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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는 신문발전기금의 지원으로, 여성농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필자 김형주님은 경기도 여주에서 여성농민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했고, 여성농업인센터 방과후공부방 별님반 교사로 일해온 여성농민입니다.

그녀들과 ‘함께’ 만들어갈 세상을 꿈꾸며
 

방과후 공부방에서의 일입니다. 2학년 가영이가 큰 소리로 신나게 자랑을 합니다.
“선생님, 우리 엄마 오늘 우리나라 사람 됐다요!”
 

농촌엔 이주여성들의 비율이 크게 늘었다. ©경기여성농업인센터 한글교실에 참여한 이주여성들

가영이네 집은 다문화가정입니다. 벌써 아이가 셋인데, 큰 아이가 아홉 살입니다. 그런데 가영이네 엄마가 이제서야 귀화과정을 다 거쳐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받는 날이랍니다. 아이의 기쁨이 그 식구들의 기쁨일 것입니다. 저도 따라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5학년 대현이는 이번 방학에 외갓집이 있는 일본으로 놀러 간다고 자랑입니다. 옆에서 이야기 듣던 아이들도 부러움을 감추지 않습니다. 지난 여름엔 해남에 가서 며칠을 놀다 온 정현이가 외갓집 자랑을 해대는 통에 아이들이 한참 부러워했는데, 대현이는 더 멀리 일본까지 간다니 어찌 자랑이 아니겠습니까?
 
이곳엔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농촌에 시집을 오는 아내들 중 많은 수가 국제결혼을 통해 새 삶을 시작합니다. 여주여성농업인센터 부설 어린이집은 절반에 달하는 아이들이 다문화가정 아이들입니다. 영아 반에는 더 많습니다. 초등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의 수도 점점 늘어납니다.
 
정부에서는 다문화가정을 위한 갖가지 프로그램들을 만들고 지원합니다. 그런데 이곳 어린이집에서 평소 아이들이 모습을 보면, 다문화가정이라는 특별함은 이미 특별하지 않은, 그냥 ‘우리’ 속에 녹아있는 생활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외국에 있는 외갓집을 자랑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참 다행입니다. 어른들의 우려나 어른들이 느끼는 거북함과는 달리, 아이들은 얼굴 조금 검은 이웃아줌마도, 쌍꺼풀 진 똥그란 눈의 친구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조금 큰 아이들은 오히려 <다문화가정 설문조사> 같은 요식행사가 더 싫답니다.
 
농촌의 현실과 국제결혼, 그리고 그녀들의 삶
 
농촌이 어려워지고 농업이 사양산업이 되면서, 결혼해서 농촌에서 살고자 하는 여성들을 찾기 어려워졌습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듣기 어려워진 곳이 농촌입니다. 그런데 조국을 떠나 멀리 대한민국으로 이주해서, 여기 여자들도 힘들다는 농촌생활을 꾸려나가고 아이들도 알토란같이 길러내는 그 엄마들을 보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말 통하는 내 나라 안에서의 ‘시집살이’도 만만치 않은데, 말 설고 물 설고 음식도 설고 어느 것 하나 익숙하지 않은 시집살이는 얼마나 힘들까. 힘들 때 찾아갈 친정도 가깝지 않은 곳이고….
 
요즘 농촌은 한창 김장철입니다. 베트남에서 온 새댁이 올 여름 처음으로 김장배추를 심으면서 시어머니께 물었답니다. 배추김치를 얼마나 하면 김장이 되느냐고. 배추모종 두 판을 심으면서 한 이백 포기를 하면 된다고 했답니다. 그녀는 내심 안도를 했지요. 베트남 배추는 작답니다. 우리네 배추의 4분의 1도 안 되는 정도의 크기랍니다. 그런데 이백 폭 심은 배추가 가을이 되자 점점 더 커지는 통에 밭에 갈 때마다 놀랐답니다. 그곳과 이곳이 다른 점이 어디 배추크기뿐이겠습니까?
 
게다가 그녀들은 대부분 20대 초반, 10대 후반의 어린 여성들입니다. 대부분 농촌의 늙은 총각이었던 남편들은 40대 중반. 문화 차이와 더불어 세대 차이까지, 그녀들이 넘어야 할 산이 어디 한 두 개이겠습니까? 삼십 년쯤 세월이 흐르고 난 뒤 남편들이 먼저 세상을 뜨면, 아직도 창창한 나이일 그녀들의 인생은 또 어찌될지….
 
사랑도, 결혼도 팔고 사는 대상이 되어, 농촌에 산다는 이유로 장가 못간 늙은 총각의 사랑도, 좀더 나은 생활을 위해 타국에서의 새생활을 택한 어린 여성의 희망도, ‘돈벌이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농촌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베트남에서 온 새댁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녀는 먼저 이곳에 와서 베트남에 있는 자신의 친구를 소개비 500만원 받고 이쪽 남자와 결혼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라는 사람이 정신지체였고,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결혼과정 속에 친구는 남편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결혼을 했나 봅니다. 처음에는 그 두 사람이 친구라면서 자꾸 싸워대는 통에 ‘베트남사람들은 싸움을 잘 하나보다’ 싶었는데, 나중에 상황을 듣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던 거죠.
 
문제의 그녀는 한글교실에서도 분란을 일으켰습니다. 한 번은 “아이들에게 엄마의 모국어도 가르쳐주고, 엄마 나라에 대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엄마 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알려주어라” 하는 주제의 교육이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베트남은 미개한 나라” 라는 둥 막말을 일삼아 다른 베트남 사람들과 싸움이 붙었습니다. 모국을 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존심 따로, 자긍심 따로 찾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더니 결국 그 새댁이 갓난아기 놓아두고 집안의 패물이랑 통장을 뒤져 나가버렸답니다. 그러자 주위에선 그 새댁이 ‘처음부터 좀 문제가 있었다’면서, ‘처음에 AS를 받을 것을 시기를 놓쳐서 문제가 커졌다’며 혀를 찹니다. 에프터 써비스, 한두 달 살아보고 맘에 안 맞으면 결혼중개업 회사에서 바꿔주기로 했었답니다. 물건도 아닌, 사람을 말입니다.
 
한없이 너그럽고 한없이 야박한 ‘이중잣대’
 

그녀들과 함께 더 넓고 넉넉한 ‘우리’를 만들어갔으면..

부근 초등학교에 캐나다에서 온 스물다섯 살 원어민 영어교사가 있습니다. 월급도 만만치 않지만, 학교에서는 교직원 사택까지 제공하고 비행기표도 사주었습니다. 그것을 두고 영어 교사 스스로 ‘어메이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웃나라 일본도 영어교사에 대한 처우가 좋지만, 우리 대한민국이 최고랍니다. 1년 계약기간을 채우고선 자기 나라로 미련 없이 돌아갔습니다. 한국에서 번 돈으로 스키와 여행을 즐길 것이랍니다.

 
같은 또래의 상혁이 어머니, 친정방문 지원프로그램을 신청하고 싶어도 시집에서 동의를 해주지 않아 애를 태웠습니다. 왜냐하면 비행기표 이외에도, 친정 나들이를 한번 하려면 이래저래 경제적으로 타격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같은 또래의 민연이 어머니는 중국동포입니다. 이런저런 국제결혼여성 지원프로그램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동남아시아가 아니’라는 이유로요.
 
우리말에 ‘우리’라는 말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울타리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일인칭의 복수형으로 쓰이는 ‘우리’입니다. 근데 이 두 ‘우리’가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나와 한 ‘울타리’ 즉 ‘우리’에 있는 사람들을 일컬어 일인칭 ‘우리’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 많은 틀을 가지고 삽니다. 대상에 따라 너무 다른 준거 틀을 내밉니다. 우리보다 잘 사는 서구사회에는 한없이 너그러운 잣대가, 우리보다 조금 어려운 나라에게는 한없이 야박한 잣대가 됩니다. 내 나라 내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 대한 경멸 또는 차별이 되기도 합니다.
 
원래부터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옛날이야기를 보면 많은 이방인, 즉 외국인들이 등장합니다. 신라시대의 처용도 서역에서 온 외국인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표류해 온 이방인들이 귀화하거나 대접을 잘 받고 떠난 예가 있습니다. 구한말에 가서야 외국인에 대한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태도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를 지나면서, 다른 민족과 나라에 대한 이중적 태도가 뿌리내린 것 같습니다.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두 가지 언어로 이야기하고, 두 가지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것은 그 아이들이 가진 국제화 시대의 큰 장점입니다. 아이들이 한글과 함께 엄마 나라의 말로 이야기 하고, 단군신화와 함께 엄마 나라의 전설도 들으며 클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으로, 캐나다로, 그리고 호주 같은 영어권 나라로 돈을 싸 들고 언어연수를 보내면서,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두 언어로 이야기하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더 넓고 넉넉한 ‘우리’를 만들어갔으면 
 
베트남에서 온 여성들은 귀화하면서, 본명 외에 ‘은혜’ ‘지연’ 같은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한글도 많이 익숙해졌고 한국말도 늘었습니다.
 
태국에서 온 추리건은 요즘 들어 참 편안한 얼굴입니다. 여전히 시금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아이가 말을 잘 안 듣는다고 하소연하지만, 이젠 김치나 잡채는 어떻게 해야 맛이 있는지, 연중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온 새댁이 얼마 전 아들을 낳았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얇은 잠바 하나 입고 덜덜 떨더니만, 아이를 낳고선 입성도 좋아지고 얼굴도 폈습니다. 이제 좀 정을 붙이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마음씨 좋은 베트남 동료들도 그 새댁 걱정을 했더랬습니다. 캄보디아는 국가적으로 자국여성이 한국남성과의 결혼하는 것을 ‘인신매매’로 보고 중지시켜서, 그녀에겐 같은 나라 친구들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문화와 신혼생활에 적응해가느라 하루하루가 힘든 그녀들의 삶이 어서 빨리 ‘우리’ 속에서 안정을 찾게 되길 바랍니다. 그러고 그녀들과 함께 더 넓고 넉넉한 ‘우리’를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이주여성 컬럼보기] 장애가 있는 남편, 피부색 다른 아내 | 한국에 살지만, 난 자랑스런 베트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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