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을 애도하기, 새로운 신뢰를 형성하기 저는 어느 종합병원에서 일을 합니다. 건물의 가 측으로 계단이 나있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여러 병실로 연결되는 입구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계단은 꽤 비좁고 어두컴컴합니다. 마음에 가장 남는 것은 그 차갑고 어둡고 좁은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누군가를 잃은 듯한 슬픔을 왈칵 토해내지도 못한 채 소리 죽여 흐느끼는 사람들입니다. 때로 그 흐느낌은 텅 빈 계단에 울려 퍼지기도 합니다. 돌아선 채 구부러진 등이 괴로움에 들썩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차가운 계단 위에 방석이라도 깔아주고 힘없는 어깨 위로 담요라도 덮어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 등이 너무도 외롭고 슬퍼 보입니다. 그 계단은 어느 정도까지는 슬픔의 시간을 허용해주기 위해 자리하는 의미 있는 공간이..
아자르 나피쉬의 문학의 위상은 시대마다 다르다. 문학만이 그럴까? 모든 예술 분야들은 특정 시대에 그 시대와 함께 호흡하면서 왕성하게 작품들을 생산해내고, 이어서 다른 영역에 그 주도권을 넘긴다. 아마도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예술의 영역은 확장되니, 한 시대와 호흡하는 데 적절한 예술양식 역시 변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작금의 경우, 문학은 영상 분야에 비해 날카롭게 현실을 조망하거나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뒤쳐진다는 인상을 준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자조적인 질문 속에 갇힐 필요는 없다. 세계 그 어딘가에서 문학으로 세상을 읽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영문학을 전공한 이란의 여성교수 아자르 나피쉬가 쓴 는 문학의 효용성에 대한 자조적인 질문에 원칙적이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