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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감춰진 수치” 드러낸 일본 여성들의 미투

최악의 한일 관계 속, 페미니스트들의 연대를 꿈꾸며



옆 나라 일본에 대한 뉴스가 매일 크게 보도된다. 이렇게나 자주 보도가 되는데 그 내용에 큰 차이가 없다는 건 흥미롭다. ‘나쁜’ 나라 일본의 적나라한 행태 고발과 그래도 국가 안보와 경제가 중요한데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불안이 마치 탁구공처럼 왔다 갔다 한다.


식민지배 역사 속 조선인 강제동원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내비치지 않으며 오히려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해 전쟁할 수 있는 ‘정상국가’를 만들고자 전력을 쏟고 있는 아베 정권에 분노가 치밀다가도, 효과가 있다지만 때때로 방향성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국내의 ‘반일(反日) 운동’에 대해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도대체 뭐가 문제길래 일본 사회의 반응은 저런 것이며 한국 사회의 대응은 정말 이게 최선인지 페미니스트로서 고민이 깊어진다.


이런 시점에서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주전장>(Shusenjo, 미키 데자키 감독, 2019년)은 일본,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아베 정권이 왜 ‘위안부’ 문제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힌트를 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기사를 통해 소개할 다큐멘터리 영화 <일본의 감춰진 수치>(Japan’s Secret Shame, 에리카 젠킨 감독, 2018년)는 일본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일을 드러내고 말하는 일이 얼마나 금기시되는지 그 어두운 현실을 보여준다.


<일본의 감춰진 수치>(Japan’s Secret Shame, 에리카 젠킨 감독, 2018)를 제작한 건 영국의 BBC방송이다. 이토 시오리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한 게 일본 매체가 아니라 영국 매체라는 점도 흥미롭다. ©BBC


지난 8월 29일부터 9월 5일까지 열린 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일본의 감춰진 수치>는 미투(#MeToo) 운동이 많은 나라를 뒤흔드는 동안 이상하리만큼 잠잠했던 일본에서, 심지어 미투 운동 이전에 자신이 당한 성폭력을 용기 있게 고발한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았다. 그리고, 일본이 감추고 있는 커다란 ‘수치’를 드러냈다.


성폭력 피해자가 질책받는 사회


2013년, 미국 뉴욕의 한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 중이던 이토 시오리는 학비를 벌기 위해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당시 일본 방송국 TBS의 워싱턴 지국장이었던 야마구치 노리유키를 만나게 된다. 유명 언론인이었던 야마구치는 이토에게 일로 조언이 필요할 때 연락하라며 이메일을 알려줬다. 이후 2015년 일본으로 돌아와 취업 준비를 하던 이토는 야마구치에게 인턴을 문의했는데, 야마구치로부터 인턴뿐만 아니라 프로듀서 자리도 열려 있다는 말을 듣고 취업 비자를 논의하기 위해 그를 만난다. 이때가 바로 ‘사건’의 날이었다.


‘사건’뿐 아니라 이후 이토가 겪은 현실은 소름 끼칠 정도로 익숙하다. 야마구치는 ‘당연하게도’ 강간 사실을 부정했고, 오히려 이토가 자신을 ‘유혹’했으며 합의된 관계였다고 했다. 그리곤 ‘현재 법으론 성폭력이 성립 안 될 테니 고소하고 싶음 해 봐라, 넌 나를 이길 수 없다’며 겁을 줬다.


사건 발생 5일 뒤, 겨우 경찰서를 찾아간 이토는 성폭력 사건을 신고하기 위해 여성 경찰을 요청했다. 어렵사리 사건에 대해 설명했지만, 그 여성 경찰은 자신은 교통과 소속이라서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이토는 배정된 3명의 남성 경찰에게 다시 사건을 설명해야 했고 그들 앞에서 커다란 사람 인형을 가지고 스스로 사건을 재연해야만 했다.


이토는 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까? <일본의 감춰진 수치>에서 에리카 젠킨 감독은 그 이유를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 일본에서 강간죄가 성립하려면 ‘폭행/협박’을 증명해야 한다는 점. 둘째, 일본 사회에서 여성이 말하는 ‘No’의 의미는 ‘Yes’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크다는 점. 셋째, 일본 경찰은 약 26만 명이지만 그중 여성 경찰은 단 8%밖에 안 된다는 점.


치바 대학의 고토 히로코 교수는 일본에선 여성이 성적 행위에 대해서 좋다, 싫다 표현하는 것 자체가 ‘여성스럽지 않다’고 치부되는 환경이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한국의 독자라면, 이 모든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이토 시오리 씨는 작년 일본에서 자신의 경험과 일본 사회의 반응을 담은 <블랙박스>(Black Box)라는 책을 냈다. 한국에서도 올해 출판사 미메시스를 통해 발간되었다.


더 놀라운 건, 일본의 환경이 한국보다 더 열악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토는 경찰서에 가기 전에 성폭력피해지원센터에 전화를 걸어 상담을 문의했지만, 당사자가 직접 방문하지 않으면 상담해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 도쿄에 단 하나 있는 센터에 상담 활동가가 한 명뿐이어서 자리를 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침대에서 벗어나기조차 힘든 상태였던 이토는 대중교통으로 2시간이나 걸리는 센터에 방문하는 걸 결국 포기했다.


사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드러내는 일뿐만 아니라 피해자를 지원하는 일조차도 쉽지 않다. 성폭력피해지원센터는 안전상의 이유로 주소를 공개하고 있지 않으며, 활동가들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성폭력 신고가 극도로 낮은 건, 성범죄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피해자가 질책받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2017년, 이토 시오리가 기자회견을 열어 대중 앞에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폭로한 건 일본 사회에서 충격적인 일이었다. 반응도 차가웠다. 기자회견에서 입은 옷이 야했다, 왜 가슴팍까지 단추를 풀었냐는 인신공격부터 피해자치곤 표정이 너무 밝다는 지적까지 부정적인 말들이 끊이지 않았다. 온라인에선 이토의 가족에 대한 신상 정보까지 올라왔다. 힘들었지만, 이토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기자회견 이후, 아베 총리의 자서전을 썼으며 그와 꽤 친분이 있다고 알려진 야마구치에 대한 (2015년 당시 경찰 조사 이후 발행된) 체포 영장이 갑자기 윗선에서 취소된 이유에 대해 정치권에서 쟁점이 되었다. 야권은 경찰 관계자들을 추궁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진실이 밝혀지진 않았다.


▲ 영화 <일본의 감춰진 수치> 장면 중     ©BBC


이토의 목소리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조금씩 늘어났다. 형법상 강간죄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런 논의들은 무려 110년간이나 변한 적이 없는 강간죄 조항을 대폭 개정하게 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2017년 6월, 개정 형법이 가결됨에 따라 일본의 ‘강간죄’는 ‘강제성교 등 죄’로 변경되었고 처벌이 최소 3년에서 5년으로 늘어났다. 또 친고죄가 폐지됨에 따라, 성폭력 피해자가 직접 신고하지 않아도 검찰이 기소할 수 있게 됐다. 18세 미만의 경우, 부모나 보호자에 의한 성범죄는 폭행이나 협박이 없어도 처벌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2017년 9월, 형사 소송을 다시 진행할 수 있게 해달라는 이토의 요청은 결국 기각되었다. 가해자를 형사 처벌할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일조차도 이토를 멈추게 하지 못했다.


이토 시오리는 반성폭력 운동을 위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학교 등을 다니며 성폭력 관련한 강의를 하고, 정부와 지자체에 성폭력피해지원센터를 늘리는 등의 변화를 요구했다. 그리고 야마구치를 상대로 민사 소송도 제기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토의 의지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 일이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 왜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해내야 하지?


영화 <일본의 감춰진 수치> 장면 중 ©BBC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다큐멘터리 <일본의 감춰진 수치>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두 가지였다. 굉장히 다른 이유로 인상적이었는데, 하나는 자민당 의원 스기타 미오의 등장이다. 극우 정치인으로 유명한 스기타 미오는 작년 한 일간지에 ‘동성애자는 재생산을 못해서 국가에 도움이 안 되는데 왜 그들을 위해 세금을 써야 하냐’는 혐오 글을 써서 논란이 된 바 있다. 스기타 의원은 영화 <주전장>에도 등장해서 “(위안부 피해가 사실이라는 증거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밖에 없지 않냐?”는 등의 심란한 말을 쏟아냈다.


그리고 어김없이?! <일본의 감춰진 수치>에도 등장해 “무혐의로 결론이 났는데 수긍하지 않는 건 일본 형법 체계를 무시하는 거다”, “일본의 경찰은 세계 최고로 우수하다”, “이토의 거짓말로 야마구치가 오히려 피해자가 되었다”는 등의 막말을 이어 간다. 사람이 참 일관성이 있다 싶으면서도 동성애 혐오-‘위안부’ 피해자 비난-여성 혐오를 대놓고 하는 자가 아베 정권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러한 정권으로 인해 일본 사회가 어떤 메시지에 휘둘리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또 다른 인상적 장면은 영화의 거의 마지막, 민사 소송 첫 공판에 참여하기 위해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이토가 차 안에서 글로리아 게이너의 “난 괜찮아”(I will Survive)를 들으며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장면이다. 힘을 내기 위한 자기 최면일 수도 있지만, 이토가 일본 여성들이 보낸 수백 장의 엽서를 읽으며 감동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정말 힘을 얻은 모습으로 보였다. “이 싸움은 나 혼자만 하는 게 아니라 모두와 함께 하는 것”이라는 말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을 거다.


주변에 민폐가 되는 일을 극도로 꺼리기 때문에 나서서 목소리를 내는 일을 거의 하지 않는, 특히 성폭력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던 일본 여성들이 이토 시오리의 용감한 고발에 고무되었고, 일본에서도 미투 운동 이후 사회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


‘플라워데모’ 홈페이지. 전국 18개 도시에서 8월 11일에 집회가 열린다는 공지가 나와 있다. flowerdemo.org


올해 4월부터 온라인을 중심으로 여성들이 결집하여, 성폭력 고소에서 황당한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연대를 표하는 ‘플라워데모’(지난 3월부터 4월까지 강간 사건 및 친부 성폭력 범죄 등에 대해 연이어 무죄 판결이 나자, 분노한 사람들이 피해자들을 지지하며 4월 11일 첫 집회를 열었다. 이후 매달 전국 곳곳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다)가 진행되고 있다. 내년 형법 개정에서 ‘폭행/협박이 있어야 강간이 성립된다’는 조항을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 내는 여성단체와 생존자들도 있다. ‘폭행/협박’을 전제하고 있는 형법의 강간죄 구성요건을 ‘동의’ 여부로 바꾸라고 요구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과 겹쳐진다.


‘국가’란 이름 뒤에 가려진 여성들, 국경을 넘어 만나자


연일 시끄럽게 ‘최악의 한일 관계’라고 하지만, 일본에서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이 13만 부 판매를 돌파하며 인기를 얻고 있다는 얘기나 ‘한국·페미니즘·일본’이라는 타이틀로 나온 출판사 가와데쇼보신샤의 계간 문예지 <문예>가 86년 만에 3쇄를 찍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에서 소녀상 전시가 중단된 부당한 사건에 대해서도, 일본의 예술가들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의 항의 퍼포먼스와 행동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한국과 일본의 페미니스트들이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은 오히려 더 많지 않을까? 함께 사회의 차별과 통념을 바꾸고 변화시켜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이미 한일 페미니스트들의 교류는 이어져 왔고 지금, 더 많은 연대를 요청하고 있다.


<일본의 감춰진 수치>를 보며 ‘최악의 한일 관계’을 통해 더 강력해진 ‘국가’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여성들의 얼굴들이 자꾸 생각났다. ‘국가의 감춰진 수치’라는 말이 도저히 낯설 수 없는 우리에게 필요한 액션은, 그 국가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연대를 모색하는 일 아닐까. (박주연)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 참고 자료

性犯罪に関する刑法~110年ぶりの改正と残された課題 (NHK하트넷, 2018/10/22, https://nhk.or.jp/heart-net/article/128)

플라워데모 홈페이지 https://flowerdemo.org

耳障りな声を社会に響かせること (Ogawa Tamaka, 2019/8/31, https://news.yahoo.co.jp/byline/ogawatamaka/20190831-0014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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