다는 점이다.


사실 성폭력 말하기에 ‘미투 운동’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에도, 국내 온라인에서는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으로 각계각층 성폭력이 고발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2019년 체육계 내 성폭력까지 멈추지 않는 말하기 운동으로 이어졌다.


‘oo계 내 성폭력’이라는 명명 자체가 성폭력 사건이 피해자/가해자가 소속되어있는 공간의 권력 구조와 문화, 규범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이 반영된 것이었다. 많은 시민들이 권력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노동자/종사자/구성원으로서 미투 운동에 여론을 보태며 해당업계에 대한 성찰과 변화를 촉구했다.


반성폭력 운동에서 계속 이야기해왔던, ‘성폭력은 권력 관계의 문제’라는 말의 의미를 미투 운동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경험과 감각 그 자체로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 2018년 3월 22일,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여 청계광장에서 진행한 행사 ‘대자보광장: 너에게 보내는 경고장' 중에서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김지은씨는 왜 ‘노동자이고 싶다’라고 말했을까


작년 9월 20일, 민주노총과 연대단체들이 공동 발간한 추석 선전물에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김지은씨의 글 <‘노동자 김지은’이고 싶습니다>가 실렸다. 최초의 여성 수행비서로서 열심히 일했던 자신의 모습이 오히려 성폭력 가해자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용되고 ‘피해자다움’의 잣대로 평가당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김지은씨의 글은 이렇게 끝난다.


“다시 노동자가 되고 싶습니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부당한 지시를 하지 않는 상사와 함께하고 싶고, 어려움을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는 동료들과 일하고 싶습니다. 제가 다시 노동자가 되려면 한참의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어쩌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언젠가 꼭 다시 불리고 싶습니다. 노동자 김지은이고 싶습니다.”


서울여성노동자회에서 분석한 2016년 ‘직장 내 성희롱 문제 제기로 인한 불이익 조치 경험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 발생 후 피해자의 72%가 퇴사한다. 반성폭력 운동 현장에서 활동하는 우리는 이런 상황들을 계속 만나게 된다.


일터 성희롱을 문제 제기한 이후에 피해자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해 더이상 일할 수 없게 되는 경우, 소송(특히 역고소)에 대응하기 위한 비용이 경제적 압박으로 작용하는 경우, 피해 회복을 위한 시간도 비용도 투여하기 어려운 경우, 학업을 중단하게 되는 경우, 주거와 같은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 이런 상황은 서로 겹치며 악순환처럼 이어지기도 한다. 피해자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생계가, 생존이, 일상이 어려워진다.


성폭력 피해자는 사회적, 경제적 주변부로 내몰린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지난해와 올해 <일상회복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자에게 회복을 위한 활동 비용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신청자들은 그림을 배우거나, 반려동물 사료를 사거나,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그 비용을 썼다. (일상회복 프로젝트 참여 후기: stoprape.or.kr/874)


▲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일상회복 프로젝트” 2019년 사전워크숍에서 참가자가 그린 그림 (한국성폭력상담소)


많은 사람들의 일상은 매일 일하고 주변 사람을 돌보고 관계를 맺어 가는 일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를 입거나, 문제를 제기한 이후 피해자들의 일상은 이를 유지하기 위한 자원을 점점 잃어간다. 직장이나 학교 혹은 가정 내 권력 관계 안에서 발생한 성폭력이 피해자에게 생계와의 갈등을 일으킨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봐 온 우리는 성폭력 피해자가 일상을 살아가는 자원을 잃는 상황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계와 생존을 키워드로 <피해와 생계 사이> 집담회를 2년 연속 기획하게 되었다.


작년 열린 집담회에서는 기업 내, 연극계 내, 학교 내, 정치계 내 성차별과 성폭력 실태에 관해 이야기 나누었다. 각 주제에 대해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 이가희, 페미니스트 연극인 연대 황나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여성위원회 오름, 국회 여성정책연구회 이보라 대표가 발표해주었는데, 업계의 위계 구조와 성별 권력 관계가 얽혀있는 점은 공통적이었다.


한편 업계마다 다른 점도 있었다. 학교의 경우, 남학생들이 여성 교사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경우도 있어서 ‘성별 그 자체가 권력 구조’이기도 했다. 연극계의 경우, 연극인들의 생계가 어려운 가운데 연출가의 성폭력을 문제 제기할 때 다른 동료들의 기회까지 박탈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등 열악한 연극 환경과 권력 구조가 맞물려 있었다. 국회의 경우, 여성 보좌관에 대한 성차별과 성폭력을 '정무적 판단'이라며 정당화하는 등 정치계는 압도적인 남초집단인 동시에 기성세대 중심이기도 했다.


민우회 이가희 활동가는 르노삼성자동차 성희롱 사건 피해자와 조력자에 대한 사측의 ‘불이익 조치’에 대해, 사용자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 사례를 공유했다. 이를 통해 직장/업계 내 성폭력 문제에 있어서 ‘권한을 가진 자’의 책임을 강조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집담회는 소속된 환경을 바꿔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 변화를 만들어갈 힘을 주고받는 시간이었다.


▲ 2018년 4월 12일,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주최한 집담회 “피해와 생계 사이, 직장 내 성폭력을 말하다”에서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 이가희 활동가가 발표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2019년, 올해 <피해와 생계 사이> 집담회에서는 각 업계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피해자가 사회구성원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전반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앞으로 다섯 차례 이어질 집담회의 주제와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회구성원으로서 배제되지 않을 권리를 찾자


신입사원, 프리랜서, 계약직이나 아르바이트 신분으로 일을 하는 여성들은 직장 내/업무관계 상 지위가 낮거나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성폭력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고, 성폭력을 겪어도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워지기도 한다. 1회 집담회는 “노동은 비정규, 성희롱은 정규?”라는 제목으로 불안정 노동을 하는 여성들이 경험하는 성폭력/성차별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성폭력의 책임은 권력 관계를 이용한 가해자에 있음을, 그것을 용인하였던 성차별적 조직문화에 있음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연구소 울림의 <성폭력 피해상담 분석 및 피해자 지원방안 연구> 결과를 보면, 학생 신분의 피해자들이 피해를 말하지 못했던 이유는 “교수, 선생이라는 지위는 공적, 사적을 넘나들며 학생들의 ‘미래’와 ‘꿈’을 저당잡고 막강하게 ‘군림’”하기 때문이었다. <피해와 생계 사이> 2회 집담회 “지도받을 권리, 지배받지 않을 권리”에서는 교육/훈련과정에서의 성폭력을 주제로 이야기할 예정이다. 그리고 성차별/성폭력 없이 학습하고 훈련할 수 있는 환경, 방해 없이 자신의 재능과 노력만큼 성취할 수 있는 환경을 모색해본다.


혐오와 차별, 그로 인해 사회적으로 배제된 상태에 이르는 것은 성폭력에 더 쉽게 노출되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성폭력 피해 이후 피해자가 회복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시스템에 접근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3회 “혐오와 차별, 배제와 성폭력”(가제) 편에서는 사회적으로 배제된 성폭력 피해자들이 마주하는 복합적인 차별과 피해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들이 어떤 사회적 자원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지, 사회는 이들을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 고민해본다.


성폭력 피해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피해로 인해 끊긴 수입(생계),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투여되는 소송/의료비용과 같은 경제적인 이유에서부터 정서적 소외와 주변 관계로부터 단절, ‘피해자다운지’ 감시하는 시선과 같은 사회적인 이유도 있다. 4회 “성폭력 피해자의 생존비용”(가제)에서는 피해자가 일상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는 이유를 살펴본다. 그리고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하는지 알아본다.


▲ 2018년 8월, 다섯 번째 열린 ‘성차별 성폭력 끝장 집회’에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참여했다.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성폭력으로 인해 상처받은 상태, 고통스러운 상태, 혹은 회복된 상태, 고통에서 벗어난 상태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을까. 여성주의 반성폭력 운동은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말과 같이 성폭력의 상처를 영구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보는 관점, ‘더럽혀졌다’는 말로 피해자의 몸을 가부장적 시선에서 손상된 몸이라고 보는 관점,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를 병리화하는 관점에 반대해왔다. 그러나 한편, 현장에서는 피해자들로부터 의료적 심리적 지원 요청이 더 많아지고 있다고 체감하기도 한다.


<피해와 생계 사이> 집담회 5회차는 “성폭력 고통과 회복을 넘어”(가제)를 주제로 ‘고통’과 ‘회복’에 대한 담론을 확장하고자 한다.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통념과, 치유와 회복에 대한 선택지가 좁은 현실 등을 짚어볼 예정이며 ‘피해 이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제도적 안전망이 무엇인지 모색해본다.


이번 집담회는 성폭력 피해자를 사회경제적 주변부로 몰아내는 힘이 무엇인지, 성폭력 피해자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배제되지 않고 살아갈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같이 모여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 과정이 생존자들과 성폭력 피해에 공감하고 연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만나 이야기하고 연대 관계를 맺는 과정이 되기를 기대한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피해와 생계 사이> 집담회는 여성가족부가 후원하는 ‘2019년 양성평등 및 여성사회참여확대 공모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다. 각각 다른 주제로 5월부터 10월까지(7월 제외) 매월 1회 진행되며, 참가 신청은 매회 한국성폭력상담소 홈페이지(sisters.or.kr)를 통해서 할 수 있다. 

첫 집담회 “노동은 비정규, 성희롱은 정규?”(네 명의 여성노동자와 함께 떠들며 '직장 내 성희롱'의 구조를 부수는 참여형 토크쇼)는 5월 9일 저녁7시 서울 마포 오네긴하우스에서 열린다. 문의 02-338-2890, ksvrc@sister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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