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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닳도록 일하다 버려진 우리는 인간기계였나?

성진씨에스 여성노동자 19명의 손 그림과 시



부당한 공장 폐업을 철회하라며 1년이 넘도록 싸우고 있는 성진씨에스 여성노동자들과 만났다. 금속노조 남부지역지회가 주최한 ‘투쟁 사업장 글쓰기 교육’에 강사로 참여한 것이다. “내 이야기, 내가 직접 쓰기”라는 제목으로 4월 첫 주부터 3주간 진행한 교육 첫 시간에 조합원들과 함께 ‘손으로 시 쓰기’를 했다. 각자 종이에 자신의 손 모양을 그리고, 그 손으로 현장에서 일했던 것을 떠오르는 대로 적은 뒤 다시 짧게 시를 쓰는 방식이었다.


이 글은 성진씨에스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더 많은 여성들, 시민들이 알고 연대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전체 조합원 19명이 쓴 토막글과 시, 그리고 수업 시간에 조합원들이 한 말과 집회에서 나눈 이야기를 모아 구성한 것이다.


▶ 성진씨에스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의 손을 그리고, 그 손으로 일했던 현장을 떠오르는 대로 적어 짧게 시를 썼다.


자동차 시트커버에 담긴 여성노동자의 피와 눈물


“죽기 살기로 하자.”

우리가 지난해 3월 31일까지 일했던 서울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 성진씨에스(CS) 작업장 벽에 현수막으로 걸려 있던 사훈이다.


성진씨에스는 우리가 만든 자동차 시트커버를 코오롱글로텍에 납품했고, 코오롱글로텍은 다시 현대‧기아자동차에 납품했다. 쏘나타, 그랜저, 모하비에 들어갔다. 이 시트커버에는 성진씨에스 여성노동자가 흘린 피와 눈물이 있다. 여기서 ‘피와 눈물’은 상징이나 은유가 아니다. 오늘도 우리가 만든 시트커버를 씌운 자동차가 도로 위를 달린다.


사장과 관리자는 “죽기 살기로 하자”라는 말을 수시로 외쳤다. 그런 말과 글이 너무 무서웠다. 모두 죽기 살기로 일했다. 그 시간이 짧게는 10여 년이고, 길게는 20여 년이다.


시트커버는 가죽으로 만든다. 그래서 박음질하는 바늘이 일반 재봉틀 바늘보다 훨씬 굵다. 입사해서 손에 일이 익기까지는 거의 1년이 걸리는데, 일하는 사람 모두 굵은 바늘에 한 번씩은 손을 박히고, 찍히고, 찔렸다. 낯설고 힘든 일에 익숙해지고 나서도 바늘이 손톱을 박는 일은 여전했다. 작업자가 손놀림을 잘못해서가 아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제품,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산더미처럼 쌓이는 일감, 작업자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과도한 생산량을 사장이 요구한 탓이다.


전체 노동자가 맡은 공정을 다 거쳐야 자동차 한 대분 시트커버가 완성되는데, 사장은 두 달에 한 번 홀수 달마다 생산량을 한 대씩 늘렸다. 1년에 석 대 정도면 모를까 여섯 대씩 늘리면 몸에 무리가 온다. 늘어난 생산량에 간신히 몸이 적응되었다 싶을 즈음 또 생산량이 늘어나는데 다시 몸을 적응시키기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하지만 사장은 노동자의 체력이나 건강은 고려하지 않았다.


생산량이 늘면 일하는 인원도 따라서 늘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2010년에 135명 정도 되는 인원이 밤 9시까지 일해 하루 90대분을 생산했는데, 2012년 구로구에 있던 회사를 금천구로 이전하면서 사장은 인원을 83명으로 줄이고 일하는 시간도 줄였다. 83명이 저녁 6시 30분까지 일해 하루 생산한 양이 140대 분량이었다. 그 양은 점점 늘어 공장이 휴업하기 직전인 2018년 3월 말에는 총 176대까지 늘었다. 그러면서 생겨난 이득은 고스란히 사장에게 돌아갔고, 노동자인 우리에게는 그만큼 강도 높은 노동과 갖은 질병이 돌아왔다. 최저임금을 받는 우리가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야근 수당이 사라지면서 수입도 대폭 줄어들었다.


일하다 바늘이 부러지면 등에서 식은땀이 날 정도로 아찔했다. 바늘이 손톱을 콱 박으면 깜짝 놀라서 눈물이 쏟아졌다. 놀란 마음에 손을 빼다가 손톱 끝이 너덜너덜해지기도 했다. 눈물이 후드득 쏟아져도 일은 멈추지 못했다. 꽂힌 바늘을 부러뜨리고 손톱을 빼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 천으로나 칭칭 동여매거나 반창고 하나 붙이고 다시 일했다. 회사에서는 이만한 일로는 병원에 보내주지도 않을뿐더러, 내 손 아프다고 병원에 가면 옆에 앉은 다른 동료가 몇 배 더 고통스럽게 일해야 하니, 다치면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야 하는 당연한 일도 성진씨에스에서는 욕심이고 사치였다.


물건을 올려놓는 받침대 다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모서리에 찍혀 갈비 두 대 정도는 부러지거나, 허리가 주저앉아 일어서지 못하는 정도가 되어야 병원에 갔다. 회사는 무재해 사업장으로 포장하려고 우리가 다치면 산업재해 처리 대신 공상(합의금)으로 처리했다.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는 동안도 언제 출근하느냐고, 어서 출근하라고, 전화로 성화를 부렸다.


▶ 성진씨에스 여성노동자들과 함께한 “내 이야기, 내가 직접 쓰기” 교육 중에서 <손으로 시 쓰기>


가죽을 다루다 보니 어려운 점이 많았다. 가죽이 말리지 않게 양옆으로 팽팽하게 벌리고 앞으로 당기며 박느라 손에 무리가 왔다. 저리고 통증이 심했으며, 자고 일어나면 아침마다 손이 부었다. 관절염에 손가락이 휘고 울퉁불퉁해졌다. 추운 날이면 인대가 나갔던 손목이 시렸다. 손톱이 저절로 닳고 잘 부러져 손톱 깎을 일이 거의 없었다. 손톱 끝에 살이 다 드러나 쓰라렸다. 가죽에 손을 베이는 건 늘 있는 일, 건조하고 거칠어진 손은 핸드크림도 소용없었다. 손가락 사이가 갈라져 피가 줄줄 나기도 했다. 가죽을 물들인 염색약 때문에 손에 알레르기 증세가 생기기도 했다. 가죽 냄새와 재봉틀 기름 냄새는 집에까지 따라왔다. 퇴근하고 저녁밥을 지을 때면 먼저 손을 주방세제로 구석구석 씻었다. 까맣게 물든 손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꺼려졌다.


택총을 쥐고 일하다 팔꿈치가 아파 병원에 가니 테니스엘보라고 했다. 재단과에서 일하는 사람은 가위질을 많이 해 손가락이 튀어 나오고 팔목이 저리고 아팠다. 원단이 모자란다고 하면 사장과 관리자는 “왜 모자라느냐? 어디에 팔아먹었느냐?”며 도둑 취급했다. 자재과에는 단 한 명만 배치해 무거운 물건을 혼자 들고 옮기게 했다. 등과 허리가 아팠고, 어깨 관절이 나갈 정도였다. 도저히 혼자 할 일이 아니라서 인원 충원을 요청했지만, 사장은 무시했다.


우리 성진씨에스 여성노동자는 모두 손이 닳도록 열심히 일했다. ‘손이 닳도록’ 역시 은유하는 말이 아니다. 어느 날 은행에 갔는데 지문이 없어져 일을 볼 수 없었다. ‘나’를 증명할 지문이 가죽에 닳아, 오랜 노동에 닳아 사라졌다.


어디 손만 아팠을까. 다리도 문제였다. 아침 8시부터 저녁 9시 야근까지 우리는 종일 서서 일했다. 그냥 두 발로 똑바로 서서 하는 일이 아니라서 문제가 더 심각했다. 왼쪽 다리 하나에 무게 중심을 싣고 오른쪽 발로 재봉틀 페달을 딸깍딸깍 밟았다. 그런 자세로 하루 내내, 일 년 내내, 그리고 몇 년을 재봉틀 앞에 섰다. 다리와 발목이 부어오르고 아팠다. 족저근막염은 기본이고, 무릎에 찬 물을 빼러 병원에 다녀야 했다. 10년을 일했다면 온전히 1년을 치료받아야 나을까 말까 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우리는 기계였다. 인간기계처럼, 아무리 힘들어도 재봉틀 앞에만 서면 자동으로 몸이 움직였다. 입으로는 불평하면서도 노동에 길든 몸은 하루하루 주어진 생산량을 악착같이 채웠다. 고개 숙이고 일만 열심히 했다. 집에 돌아온 밤, 통증이 한 번씩 몰려올 때마다 참고 견디고 혼자 울먹일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내 두 손으로 일할 수 있어 고마워하며 살았다. 성진씨에스에서 일하던 사람은 어디든 다른 시트커버 생산 사업장에 가서도 바로 일할 수 있지만, 다른 데서 일한 사람은 성진씨에스에 와서는 일하기 어렵다고 할 정도로 우리는 열심히 일했다. 작업장 벽에 걸린 현수막 사훈대로, 죽기 살기로 했다.


생산량은 더 늘리고 상여금은 없애고


▶ 회사의 부당 폐업에 항의하며, 원청 코오롱글로텍 본사 앞에서 피켓 시위하는 성진씨에스 노동자들  ⓒ금속노조 서울남부지역지회 성진씨에스분회


우리 가운데 경력이 20여 년인 사람들은 원청 사업장인 코오롱글로텍에서부터 일했다. 사장도 코오롱글로텍 관리자였다. 1999년 코오롱글로텍에서 성진씨에스로 분사해 나오면서, 사장은 원래 있던 상여금 550프로도 없애고 자녀 학자금도 없앴다. 딱 최저임금만큼만 주었다. 그리고 2014년에는 5만 원 주던 교통비도 없애고, 화장실 청소 용역 비용을 아끼려고 우리에게 청소를 시켰다. 두 명씩 조를 짜서 청소시켰는데, 그렇다고 일하는 시간에 영향을 받으면 안 되니 쉬는 시간 10분 안에 화장실 청소를 마치게 다그쳤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넘으면 관리자가 소리를 질렀다.


설과 추석에 주는 돈 10만 원이 상여금을 대체했다. 그 돈을 주면서도 사장은 우리를 우롱했다. 우리를 다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떡값을 줄까요, 말까요?”

해마다 생산량이 늘었고 단 한 번도 일감이 줄어든 적이 없었는데도 사장은 늘 돈이 없다고 했다. 대출 받아서 떡값을 준다며 생색냈다. 그 떡값을 받으려면 일을 더 잘해야 한다고 했다.

“떡값을 줄까요, 말까요?”

우리에게 대답하라고 했다.

“주세요.”

우리가 답하면 소리가 작다고 했다. 더 크게 말하라고 했다.

“주세요!”

50대 여성노동자들을 앞에 두고, 10~28년 일한 경력 여성노동자들을 앞에 두고, 사장 자신을 먹여 살리고 재산을 불려준 여성노동자들을 앞에 두고, 사장은 떡값 10만 원으로 희롱했다.


정해진 야근 외에도 불시에 연장근무를 시켰다. 퇴근 뒤에 잡아 놓은 일정이 있어 연장 근무를 못 하겠다고 하면, 한 명 한 명 사장실로 불러서 한다고 대답할 때까지 들들 볶았다. 집에 일이 있어도 “회사가 우선이고 가정은 둘째”라며 윽박질렀다. 한 달에 두세 번 토요일에도 일했는데, 만약 빠지게 되면 일당을 물어내야 했다. 그날 일당이야 안 받는 게 당연하지만 “너 때문에 생산량에 차질이 생겼으니” 생돈을 물어내라는 데는 기가 막혔다.


오래전에 나온 노동가요 중에 “공장엔 메뉴판이 필요 없단다/아침에 단무지 점심에 단무지/그래도 남으면 저녁도 단무지/높은 사람들아 와서 한번 먹어 보렴/너나 한번 먹어봐/…” 하는 노래가 있다는데, 성진씨에스에서는 단무지 대신 콩나물을 넣으면 된다. 회사에서 먹는 한 끼 점심에 콩나물국, 콩나물무침, 어묵볶음이 전부였다. 집에 가서 잘 먹고 회사에서는 주는 대로 먹으라고 했다.


저녁 7시 야근 들어가기 전에는 빵을 나눠 주었다. 종일 강도 높은 일을 하느라 허기진 배에 빵을 주었다. 그나마 사장은 제과점 빵을 주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돈을 줄일 속셈으로 슈퍼마켓에서 파는 빵을 사다 주었다. 크기도 아주 작은 빵이라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항의하자 한 개씩 더 주었다. 물 한 잔 떠 놓고 그 빵을 먹으면서 옆에 사람과 잠시 이야기라도 하면 “언제 일하려고 노닥거리느냐”며 화를 냈다.


우리는 일하는 조건이나 대우에 만족하지 않았지만, 그대로 일했다. 마음속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묵묵히 일만 했다. 내가 지금 다니는 회사라서, 소리 내지 못했다.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나간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어떠한 불평불만도 참고 속으로 삭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장이나 회사의 잘못도 모른 척 눈감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 올해 3.8 세계 여성의 날 전국노동자대회에 소복을 입고 참가한 성진씨에스 노동자들 ⓒ금속노조 서울남부지역지회 성진씨에스분회


노동조합을 만들자 공장 문이 닫혔다


그런데 2017년 12월, 회사는 점심값 8만 원을 없애고, 연차 15일도 공휴일로 대체하고, 생산량을 더 늘리겠다고 했다. 최저임금이 오른 탓이라고 했다. 억울했다.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돈도 돈이지만, 이제까지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생산량을 늘려 강도 높아진 노동에 온몸을 쥐어짜 일했는데, 여기서 더 생산량을 올린다면 그건 우리보고 죽으라는 소리였다. 도저히 받아들이지도, 양보하지도 못할 문제였다.


이 문제는 누구 입바른 사람이 하나 나서서 사장한테 항의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노동조합이 필요했다. 이제까지 노동조합은 우리와 상관없는 줄 알았고, 텔레비전 뉴스에서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모습을 보면 ‘왜들 그러나’ 했는데, 우리가 살려면 노동조합이 필요했다. 알아보니 금천구에 금속노동조합 남부지역지회가 있었다. 우리는 작년 1월 8일 성진씨에스분회를 만들었다. 전체 노동자 80여 명 중 47명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움직임을 눈치챈 사장과 관리자는 아침저녁으로 조회, 종례시간마다 “단체행동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라며 협박했다. 일하는 동안에도 수시로 현장에 내려와 계속 협박했다. 그래도 우리는 굴하지 않고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러자 사장은 당장 회사 문을 닫고 사업을 그만두겠다고 나왔다.


주 1회 교섭을 진행하면서 우리는 최저임금을 주되 고용 안정을 보장하고, 생산량을 올리되 50대 여성노동자들의 체력에 맞게 생산 대수를 조정하자고 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회사는 3월 31일, 노동자 전원 정리해고를 통보하고 한 달간 휴업에 들어갔다.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라고 판정받았지만, 회사는 우리를 복직시키지 않고 4월 말 끝내 폐업을 신청했다. 성진씨에스에서 벌 만큼 돈을 번 데다, 나중에 다시 회사 하나 만드는 일쯤은 별 어려운 일이 아닐 터. 사장은 하루아침에 80여 명 노동자의 일자리를 없앴다.


수십 년 골병들며 일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를 최소한으로나마 보장받고 싶다는 마음으로 노동조합을 만들었건만 단 몇 달 만에 거리로 내쫓겼다.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만드는 건 헌법에도 보장된 권리인데, 사업주가 이렇게 나오는 게 과연 정당한 일인가. 대한민국헌법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제33조 1항에 분명히 나온다.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협약권을 가진다”라고.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회사 문을 닫아버린 이 폐업은 부당하다.


▶ 성진씨에스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의 손을 그리고, 그 손으로 일했던 현장을 떠오르는 대로 적어 쓴 시.


그 많은 생산으로 번 돈은 다 어떻게 했는지, 설과 추석에 주는 떡값도 대출을 받아야 한다고 하고, 직원들 월급도 집을 팔아서 주는 거라고 고마워하라는 듯 생색내던 사장은 실은 은행에서 한 번도 대출을 받은 적이 없다. 아니, 대출받을 일도 전혀 없었다. 사장은 그간 벌어들인 돈을 모두 다른 가족 앞으로 돌려놓았다.


우리가 일자리에서 쫓겨난 지 어느새 1년이다. 사장은 자신이 그동안 “사장님” 소리를 듣고 살았는데 우리 때문에 이제 “할아버지” 소리를 듣고 산다며 우리에게 화를 낸다. 우리가 길거리로 내쫓긴 1년이 어땠는지 사장은 과연 짐작이라도 할까. 사장은 우리가 일할 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안하무인으로 나왔고, 우리 이야기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대화도 교섭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지난해 5월 16일부터 원청인 코오롱글로텍 본사 앞으로 가서 집회와 피켓 시위를 한다. 코오롱글로텍은 원청으로서, 그간 성진씨에스에 작업 지시를 내리고 관리를 해 왔다. 납품단가로 이득을 취한 부분도 작지 않다. 코오롱글로텍은 성진씨에스에 하청 주던 물량을 다른 사업장으로 빼돌리며 이 폐업을 수수방관했다. 우리가 노동조합을 만들고 얼마 안 있어, 코오롱글로텍 본사 직원들이 성진씨에스 현장에 와서 우리가 일하는 작업 과정을 사진으로 찍고 동영상으로 세세히 촬영해 갔다. 빼돌린 물량 중에는 어렵고 까다로운 작업공정으로 성진씨에스 노동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물량을 넘긴 다른 하청 사업장에서 설명만으로는 작업을 해내지 못하자, 우리가 일하는 모습을 일일이 찍어 간 것이다.


우리는 원청인 코오롱글로텍에도 분명하게 책임을 묻는다.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에 있는 본사 건물 앞에서, 지금까지 남은 조합원 19명이 팔을 치켜들고 구호를 외친다.

“민주 노조 건설하니 폐업 통보 웬 말이냐!”

“기획 폐업 철회하고 일자리를 보장하라!”

“원청 갑질! 폐업 방관! 코오롱글로텍은 고용을 책임져라!”

“문재인 정부는 말로만 노동 존중하지 말고 원청 갑질 해결하라!”


우리는 자동차 시트커버를 만드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지만, 앞에 나와서 한마디 하라고 하면 가슴부터 두근댄다. 여름 불더위와 겨울 칼바람도 다 이겨 냈지만, 앞에 나가 말하는 건 여전히 떨린다. 그래도 우리 19명 여성노동자는 성진씨에스와 코오롱글로텍이 이 일을 해결할 때까지 잘 못하는 말도 계속할 거고, 작은 목소리도 더 크게 낼 거다. 성진씨에스와 원청 코오롱글로텍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기획한 게 분명한 이 폐업을 어서 철회하고 우리를 원직 복직시켜 고용을 보장해야 한다.


우리는 정부에게도 할 말이 있다. 대한민국헌법 제32조 1항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 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 헌법 제32조와 제33조는 분명 노동자의 권리를 밝혀 놓고 보장하지만, 현실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투쟁하는 여성노동자가 서울에 더 있다. 금천구 신영프레시젼 여성노동자, 종로구 레이테크코리아 여성노동자다. 정부는 우리 여성노동자가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권리를 외치면 당장 해고당하고 폐업당하는 현실을 더는 외면하지 말길 바란다. 사업주들이 헌법을 무시하고도 활개 치는 현실을 더는 방조하지 말길 바란다.


▶ 서울 금천구청 앞에서 정리해고에 항의하며 연대 집회를 하는 성진씨에스와 신영프레시젼 여성노동자들.  ⓒ금속노조 서울남부지역지회 성진씨에스분회


“죽기 살기로” 일한 우리의 노동을 존중받고 싶다


오늘도 도로 위에는 우리가 피와 눈물을 흘리면서 손이 닳도록 애쓰며 만든 시트커버를 씌운 자동차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달린다. 코오롱글로텍 본사 앞으로 집회하러 가면 젊은 노동자를 많이 본다. 마곡지구 곳곳, 점심을 먹고 건물로 들어가는 그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노동조합도 모르고, 노동자로서 내 권리도 모르고, 주장하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 길었던 우리다. 내 손으로, 우리 손으로 회사를 일구고 나라 경제를 발전시켰지만, 한 번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았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죽기 살기로 일하고, 주면 주는 대로 받고 살았다. 저 젊은 노동자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업장 이야기를 줄줄 써놓고 보니 참 씁쓸하다. 연도만 몇 개 빼면 누군가는 이게 1970년대나 1980년대 노동 현장 이야기인가 싶겠다. 공장이 아닌 다른 일터라고, 염색약 냄새와 기름 냄새 나지 않는 깨끗한 사무실이라고 별다를까. 노동자의 권리가 무시되는 사회에서는 20~30대 젊은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이라 해도 별다르지 않을 게 분명하다.


우리는, 오랜 세월 재봉틀 앞에서 가죽으로 자동차 시트커버를 만든 우리 성진씨에스 여성노동자는 ‘좋은 삶’을 꿈꾼다. 다른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모두, 나이 든 노동자 젊은 노동자 모두 좋은 삶을 살기를 우리는 함께 바란다. 큰돈을 벌고 멋진 문화생활을 누리는 것만이 좋은 삶은 아니다. 몸을 죽여 가며 하는 노동, 그 결과 버림받는 노동, 수십 년 일한 뒤끝이 아픈 몸과 허무함만으로 남는 노동에 “더는 안 돼! 이제 그만!”이라고 말할 때, 좋은 삶은 시작된다.


우리는 존중받고 싶다. 지문 닳도록 일한 우리 손, 우리 노동을 존중받고 싶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존중하기에 뒤늦게나마 노동자, 여성노동자라는 이름을 달고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한 번도 안 해 본 집회와 시위를 하고, 투쟁하는 노동자를 찾아가 손잡고 연대한다. 성장한 자녀가 하나둘 결혼해서 손주를 낳아 우리 가운데 더러는 할머니가 되기도 했다. 우리 자녀와 손주를 포함해 젊은 세대가 더는 우리가 겪은 노동 현장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와 젊은 노동자 모두, 어느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든 노동을 존중받아야 한다. 노동자가 존중받는 일터에서, 사회에서 일하며 살고 싶다.


※ 성진씨에스 여성노동자들은 월요일과 금요일 낮 12시 30분부터 두 시간 동안 서울 발산역 인근에 있는 원청 코오롱글로텍 앞에서 집회를 하고, 화요일과 수요일에는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그리고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후 5시 30분부터 한 시간 동안 금천구청 앞에서 집회를 하는데, 금천구에 있는 투쟁 사업장인 신영프레시젼 여성노동자들과 함께한다. ‘투쟁하는 여성노동자’ 페이스북에서 소식을 볼 수 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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