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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만큼이나 여성주의 번역도 중요해요
제13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 번역팀과의 만남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박주연 기자
최근 몇 년간, 소위 ‘빻은’ 국내 콘텐츠를 피해 해외 콘텐츠 시청 및 관람으로 이동했던 페미니스트들이 ‘번역’에 대해 문제를 삼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불편함 없이 즐길 수 있는 콘텐츠에 대한 욕망, ‘여성 서사’를 찾아 이동한 이들이 또 하나의 장벽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빻은’ 번역이라는.
어떤 해외 콘텐츠가 원어로는 ‘여성 서사’로 분류된다 하더라도 번역의 상태에 따라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원어엔 없던 차별이나 혐오 표현이 담긴 단어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런 문제가 반복되자 ‘여성’ 번역가를 써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직접적으로 영화 배급사 등에 ‘여성’ 번역가를 쓰라는 요구도 늘어났다. 하지만 무언가 조금 빈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번역가가 ‘여성’이면 되는 걸까? ‘여성 서사’를 둘러싸고 더 다양한 논의가 필요하듯이(관련 기사: ‘여성 서사’는 한계가 없다 http://ildaro.com/8503) 번역에 대한 이야기도 좀 더 깊어져야 하는 게 아닐까.
반갑게도, 이미 이러한 고민을 하고 ‘여성주의 번역’을 위해 <여성주의 번역가 과정>을 운영, 번역가를 양성한 곳이 있다. 거기다 그 번역가들로 팀을 꾸려 영화제를 만든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 개최하는 여성인권영화제다.(1983년 창립한 여성인권운동 단체인 한국여성의전화는 2006년부터 여성인권영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해 만나보았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건, ‘여성주의 번역가’들은 단지 글을 옮기는 사람들이 아닌 “언어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그 엄청난 작업을 해내기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며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의 영상 관람을 편안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웃기고 싶다는 한국여성의전화 정 활동가와 번역팀의 한비 씨, 최민정 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10월 2일 개막하는 제13회 여성인권영화제 포스터를 들고 환하게 웃는 인터뷰이들, 왼쪽부터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 정, 번역 팀의 한비, 최민정 (촬영: 박주연 기자)
10월 2일(수)이 영화제 개막이라, 한 팀으로 같이 보낸 시간이 꽤 될 텐데 세 사람의 관계가 왜인지 조금 어색해 보이기도 했다. 알고 보니 팀이라고 해도 업무 특성상 만나서 하는 일이 거의 없는 탓에, 서로 얼굴을 보는 게 낯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역시 팀워크는 팀워크라고, “이번 기회에 좀 더 친해져 보죠”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간단히 자기 소개부터 해 주세요, 어떤 계기로 이 일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도.
최민정: 전 2018년에 <여성주의 번역가 과정>을 들었고 그 뒤로 영화제 번역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원래 프리랜서로 책이나 논문, 회사 발표 자료 등 텍스트 번역을 했어요. 작년에 마침 일하던 회사를 그만두고 쉬고 있었는데, 친구가 이 과정을 알려주더라고요. 사실 영상 번역엔 관심이 없었는데 타이밍도 맞았고 궁금하기도 해서 한번 해 보자 싶었죠.
한비: 저도 2018년에 과정을 들었고 이후 번역팀에서 활동 중이에요. 지금은 졸업을 앞둔 대학생이고 영어 전공을 하면서 영화비평 공부를 했어요. 학교에서 여성영화제를 열기도 했고요. 한 번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에 이 과정을 들으면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신청했죠.
정: 전 2015년부터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로 일하고 있고요. 올해 영화제에선 프로그램팀 업무와 번역팀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여성주의 번역가 과정>을 어떻게 열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정: 여성인권영화제를 2006년부터 시작했고 <여성주의 번역가 과정>은 2012년에 처음 열렸어요. 제가 일하기 전이라 제가 기획자는 아니고요. 여성주의 관점이 부족한 문화 콘텐츠 환경 속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여성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영화제를 시작했는데, 진행하면서 번역이 중요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던 것 같아요. 기껏 좋은 페미니즘 영화를 발견해서 가져왔는데, 소위 '깨는’ 자막을 넣는 건 아니다 싶고. 또 그런 ‘깨는’ 자막을 줄이기 위해서 이 분야의 전문가들도 육성해야 할 필요성도 느꼈고요. 컨텐츠를 보다 더 잘 보급하고자 이 과정을 꾸리게 된 거죠.
-2012년에 여성주의 번역가 과정을 진행한 후 더이상 운영되지 않다가, 2017년부터 다시 열었다고 들었어요.
정: 2012년 과정 이후, 참여하셨던 분들이 번역팀으로 활동하면서 번역팀은 계속 운영이 되었어요. 그 팀이 계속 공부하면서 워크샵도 하고 하니까, 또 과정을 열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이걸 운영하려면 재원(돈)이 좀 많이 필요하거든요.
한비: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을 거예요. 과정이 다 무료였거든요! 저도 그냥 몸만 왔었어요(웃음)
정: 또, 이 과정을 운영하려면 좋은 강사도 있어야 하고 관심을 가지고 들을 수강생도 있어야 하고요. 여러 사정상, 다시 진행할 여력이 안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2017년에 다시 한번 열어보자 해서 시작했고 2018년에도 열었고요. 올해는 못 했어요.
2017년 <여성주의 번역가 과정> 강의 모습 (출처: 한국여성의전화 페이스북)
-2017년이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진 영향도 있었겠네요.
정: 네, 그렇죠. 2017년에 이 과정을 열었을 때 공지 글 조회수가 2천이 넘을 정도로 관심이 컸어요. 수강 신청도 많았고요. 다 받고 싶었는데, 강사가 첨삭도 해야 하는 수업이라 수강생이 너무 많으면 안 되거든요. 더 많은 분들이 못 들은 건 아쉽죠.
-‘여성주의 번역’이라고 하면 그게 뭐냐고, 낯설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아요. ‘여성주의 번역’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나요?
한비: 수업 첫 시간에도, 이후 번역팀 모임 첫 시간에도 했던 말이 있는데요. 우리가 ‘여성주의 번역가와 여성주의 번역이란 이거!’라는 전체 그림을 가지고 있어서 이걸 시작한 게 아니라, 우리도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시작한 거라는 거죠. 다만 참가자들이 다 페미니스트고 페미니즘에 대한 정보들을 좀 가지고 있으니까 함께 활동하면서 ‘여성주의 번역’의 의미를 그려볼 수 있고, 지금도 그 과정에 있어요. ‘여성주의 번역 가이드라인’도 만들고 있는 중이고요.
최민정: 제가 가이드라인 만드는 모임엔 참여하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여성주의 번역’이란 여성 혹은 어떤 누가 봤을 때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번역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여성으로서 어떤 콘텐츠를 번역된 것으로 감상하다 갑자기 불편해지거나 급정지하게 되는 순간들이 없는 번역이라면 ‘여성주의 번역’ 취지에 맞지 않을까요?
-그것이 ‘여성주의 번역’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할 것 같네요.
한비: 결국 언어가 권력이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기존에 사용하던 언어체계,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지금 그 권력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요즘 ‘벙어리장갑’ 대신 ‘손모아장갑’이라고 쓰자는 흐름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잖아요? 그런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도 좀 더 여성으로서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자, 기존에 쓰던 ‘남성중심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단어들을 좀 탈피해 보자는 거죠.
여성이 힘을 가지는 방법이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언어를 가지는 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언어를 재정립하는 거죠. 사실 전 번역을 하면서 ‘남녀’가 아니라 ‘여남’이라고 쓰고 싶은데 아직 대중적이진 않잖아요. 그래서 일단 우리가 영화제 안에서 그런 시도를 하면서 언어의 힘을 되찾자, 그리고 그에 대한 수요와 공감이 늘어나다 보면 이런 게 좀 더 대중화되고 일반화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시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언어의 힘, 정말 중요한 지점이네요. 단어를 선택할 때 고민이 많을 것 같아요. 요즘 ‘저출산’ 대신 ‘저출생’을 쓰자는 등 다양하게 언어들이 변하고 있기도 하잖아요.
최민정: 처음 수업 신청할 때 약간의 시험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한국여성의전화에 대한 한영 번역이었는데요. 역사 관련 내용이 있었는데 그때 제가 역사를 ‘히스토리’(history)로 번역을 하지 않고 ‘허스토리’(herstory)로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뽑히지 않았을까? 싶은데. (다같이 웃음) 기본적으로 팀원들이 페미니즘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요.
한비: 내부적으로 논의도 많이 해요. 아직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어떤 규율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서로에 대해 기본적인 기대와 믿음이 있어요. 그리고 ‘이런 표현은 많이 안 써보던 거라 잘 모르겠다’ 싶으면 업무 톡에서 함께 논의해요.
그리고 원래 영어 단어에서는 혐오적 맥락이 없는데 그걸 한국어로 바꿨을 때, 우리는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지만 편견이 담기거나 차별적인 것도 있어요. ‘벙어리장갑’이 그런 예죠. 영어로는 ‘미튼즈’(mittens)인데 이걸 ‘벙어리장갑’으로 번역하면 장애인 비하 단어가 되는 것처럼요. 우린 여성주의 번역가로서 그런 부분을 찾아내려고 해요.
작년 상영작 중에 ‘다이크’(Dyke, 1950, 1960년대 서구권에서 이성애자들이 부치 레즈비언이나 톰보이 레즈비언 등을 경멸하거나 비하하는 말로 썼음. 현재엔 긍정적 의미로 사용하려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도 있음)가 들어가는 영화가 있었는데 이 말을 레즈비언으로 바꿨거든요. 영어라고 다 그대로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잘 쓰이는지, 한국에서는 어떤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 그런 점도 고민해요.
정: 우리가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영화제 번역팀에서 매년 여러 논의들이 나와요. 페미니즘 최신 이슈가 담긴 해외 콘텐츠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으니까, 한국어로도 물론 있기도 한데 뜻이 미묘하게 다른 그런 단어들에게 어떻게 적절한 한국어를 찾아줄까, 어떻게 이어줄까, 혹은 어떤 새로운 말을 만들까? 그런 고민들이요. 그렇게 단어들을 하나하나 논의하면서 자막을 만드는데, 막상 영화제가 끝나면 또 자료가 흩어지더라고요. 그래서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있는 거죠.
제13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어슐러 르 귄의 환상특급> 스틸 컷. (출처: 여성인권영화제 홈페이지 fiwom.org)
-퀴어, 장애과 관련된 용어를 번역할 때 별도의 감수를 받거나 자문을 구하기도 하나요?
정: 그럼요. 퀴어, 장애도 그렇고 이주여성 등. 우리도 여성들의 차이에 대해 낯선 부분이 있으니까 관련 단체 활동가나 전문가 혹은 당사자에게 의견을 구하기도 해요.
그런 것뿐 아니라, 이번에 어슐러 르 귄을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어슐러 르 귄의 환상특급>(Worlds of Ursula K. Le Guin, 아웬 커리 감독, 미국 2018)이라는 상영작이 있거든요. 이 작품의 경우엔 어슐러 르 귄(세계 3대 판타지 소설으로 꼽히는 작품을 써낸 페미니스트 SF작가로 작년에 타계했다) 작품을 번역했던 분을 모시고 몇 가지 단어들은 확인하려고 하고요. 이런 식으로 신경 써서 번역을 완성하려고 합니다. (웃음)
-번역이라는 게 정말 보통 작업이 아닌 것 같네요.
정: 거기다 영상 번역은 짧은 자막에 의미가 응축되어 담겨야 하고요.
(자막에 각주를 달 수도 없잖아요?)
정: 그러니까요. 사실 3초 만에 지나가는데 각주를 달아서, 원어는 OO이었는데 이건 그 나라에선 어떤 의미이고 한국에선 이런 이런 말들이 비슷한 의미라 판단되고 어쩌고… 이런 말로 설명할 수가 없잖아요. 아니면 영화 시작 전에 변사가 등장해서 의미를 다 설명하거나.(다같이 큰 웃음)
한비: 텍스트 번역이랑 영상 번역은 그래서 좀 다른 것 같아요. 글자 수는 줄이면서도 이해가 더 잘 되게 바꾼다는 게 어렵죠.
최민정: 그래서 정말 매력적이에요. 전 영상 번역은 너무 빨리 지나가고 글자 수도 제한적이라 별로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막상 해 보니 글자 수가 제한적이니까 제 상상력을 더 많이 발휘해야 하더라고요.
제13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베이 베이> 소개. (출처: 여성인권영화제 홈페이지 fiwom.org)
이번에 <베이 베이>라는 중국 여성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를 번역했는데요. 중국 여성이라 영어가 자신의 첫 번째 언어가 아닌데, 계속 영어로 이야기해서 영어가 조금 서툴러요. 그래서 이 사람의 말보다 마음을 계속 읽으려고 했어요. ‘이 말을 하려고 이렇게 말한 거구나’라고 깨달아 가면서요. 그런데 한국어로 번역할 때 그 여성의 영어 사용의 미숙함을 담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뜻이 잘 전달되면 되는 거니까요. 그런 점도 고민해 보고, 재미있는 과정이었어요.
말이 나온 김에 <베이 베이>(Bei Bei, 마리온 립슈츠 & 로즈 로젠블랏 감독, 미국 2018) 홍보를 잠시 하자면(웃음), 정말 ‘지금까지 이런 다큐멘터리는 없었다!!’에요.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담은 다큐멘터리라 사실 번역하기 어렵기도 했는데, 당연히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고요. 그래서 어떻게 결론이 나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고 그런데 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요. 정말 재미있어요.
한비: 이미 여러 번 논의된 거긴 한데, 이제 우리 번역할 때 여성을 ‘그녀’라고 하지 말자고 하잖아요. 마침 제가 어제 감수했던 작품이 <프라이머리 컬러스>(Primary Colors, 데릭 프라이스 감독, 캐나다 2016)라는 4분짜리 단편인데 가정폭력에 대한 거고, 한 명의 여성 화자가 등장해 계속 이야기를 하거든요. 1차 번역을 한 분이 ‘그녀’로 번역하셨더라고요. 그 여성만 나오는 게 아니라 나중에 남성(그)이 등장하기 때문에 아마 구분을 하고 싶어서 ‘그’라고 하지 않고 ‘그녀’로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제가 다시 그걸 ‘그’로 바꾸자는 의견을 냈어요. 사실 전 여성(그)과 남성(그남)을 쓰고 싶었는데(웃음), 이 작품이 웃어넘길 수 있는 분위기의 내용이 아니기도 해서 그건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남성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만 ‘그’와 ‘그녀’를 쓰자고, 여성이 자기 혼자 있을 땐 ‘그’일 수 있는데 남성이 등장하면 ‘그녀’가 되는 그런 해석인 거죠. 물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그런 부분까지 읽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제 의견은 그렇게 냈어요. 최종적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궁금하신 분들은 영화관에 오셔서 확인하세요!(웃음)
제13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프라이머리 컬러스> 스틸 컷. (출처: 여성인권영화제 홈페이지 fiwom.org)
사실 ‘그녀를 다 그로 바꾸자’는 말이 쉽긴 한데 그렇게 했을 때 내용을 파악하기 힘든 경우도 있어요. 텍스트면 좀 괜찮을 수도 있는데 영상은 워낙 제한적이고 한정적인 정보만 주다 보니까 그렇게 다 바꿨을 때 눈에 바로 안 들어오기도 하고요. <프라이머리 컬러스>도 대사들이 랩처럼 빨리 지나가거든요. 정말 번역한 분한테 감탄했어요. 이걸 어떻게 번역했지 싶을 정도로. 그래서 고민이 되는 거죠.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데 두 사람이 ‘그’와 ‘그’로 나왔을 때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최민정: 전 그래서 되도록 ‘그/그녀’ 대신 이름을 부르려고 해요. 다만 영상은 정말 글자 수가 제한적이라 한 자 줄이기가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글자 수에 여유가 있을 때 이름을 쓰기도 하고요.
정: 그리고 존댓말과 반말 톤을 맞추는 것도 상당히 고민이 많이 되는 문제잖아요.
최민정: 제가 번역한 단편영화에서 여성과 남성이 나오는데요. 잠시였지만 나도 모르게 여성이 남성에게 존댓말하는 걸로 번역하고 있더라고요. ‘당신이 떠났잖아요’ 이런 식으로요. 지금 내가 뭐하는 거지?! ‘당신’, ‘~요’로 하면 글자 수도 늘어나는데!(웃음) 결국 ‘니가 날 떠났잖아’로 바꿨죠.
한비: 그런 부분에서 내 안의 여성혐오를 깨닫기도 해요. 영어 원문은 글자인데 내가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 누군지 보는 순간, (그 사람이 여성이면) 한국어로 번역할 때 미묘하게 어미가 부드러워지는 일이 있더라고요. ‘이러면 안 된다’고 깨우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힘들어도 그만큼 재미있는 일도 있을 것 같은데, 그 이야기도 좀 들려주세요.
정: <내가 택시를 모는 이유>(Brother, Move On: 안츠히 폰 무스 감독, 스위스 인도 2018 다큐멘터리)라는 상영작이 밤엔 여성들이 밤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하는데도 택시 운전을 하는 여성 기사님 이야기에요. 극 초반에 이 여성한테 남성들이 시비 거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걸 어떻게 번역하냐에 따라 느낌이 확 다르잖아요. 예를 들어, 남성이 여성에게 ‘아줌마’라고 할 수도 있고 ‘당신’이라고 할 수도 있고. 여성은 또 어떻게 받아칠지,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여성주의 번역가들이 주목해서 재미있게 살릴 수 있는 포인트가 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번역가분이 정말 재미있게 번역하셨더라고요. (웃음)
제13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내가 택시를 모는 이유> 스틸 컷. (출처: 여성인권영화제 홈페이지 fiwom.org)
꼭 살리고 싶은 농담이 있잖아요.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었는데 극장에서 관객들이 빵 터지면 너무 좋아요. 고생해서 살린 번역을 딱 알아봐 주고 즐기는 있는 관객들이 있다는 게 너무 좋죠.
한비: ‘일반’ 관객을 웃기는 것보다 여성주의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 페미니스트를 웃기고 싶은 마음이 있죠. (웃음)
정: 내가 한국의 페미들을 다 웃게 하겠어!! (다같이 웃음)
-이미 추천작이 여러 개 나오긴 했지만, 세 분이 각자 영화제 추천작을 꼽아주세요.
한비: 오늘 ‘여성주의 번역’ 이야기를 했지만 영화제에서 한국 감독들의 단편도 많이 상영하거든요. 제목이랑 시놉시스만 봤는데도 너무 눈에 띄는 게 많더라고요. 해외 콘텐츠도 물론 시의성 있는 주제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가끔 아쉬울 때가 있잖아요. 한국 여성들에게 중요한 이슈가 또 있으니까요.
최민정: 전 제가 번역한 게 제일 재미있어요.(다같이 웃음) <난세포>(OVUM, 시드니 휴 감독, 미국 2018)라는 작품은 ‘난자’라는 제목이었는데, 난자보다 난세포가 더 작은 느낌이기도 하고 난자의 자(子)가 아들 자여서 제목을 난세포로 했어요. 난세포를 제거하고 싶어 하는 여성의 이야기인데, ‘과연 제거하게 될지?’는 영화관에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다같이 웃음) 그리고 개막작 <최강 레드>(Roll Red Roll, 낸시 슈워츠먼 감독, 미국 2018)도 재미있어요.
정: 개막작 보고 저 박수쳤어요!
제13회 여성인권영화제 개막작 <최강 레드> 소개. 미식축구에 열광하는 마을의 파티에서 10대 여성이 성폭행당한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출처: 여성인권영화제 홈페이지)
최민정: <최강 레드>에선 피해자 이야기가 거의 안 나와요. 피해자가 누구인지, 피해자 얼굴도 안 나오고요. 사실 성폭력이나 여성이 피해자가 된 사건을 소재로 한 픽션이나 논픽션도 많은데 항상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여성이 어떻게 피해를 당했는지, 피해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당했는지, 죽었는지 그런 것에 포커스를 맞추는데 이 영화엔 그런 게 정말 안 나와요. 사실 사람들이 봐야 하는 건 가해자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죠. 영화를 보면서 새삼 그걸 느꼈어요.
정: 저도 그게 너무 매력적인 지점이라 생각했어요. ‘이제 우리 피해자 이야기 그만하고 가해자 이야기할 때다’, 그걸 보여주는 영화거든요.
한비: 개막작은 항상 표가 빨리 매진된다는 사실을 염두해 주세요. (다같이 웃음)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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