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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공주, 자유부인, 위안부…한국의 ‘여성혐오’史

[페미니즘으로 보는 식민/분단/이주] 전후 냉전 질서와 남성연대 (허윤)


※ 일다는 식민-전쟁-분단의 역사와 구조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재구성하는 기획기사를 연재합니다. 다양한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식민지배와 내전, 휴전으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가 낳은 ‘여성의 이동’, 군 성폭력과 여성동원, 군사주의와 여성의 지위 등의 젠더 이슈를 제기하고, 사회구조와 여성 주체들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며 전쟁/분단/이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여성 상위와 역차별을 이야기하는 시대


2015년 이후 한국사회의 키워드는 여성혐오였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며 IS로 떠난 김군이나 ‘무뇌아적 페미니즘’을 염려하는 방송인 등 사회의 각 영역에서 여성혐오 발언은 계속되었다. 일상화된 언어폭력과 성희롱 등 한국사회의 여성혐오는 온라인 공간의 익명성을 통해 폭발했다.


김치녀, 된장녀, 맘충 등 여성을 일반화, 집단화하여 표상하는 것은 신여성과 구여성, 자유부인과 현모양처 식의 이분법을 통해 계몽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던 기존의 여성혐오와 차이를 보인다. 여성은 더이상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가 아니고, 오히려 자신의 취약성을 이용해 사회적으로 이득을 얻고 있다는 ‘역차별’론은 객관적인 통계자료를 제시해도 설득되지 않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페미니즘이 부상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해시태그 선언에서부터 ‘#00_내_성폭력’을 거쳐 ‘미투’ 운동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은 리부트’되었다.


1950년대 나오는 종합지, 대중지들은 대부분 표지가 여성이었다. 『아리랑』 1955년 4월호 표지.


1959년 잡지에도 ‘여존남비의 시대’ 언급


물론 여성혐오가 비단 2010년대의 현상인 것은 아니다. 드라마 <여인천하>의 원작이 된 소설을 쓰기도 했던 작가 박종화는 1959년 여성잡지 『여원』에서 여성들이 남자 이상으로 활약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한다.


한국여자 중에는 지나간 역사적 인물 속에도 남자의 볼을 쥐어지를 만큼 훌륭한 여성이 많았지만 오늘날 우리 여성처럼 천이면 천, 만이면 만이 모두 남자 이상으로 활약을 하기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박종화, 「해방 후의 한국여성」, 『여원』, 1959.8.)


박종화는 여학생 수의 증가와 여성 가장의 경제활동 등을 통해 여성들이 “남자 이상으로 활약하는” ‘여존남비’의 시대가 왔다고 진단한다. 그의 지적처럼 해방 이후 여성들은 공적 영역에 참여하고,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보장받게 되었다. 해방기 여성들은 정당 활동, 정치 활동을 위해 거리에 나섰고, 1공화국에서는 여성 장관이 임명되기도 했다.


노동시장은 전쟁미망인들로 가득했다. 이와 같은 활약은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아들을 대신해 여성들이 돈을 벌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여성‘상위’를 외치는 것은 사실상 여성이 상위에 있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언제나 호명당하는 자는 호명하는 자보다 ‘하위’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여성은 축첩자에게 투표하지 않는다.” 

1960년 7월 전국 여성단체연합회 회원들의 축첩 반대 시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거래되는 여성과 강화되는 남성연대, ‘양공주’


해방 이후 남한에 주둔한 미군정은 부녀국을 설립하고 ‘매소부의 취체와 그 제도의 폐지, 불량부녀와 행려부녀자 보호’ 등 공창제를 폐지했다. 그러나 공창제 폐지와 사창 단속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진 것과 달리,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고 미군의 주둔이 영속화되면서 기지촌은 도리어 확장된다. 1954년 보건사회부 통계에 따르면, 접대부는 40여만 명으로 성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UN군을 상대로 하는 여성들이었다.


UN군과 미군을 상대로 하는 ‘위안부’ 여성들은 ‘보호받을 수 있는 정조’와의 대비를 통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공론장은 양공주의 존재를 비난했지만, 기지촌을 국가가 합법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 아니라 개인의 잘못된 선택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최정희의 『끝없는 낭만』(1956~1957)은 여학생과 미군 장교의 사랑을 통해 ‘양공주’ 문제에 접근하는 소설이다. 엘리트 여성인 이차래는 미군 장교와 사랑에 빠지지만 이로 인해 ‘양공주’라고 손가락질을 당한다. 독립투사의 아들이자 차래의 정혼자였던 국군 장교 배곤은 건강한 남성청년으로, 차래에게 미군과 헤어지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도 버리라고 조언한다. “백색 피부 밑을 흐르는 그 아이의 피는 저 멀리 바다 건너 미국 민족들의 피”이고, “한국에 태여난 불행한 여성”인 차래는 다시 한국여성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는 ‘양공주’에 대한 당시 한국사회의 혐오가 그대로 노출된다.


1) 소위 양부인이라는 건 해방의 부산물이라고 하고 나서 우리 사회가 아직 정돈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직업여성 통계란에 팔십 파센트를 그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상매는 어른처럼 동방예의지국을 자랑하던 우리나라 여성들이 왜 이다지도 맥을 못추고 흘러가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습니다.


2) “그래. 차래 너 용케 아는구나. 오빠가 미워한 것이 ‘캐리’가 아니야. 네 말과 같이 전쟁하러 온, 그래서 몇 만명의 한국 여성을 양갈볼 만들어 놓은 그 사람들이야. 그 외군들이란 말이다. 그러면서도 오빤 또 그 사람들을 나쁘다고만 생각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란 말을 한다. 오빠가 어제저녁 여기서 화를 낸건 네가 곤의 약혼자라는 것, 그리구 내 친구라는 것, 좀 더 큰 의미에서 네가 한국의 ‘인데리’ 여성이라는 데서 일꺼다.”


차래의 친구인 상매와 그 오빠는 여성 직업 통계란의 80%가 미군 상대의 ‘양공주’라는 현실에 분노하면서 이를 한국여성들과 외국군인들의 탓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 ‘양공주’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가족이나 제도, 미군의 존재를 통해 질서 안정을 도모하는 국가의 구조나 세계사적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외국군의 주둔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면서도 국군의 약혼자이자 인텔리 여성인 차래는 미군과 결혼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국가 사이의 거래를 숨기고 정치경제적 구조를 개인의 선택과 책임으로 환원한다.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고, 집단 내부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민족 이데올로기는 끊임없이 적대적 외부를 설정해야만 한다. 이들 주체 혹은 집단이 순결하기 위해서는 순결하지 못한 나머지를 적극적으로 배제해야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순결의 책임은 여성들에게 주어진다. 여성이 재생산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과 명예의 전달자라는 상징이 구성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집단 상상력을 통해 아이들과 연관되어 있고 그에 따라 가족의 미래뿐만 아니라 민족의 미래와도 연관된다.(니라 유발-데이비스, 『젠더와 민족』, 박혜란 옮김, 그린비, 2012) 이에 따르면 혼혈아로 인해 자신에게 주어진 재현의 짐을 훼손한 여성은 민족의 미래를 더럽힌 것이 된다. 따라서 다시 민족 안으로 포함되기 위해서는 비-순결의 표지인 혼혈아를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설 속 이차래는 아들 토니를 보육원에 버리고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은 하얀 눈과 오버랩된다. 양공주는 죽고, 민족국가는 눈처럼 순결한 새 길을 닦을 수 있는 것이다.


지식인 남성들에 의해 도마 위에 오른 ‘자유부인’


1950년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은 주인공 오선영을 통해 ‘자유부인’이라는 유형을 만들어낸다. 그녀는 가게의 공금을 횡령하고, 대학생인 애인과 땐스홀에 출입한다. 파리양행으로 출근하는 것을 8.15해방보다 “참다운 민주해방”으로 명명하기도 한다.


오선영을 통해 연애와 섹슈얼리티는 민주와 자유의 본뜻을 훼손시키는 시대풍조의 표상으로 젠더화된다. 이에 내포 작가는 “자유와 방종이 혼동되어, 사회 질서가 그로 인하여 파괴될 우려가 있을 경우에는, 민주주의를 잠시 무시해도 좋으니, 여성 각자에게 지각이 생길 때까지는 아낙네들을 엄중히 단속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여성 ‘일반’에 대해 강한 혐오를 드러낸다. 즉 잘못된 자유, 민주는 오롯이 여성의 책임인 것이다.


영화 <자유부인>(1956년, 한형모 감독) 포스터


『자유부인』의 엄청난 성공은 서울신문을 통해 정비석의 소설을 읽었을 ‘지식인 남성’들의 열렬한 호응에 기대고 있다. 즉 1950년대 여성혐오는 대중의 지지를 받는 텍스트였던 것이다.


잡지 『여성계』 1955년 1월호는 ‘최신형 여성’을 기생충형, 모사형, 지식여성형, 귀부인형, 문화인형, 쁘르죠아형의 6종류로 나눈다. 이 글은 1950년대 여성의 허영이나 과시를 문제 삼으며 강한 혐오를 드러낸다. 특히 쁘르죠아형은 대학교육을 받은 여성들로서, 가사는 식모에게 맡겨두고, “민주주의와 남녀평등은 입버릇처럼 외우고 다니나 그실 민주주의가 뭔지 그 초보조차 깨닫지 못”한다며 이들을 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최신형 여성’의 특성은 정비석이 지적한 ‘자유부인’과도 맞아떨어진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문화적 취향을 갖추고 있으며, 집 밖에 나갈 수 있는 여자들은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한다며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때로 이 ‘자유부인’이 공산주의자로 치환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반공 검사로 유명한 오제도는 공산주의를 유혹하는 여성으로 재현한다.


근대적인 유행형을 허다히 생산하는 찬란한 20세기에 또 하나 사교계의 툭 티어난 명화 하나가 있으니 그가 바로 화제의 S양인 것입니다. (중략) 애교에 흘러넘치는 웃음과 제스취어, 이 근사한 전체에 어느 듯 옛 모습은 사라지고 많은 남자들을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중략) 늘 자신의 태도를 명백히 하지 않는 운큼한 여성입니다. (중략) 될 수만 있다면은 온 세계의 뭇 남성들을 상대하고 싶은 것이 S양의 얄궃으면서도 솔직한 심정인 것입니다. 그러면 S양의 본명은 무엇일가? S양의 본명이 바로 ‘미쓰 소비에트’인 것입니다.(오제도, 『공산주의 ABC』, 남광문화사, 1952, 102~108쪽.)


S양은 20세기 사교계의 꽃으로, 실제로는 늙은 여성이지만 화려한 사교술과 애교 있는 태도를 갖추어 청년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녀에게 열렬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청년도 있고, 호기심으로 그녀의 집을 찾는 사람도 있을 만큼 많은 남자들이 S양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오제도는 이 S양이 ‘미쓰 소비에트’임을 밝히며 공산주의를 남성을 유혹하는 여성으로 재현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영화 <운명의 손>(1958)에서도 등장한다. 바에서 일하는 마가렛은 양공주로 포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스파이다. 영화는 미국화되고 공산화된 이중적 신체를 빌어 공산주의=여성 섹슈얼리티의 공식을 입증한다. 실크 캐미솔을 입은 마가렛의 육체는 젊은 남성을 유혹하고, 그런 그녀를 처벌함으로써 국가는 다시 안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반공 청년에 대한 사랑으로 마가렛이 교화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미국적 소비 주체는 공산주의자라는 또 하나의 외연을 갖게 되었다.


이는 1950년대 여성혐오가 포스트 식민, 반공 등의 냉전 질서의 누빔점임을 보여준다. 냉전 체제는 불안을 외부에서 오는 위험과 관련시켰고, 한국사회는 이 전염의 매개체를 ‘양공주’에게 덧씌운다. 섹슈얼리티가 반공 내셔널리즘과 만나 공산주의의 여성화, 서구화라는 형상을 획득한 것이다.


영화 <운명의 손>(1954년, 한형모 감독) 중 한 장면. 카바레 마담인 주인공이 간첩으로 등장한다.


사라진 여자들, 침묵하는 사회


1950년대 ‘대한민국’은 민족국가를 건설할 건강한 남성 국민을 아프레걸, 자유부인 등의 여성성을 통해 구성해나간다. 이로 인해 1950년대 한국 사회는 여성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한다.’ 순결한 민족을 재생산하는 것도 여성이고, 언제든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여성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때 말해지지 않은 여성이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여성에 대한 혐오를 전시하면서, 일절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 냉전 남한의 무의식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말해지지 않는 것이 일본군 ‘위안부’이다. 1950년대 공론장은 귀환한 ‘위안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는 전후 일본에서 조선인 ‘위안부’나 미군 ‘위안부’ ‘팡팡’이 빈번하게 소설화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패전에 임박한 일본군은 ‘위안부’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전선까지 배치되어 있던 조선인 ‘위안부’들이 귀환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거치는 경우도 많았으며, 본토에 배치된 여성들도 있었다. 이로 인해 조선인 ‘위안부’의 존재는 전후 일본 사회에도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위안부’에 대한 초기 이해는 직업적 성판매 여성이라는 선에서 이루어졌으며, 식민 지배의 문제는 간과되었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조선인 군인과 조선인 ‘위안부’들은 일본군에서 풀려나 귀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돌아왔다는 이유로, 더럽혀진 몸이라는 이유로 가족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수치스러움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공론장의 침묵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전쟁에서 돌아온 학병들이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하며 ‘민족의 아들’로 귀환하였으며, 이들이 ‘학병 서사’라 불리는 문학적 전환점을 이루었던 데 반해, 여성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발기인인 윤정옥은 일제 말 어른들의 소문을 통해 일제의 ‘처녀 공출’에 대해 알고 있던 학생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후 사회가 안정되면 역사가들이 “끌려간 여성의 문제”를 연구할 줄 알았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까지도 “사라진 여자들”에 대해서 아무도 말하지 않기에 자신이 나서게 되었다고 설명한다.(윤정옥·김수진, 「얘들, 어떻게 됐나? 내 나이 스물, 딱 고 나이라고: 정신대 문제대책협의회 전(前) 공동대표 윤정옥」, 『여성과 사회』 13호, 2001, 104~137쪽)


돌아오지 못한 여성들과 ‘애국적 무관심’: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는 냉전 체제가 만들어 놓은 한국-미국-일본의 공조 체계를 횡단하며 모순을 폭로한다. 민족국가의 불완전성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돌아온 ‘위안부’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위안부’가 국가의 판타지를 가로지르는 실재(the Real)였다.


나이토 치즈코는 ‘애국’ 담론에서 보지 않는 타자의 문제를 ‘애국적 무관심’이라고 지칭한다. 차별당하는 자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재일, 한국, 북한, 중국 등 임의의 기호에 대한 공격의 근저에는 사실상 타자에 대한 무관심, 특히 자신이 놓여진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구조에 대한 무관심이 있다.(内藤千珠子, 『愛国的無関心: 「見えない他者」と物語の暴力』, 新曜社, 2015.)


이는 여성혐오에도 적용될 수 있다. 여성에 대한 혐오에는 여성혐오가 가리고 있는 역사적, 정치적 구조에 대한 ‘무관심’이 있다. 사회는 혐오를 통해 “실제로 견뎌내기 어려운 삶의 문제를 보다 잘 회피할 수 있게 된다.”(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조계원 옮김, 민음사, 2015, 180쪽.) 이는 국가적 위기의 상황마다 여성혐오가 ‘등장’하여 문제의 중핵을 가리고, 혐오할 대상을 제공하였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일본군 위안부협상’이 ‘불가역적 합의’를 선언한 이후, 정부의 협상에 찬성하는 측에서는 ‘대승적 차원’, ‘애국적 차원’에서 협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협상 진행 과정에서 당사자인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다. 할머니들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1950년대와 마찬가지이다. 한국-미국-일본의 연대를 위해 ‘위안부’ 문제는 합의를 통해 ‘처리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애국심’은 누군가의 침묵, 혹은 희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민족국가 재건 시기, 공통감각으로서의 ‘여성혐오’


박종화가 여성상위 시대라고 말한 것과 달리, 탈식민과 민족국가 재건의 과정에서 강조되는 것은 초남성성이다. 아쉬스 난디는 초남성성이 식민지 지배의 반동으로 지속적으로 생겨난다고 지적한다. 식민지의 남성 주체들이 제국의 초남성성을 동경하게 되고 이는 이후 독립국가의 초남성화와 사회의 초여성화를 야기한다는 것이다.(아쉬스 난디, 『친밀한 적』, 이옥순 옮김, 1993)


“딸이면 해방자”, “아들이거든 건국”이라는 이름 짓기가 등장하는 염상섭의 「해방의 아들」 속 출산 서사는 이러한 경향을 재현한다. 독립과 해방은 “아버지 성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이는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잃어버린 땅(북한)을 회복한다’는 민족적 대의에 부응할 아들을 낳는 서사로 이어진다.


한국전쟁 당시 발행된 육군 기관지 『전선문학』에 실린 정비석의 「남아출생」은 아들을 낳는 것이 곧 국력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아내의 임신과 출산을 우울증의 원인으로 여길 만큼 싫어하던 소설가 현이 전선에 나가 있는 조카가 전사했다는 편지를 받고 “조카가 전사했다는 기별을 들은 지금에 자기에게 아들이 하나 생겼다는 것은, 소모된 국가의 국력을 그만치 보충한 것 같아서, 무한히 기뻤던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는 아들을 낳아 국가에 보태는 재생산이야말로 궁극적 차원의 생산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출산 서사가 도착하는 곳은 군인-청년의 남성성이다. 1950년대 발간된 모든 출판물에 게재된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고, 강철같이 단결하며 백두산을 정복하자”는 “우리의 맹세”가 민족의 담지자로서의 군인-청년을 호명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1950년대 국가는 군인의 초남성성을 호명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점은 이 초남성성은 미국이라는 강력한 아버지를 통해서만 가능했고, 이 ‘아들’과 ‘아버지’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미군 ‘위안부’는 계속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북진통일을 주창하며 목소리를 높이던 호전성의 음화로, 불확실한 남성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정희진, 「편재(遍在)하는 남성성, 편재(偏在)하는 남성성」, 『남성성과 젠더』, 자음과모음, 2011). 1950년대 남한에서 건강한 남성은 전쟁에서 죽고, 젊은 남성들은 징병을 피하기 위해 호적을 위조하고 숨어 지낸다. 공산 괴뢰로부터 수복해야 할 땅은 있지만, 상이용사들은 생계문제로 자살하는 사회이다.


영화 <자유부인>(1956년, 한형모 감독) 중에서 스틸 컷.


이때 이 훼손당한 남성성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과잉된 여성성이다. 사회는 풍기단속 차원에서 여성의 성과 섹슈얼리티를 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후의 혼란은 아프레걸, 자유부인이라는 말로 통칭되었으며, 이들은 국가재건의 질서를 훼손하는 여성들이자 사회의 악으로 명명되었다. 이러한 타자화 전략은 여성혐오를 바탕으로 유지된다. 일선에서 싸우는 ‘오빠’의 세계가 건전하기 위해서 ‘후방’은 언제나 여성화되었던 것이다.


여성화된 후방에는 혐오와 수치심으로 가득하다. 조선은 해방되고 민족국가가 건설되었지만, 군 ‘위안부’는 미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베트남군 ‘위안부’ 등의 형태로 반복해서 돌아온다. 일본군 출신의 한국 군인들은 한국전쟁 당시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위안부’와 위안소를 배치했다. 한국이 냉전 질서의 유지를 위해 미국 특수 위안시설을 운영한 것은 물론이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공론장은 여성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하거나, 말하지 않는 방식을 택한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냉전 체제하에서 통치 도구로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필자 소개: 허윤. 부경대 국문과 교수. 남성성을 중심으로 젠더문학/문화사를 공부하고 있다. 『그런 남자는 없다』(오월의봄, 2017),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민음사, 2018), 『을들의 당나귀귀』(후마니타스, 2019) 등의 공저, 『일탈』(게일 루빈, 현실문화, 2015) 등의 역서, 『1950년대 한국소설의 남성 젠더 수행성 연구』(역락, 2018)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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