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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알려진 ‘여자 삼청교육대’

감금된 보호(保護)와 보도(輔導), 성매매 여성 수용시설


※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발굴한 여성의 역사: 가시화되지 않았던 여성들의 자취와 기억을 공적 담론의 장으로 건져 올리는 여성사 쓰기.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보호’(保護)는 “위험이나 곤란 따위가 미치지 않도록 돌봄”이라는 뜻이고 ‘보도’(輔導)는 “도와서 바르게 이끈다”는 뜻이다.


지금의 성매매특별법이 제정(2004년)되기 전, ‘윤락행위 등 방지법’이 시행된 시기에 성매매 여성들을 보호하거나 보도한다는 제도들이 만들어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보호소나 기술원 등의 이름을 가진 수용시설이다. 이 시설들은 어떻게 설립되고 운영되었을까. 여성들에게 시설은 어떤 의미였을까.

“여자기술원, 강남 수서동 30일 문닫아” 경향신문 1994년 6월 17일자 기사. 1970~1980년대에 여자기술원은 직업훈련을 하는 곳으로 홍보되었지만, 폐쇄될 무렵에야 성매매 여성들을 감금한 수용소였음이 드러났다.


1950년대, 포주 엄벌과 여성들의 귀향 조치


한국전쟁이 끝난 뒤 1950년대에 성매매 여성은 ‘해방의 특산물’, ‘전쟁의 유산’으로 여겨졌다. 정부는 성매매 여성이나 그러한 우려가 있는 여성을 자매원에 수용하고, 이발과 미용, 양재, 타자 등 직업보도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55년에 국립자매원이 설립되기도 했지만 구체적인 운영에 대해서는 드러나지 않았다.


보건사회부, 서울시, 서울시 경찰국은 ‘사창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일반 여성(私娼)들은 시설에 수용하고, 악질인 포주나 여성들만 처벌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1956년 당시에 이 위원회가 파악한 바로는 성매매 여성이 1,469명이었다. 위원회는 이들을 YMCA, 구세군, 기독교의 부녀관에 수용하고, 대규모의 ‘소녀관’을 세워서 ‘훈육과 직업보도’를 하겠다고 구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의 보도 정책이 실현될 수 있는지는 당시에도 의문이 제기되었다. 여성들이 단속 후 재판으로 구류되는 동안 포주에게 더 빚을 지고, 오히려 성매매에서 빠져나오기가 더 어렵게 된다는 것을 서울시 경찰국이 지적하였다. 관례적으로 단속은 하지만, 이후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방법도 막연한 상황이었다.


1959년에도 정부는 여성단체, 종교단체를 망라한 구호위원회를 조직하고, 성매매 여성의 ‘갱생’과 직업보도를 위해 자매원, 갱생원 등의 시설을 대폭 늘리려고 계획하였다. 여성의 단속도 필요하지만, 단속보다 미연 방지가 더욱 긴요하다는 인식이었다.


이러한 생각으로 ‘윤락여성의 교도(敎導) 및 보건관리’를 주제로 하여 보건사회부, 내무부, 국방부, 문교부, 서울시 등 각 관계부처와 사회단체, 부녀단체 및 언론계 대표 30명이 참석하여 공청회를 열었다. 결론적으로 포주를 단속하는 것이 선결 문제이고, 여성들은 귀향 조치를 하면서 무료숙박소를 만들어서 수용하고 직업을 갖도록 하는 방법이 현실적이라고 합의하였다.


또한 여기서 시급한 대책으로 다음의 몇 가지를 내놓았다.


① 윤락여성들의 지방별, 연령별, 원인별 등의 정확한 실태조사에 의한 통계자료를 파악한다.

② 포주를 엄벌토록 하고 포주에 매여 사는 사창(여성)들의 구제를 우선적으로 하자.

③ 아무 목적도 없이 도시로 몰려오는 여자들이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무료숙박소를 설치하여 훈계, 귀향토록 하고

④ 지방 유지들의 협력을 얻어 도시에 몰리지 않도록 계몽한다.

⑤ 사창가를 철저히 단속하고 올데갈데 없는 여성들을 감화원(感化院)이나 교도소(敎導所) 같은 기관에 수용하여 일하면 먹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자.

⑥ 검진을 자주 실시하도록 성병 전문 무료진료소를 설치하자.


이 회의에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대책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농촌의 살림이 넉넉하면 도시로 아무 직업도 없이 무작정 몰려드는 폐단도 없어지고, 여성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면 타락의 길을 밟는 수가 적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여기서 나중에 ‘윤락행위 등 방지법’에서 나온 특정 구역(집결지)을 지정하자는 내용이 제기되었다. “밀집된 부락에 스며든 사창들을 일정한 구역을 지정하여 몰아넣도록 하고, 점차적인 교도 방법을 택하는 것이 실제적”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이것은 법을 무시하고 사실상 성매매 제도를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불가하다는 반대 의견 또한 있었다.


“여인10명 집단탈출소동” 조선일보 1961년 10월 17일자 기사. 
시립부녀보호소 주변, 점선으로 여성들의 탈출 경로를 표기했다.

1960년대 군사정부, ‘보호소’를 세워라


1961년 5.16쿠데타 후 서울시는 6월 10일부터 3개월 간 사창 단속 기간으로 정하고 “사창 행위, 포주 등의 엄중 처단”과 “창녀에 대한 채권의 무효, 공인된 접객업소의 작부 및 접대부에 대한 등록제 실시, 여관 및 접객 업주의 매춘행위 방조 엄벌” 등의 정책을 강행하기로 하였다.


당시 서울시가 발표한 ‘윤락여성의 사후 대책’을 보면 첫째, 시청 부녀과와 각 구 보건소 및 시립부녀관에 상담소를 두어 윤락여성들의 갱생 상담에 응하도록 하고 둘째, 귀향자에게는 무임승차의 편의를 도모하며 셋째, 의지할 곳 없는 자는 집단수용한 다음 자립갱생의 길로 선도한다는 내용이었다.


‘윤락행위 등 방지법’(이하 윤방법)은 그해 11월 9일에 제정·시행되었다. 윤방법에서는 과거 ‘매춘’으로 일컬어지던 성매매를 ‘윤락행위’라 하고, 그 의미를 “재산상의 이익이나 영리를 목적으로 한 성행위”라고 규정하였다. 5.16 군사정부는 성매매를 방지하여 풍속을 정화한다는 목적으로 윤방법에서 “윤락행위와 유인, 매개 행위를 금지”하였다.


또한 ‘부녀보호시설’에 가야 할 여성을 규정하였다. “윤락행위의 상습이 있는 자”와 “환경 또는 성행으로 보아 윤락행위를 하게 될 현저한 우려가 있는 여자”를 “요보호여자”라 칭하고, “선도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중요 도시 등에 보호지도소를 설치할 것을 명문화하였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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