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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 코치 민사소송 판례의 의미 짚는 좌담회에서 배상권 모색

 

올해 여름,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손해배상 청구 권리와 관련하여 의미 있는 판례가 나왔다. 김은희 테니스 코치가 어린 시절 겪은 성폭력의 가해자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다. 8월 19일 대법원은 “성폭력 피해자의 민사소송 손해배상 소멸시효 산정 기준을 (성폭력 발생 시기가 아니라) 성폭력 발생 후 발현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시점으로 봐야 한다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 시점을 ‘피해가 발생한 날’로 인정

 

김은희 코치는 초등학교 시절 자신의 테니스 코치였던 가해자로부터 지속적인 성폭행을 겪었고, 성인이 된 이후인 2016년 그를 형사 고소했다. 가해자는 징역 10년형을 확정 받았다. 김 코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가해자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소멸시효’(권리자가 그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기간 동안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된 경우, 해당 권리를 소멸시키는 제도)를 산정하는 기준을 둘러싼 중요한 쟁점을 제기했다.

 

결과적으로 김 코치가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은 “성폭력 발생 시점으로부터 14년 후에 받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일을 ‘불법행위가 발생한 날’로 인정하여 소멸시효를 산정”한 한국 최초의 판례가 되었다.

 

▲ 한국여성의전화 주최로 11월 26일 진행된 <여성폭력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 권리 확대를 위한 방향 모색 좌담회>에서 이야기중인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대표, 김은희 코치, 김재희 변호사, 최선혜 한국여성의전화 조직강화국장(왼쪽부터)  ©한국여성의전화

 

김 코치를 조력해 온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지난 11월 26일, 이 판례의 의미와 더불어 성폭력/가정폭력/데이트폭력 등 여성폭력 피해자에게 배상권이 왜 중요한지 짚고,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방향을 모색하는 좌담회를 열었다. 김은희 코치와 김재희 변호사를 비롯, 활동가와 법 전문가들이 모여 변화를 위한 목소리를 높였다.

 

김은희 코치 ‘나와 같은 피해자들을 위해 판례 남기고 싶었다’

 

소송을 담당한 김재희 변호사는 “성폭력피해 등 여성폭력의 경우, 손해배상 청구의 소멸시효는 민법 766조에 따라 피해를 알게 된 날로부터 3년(단기시효), 범죄가 일어난/피해가 발생한 날로부터 10년(장기시효)으로 계산하는데, 그 피해가 발생한 날을 어떤 기점으로 잡느냐가 쟁점”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아동성폭력, 친족성폭력, 가정폭력 사건에서 소멸시효의 기점이 매우 중요하다. “많은 여성폭력의 경우 내가 피해를 당했다거나 이게 범죄라는 사실을 인지하기 어렵고, 추후에 발생한 후유증의 양상 자체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뒤늦게 피해 사실을 인지하고 법적으로 대응하려다 보면 장기시효 10년이 이미 경과한 경우가 많다.

 

김 코치의 경우에도 사건이 발생한 건 2001과 2002년 사이,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일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야 자신이 어린 시절 겪은 일이 성폭력 범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후 예기치 않게 여전히 아이들을 코치하고 있는 가해자를 마주치면서 수면장애와 기억상실 등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발현되었다.

 

김재희 변호사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을 받은 시점을 ‘피해가 발생한 날’로 보고 그로부터 10년을 계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며 소송을 진행했다.

 

김은희 코치 또한 그러한 판례를 남기고 싶었기에 민사소송을 진행했다. 1심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1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났음에도 소멸시효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나오지 않은 건 큰 아쉬움이었다. 김 코치에게 이 소송이 중요했던 이유는 “유사 사건의 피해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 판례를 남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재판 당시 판사에게 “1억원을 안 받아도 좋으니 소멸시효에 대한 판결을 제대로 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항소심 판결에서는 소멸시효에 대한 주장이 인정을 받았고, 가해자가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올해 8월 대법원에서도 김 코치의 손을 들어줬다. 성폭력 민사소송에서 피해를 입은 날을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일로 인정한 첫 판례가 나온 것이다.

 

▲ 김은희 테니스 코치가 성폭력 가해자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 대법원 판결에 대해, 한국여성의전화에서 발표한 논평 카드뉴스

 

돈 요구하면 '꽃뱀'? 피해자가 배상 받아야 하는 건 당연해

 

형사소송과 민사소송의 판결까지. 김은희 코치는 이 일에 약 5년의 시간을 쏟아부었다. “5년의 시간이 정말 지옥 같았다”고 말하는 김 코치는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피해자로서 사건 모니터링도 해야 하고, 변호사와 소통하고 증인들과도 소통해야 했고, 또 일상을 사는 김은희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꾸리는 것을 병행하는 일이 정말 힘들었다”고 했다.

 

성폭력 민사소송 손해배상에서 새로운 판례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소송을 제기했고, 기존의 배상액도 너무 낮게 설정되어 있다는 생각에 배상액을 1억 원으로 할만큼 용기와 배짱도 있었던 김 코치지만, 그도 민사소송을 제기할 땐 “‘꽃뱀’ 프레임이 따라오지 않을까 걱정했었다”고 밝혔다.

 

사실 이 ‘꽃뱀’ 프레임은 성폭력이나 가정폭력/데이트폭력 피해생존자들이 민사소송을 제기하는데 큰 장벽이 되는 요소 중 하나다. 손문숙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상담팀장은 피해자가 ‘배상받을 권리’를 가로막는 것들에 대해 지적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가정폭력/데이트폭력, 성폭력 등이 ‘인정’되기 어렵다는 점, 그것이 때론 피해자들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난다는 점, 그래서 신고와 처벌이 어렵다는 점” 그뿐 아니라 “배상을 이야기하는 순간, 순수하지 않은 ‘가짜’ 피해자로 만드는 현실”을 꼽았다.

 

특히 성폭력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정황이 있으면, ‘결국 돈이 목적이었다’는 비난이 쉽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피해생존자가 민사소송으로 손해배상을 받는 건 “‘실익’이 없는 싸움이라 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소송 자체도 거의 2~3년씩 걸리고, 절차도 복잡하고 어려울뿐더러, 고액의 소송비용이 드는 건 물론, 패소시 상대방의 소송비용도 부담”해야 한다. 또한 “승소하더라도, 가해자가 재산을 빼돌리거나 배상금을 지급할 능력이 없다고 하면 배상액을 받는 일은 한없이 지연되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그 배상액조차도 500만원~4,000만원 정도”라는 것.

 

그럼에도 피해생존자들은 정말 배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민사소송을 제기한다. 피해자가 성/폭력으로 겪은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선 치료와 상담이 필요하고, 거기엔 비용이 발생한다. 바로 일상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경우도 상당수인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도 필요하다.

 

피해가 피해로 인정을 받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 김은희 코치도 형사소송만으로 끝내기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사건은 오래 전에 발생했고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피해가 지속적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꼭 판단을 받고 싶었다”고 했다.

 

“‘통상적 배상액’ 금액이라는 틀도 깨고 싶었던 점”도 배상액 설정에 영향을 미쳤다. 김 코치는 “내 피해는 훨씬 크고, 사실 1억원으로도 치유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 ‘통상적 배상액’을 함부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는 점도 강조했다.

 

피해자 신원보호, 낮은 배상액, 아동성폭력 소멸시효 개선돼야

 

정말 뜻 깊고, 새로운 역사를 쓴 김은희 코치와 김재희 변호사,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들과 많은 연대자들. 좌담회에서 이들은 ‘서로가 있었기에’ 성폭력 피해생존자에게 의미가 있는 판례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걸 재차 강조했다. 포기하지 않고 격려하고 지지하는 끈끈한 연대의 결과가 많은 피해생존자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는 점은 틀림없다.

 

▲ 한국여성의전화 주최로 진행된 <여성폭력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 권리 확대를 위한 방향 모색 좌담회>에서 이야기 중인 손문숙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상담팀장,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조은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 변호사, 서종희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왼쪽부터)   ©한국여성의전화

 

하지만 피해생존자의 배상권이 보장 받기 위해선 아직 바뀌어야 하는 부분이 많다. 김재희 변호사는 “피해자가 민사 소송를 진행하기 위해선, 마주해야 하는 어려움이 여전하다”고 말했다. 일단 소송을 시작하면 ‘결국 목적은 돈’이라는 식의 비방을 접하게 될 가능성이 높고, 그로 인해 피해자에게 2차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더 큰 문제는 피해자 보호다. 형사소송에선 피해자 보호 조치가 제도로 마련되어 있다. “가명으로 고소할 수도 있고, 인적 사항을 상대에게 알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민사소송으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적 사항과 주소, 주민번호 등이 가해자에게 알려지는 등의 노출 우려가 생기기 때문”이다. 김 변호사는 이런 상황이다 보니 “피해자 입장에선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건 ‘합의’ 밖에 없고, 사실 전혀 선처를 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합의를 하게 되고, 이 합의로 인해 결국 가해자는 (형사소송에서) 감형을 받게 되는 일”들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배상액/위자료가 저액화되어 있는 대표적 국가 중 하나”라고 한 서종희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적정한 배상액 기준을 어떻게 잡을지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서 교수는 “독일은 독일연방대법원이 매년 위자료 산정표를 공시”한다고 소개하며, “지금 상황에 맞는 현실적인 액수를 다시 한번 재고해 봐야 할 때”라고 제언했다.

 

또한 소멸시효에 대해서도 의견을 덧붙였다. “최근 아동성폭력과 관련해서 프랑스나 독일 같은 경우 소멸시효와 관련해 특별 규정을 두고 있다. 대부분의 아동성폭력이 집단생활이나 공동생활 또는 친밀한 관계에 있는 상황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이 ‘친밀성’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을 때까지 시효를 계산하면 안 된다는 배려 조항을 둔다.” 서종희 교수는 “한국에서도 이런 제도를 마련하는 것에 대해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은호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 변호사는 민사소송 시 발생하는 문제인 개인정보 보호 문제, 패소 시 피해자가 소송 비용을 부담하는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 몇 년 간 개정안들이 발의되었지만 “여전히 계류 중”이라 밝혔다. 또한 “이 개정안들이 현재의 다양한 문제를 포섭하기엔 부족하다”는 점도 짚었다.

 

입법 논의와 더불어 학계의 연구와 연대도 필요하다. 김재희 변호사는 이번 사건에선 외상스트레스장애와 후유증과 불법 행위의 인과관계가 인정 받았지만, 이것이 조금 더 원활해지기 위해선 법조계뿐만 아니라 “정신의학계, 상담학계의 관련 연구나 조사가 더 활발해 질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박주연 기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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