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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딸을 만나러 가는 길 (3) 엄마 미치는 꼴, 보고 싶어? 
 
내 결혼관계가 이혼을 향해 치닫자, 다른 가족들까지 얽혀들면서 더 많은 비루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냉정하면서도 예의를 지키며 남편과 시댁식구들을 대한 아버지와 달리,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남편을 망신시키고 시어머님께도 험한 말을 입에 담으며, 화해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간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이혼만은 안 된다며. 한 쪽에서는 친척어른들은 물론, 이웃 아주머니들까지 동원해 나를 설득하려 했다. 한 사람과 전화로 진을 빼고 나면 이틀 뒤에는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모두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한 전화라는 건 묻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은 한 숙모님께 전화가 왔다.
 
“여자들은 모두 다 그렇게 살아. 나도 얼마나 보따리를 쌓다풀렀다 했는지 몰라.”
“작은 엄마, 그렇게 살아서 끝이 뭔데요?”

난 좀 더 당돌하게 여쭈었다. 아니, 끝이 있다면 그래, 그렇게 살아서 결국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나쁘지만은 않다고, 그런데 숙모님은 차분한 어조로 주저하지 않으며 대답하셨다.
 
“끝은, 없지. 그냥 그렇게 사는 거야.”
“그렇다면, 전 싫어요. 전 그렇게는 안 살겠어요.”
 
결국, 나는 그 많은 회유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이혼한 사람이 되었지만, 사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더 이혼 결심을 굳혀갔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을 통해 위선적이고 불행한 결혼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해 나가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결국, 어머니는 막바지에는 굿판까지 벌이셨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만은 막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결심이 반영된 굿이었지만, 난 그날 이후, ‘정말, 이혼은 꼭 하고 말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딸 가진 부모로서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보여주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렇게 이혼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걸까? 온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꼭 굿을 해보고 싶다 하셨다. “굿까지 했는데 네가 이혼을 하겠다면 그때는 다시는 말리지 않겠다”시며, 꼭 한 번만 소원을 들어달라고 나를 조르셨다.
 
물론, 어머니 혼자만 참석해도 된다고 했다면 당신은 내게 아무 말 하지 않고 그것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자리에 내가 꼭 있어야 한다고 했었나보다. 저렇게 안타까워하시는 어머니에게 그나마 위로가 된다면, 못이기는 척하고 따라가는 것이 뭐 나쁠까하는 소박한 마음으로 나는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무당은 산 좋고 물 좋은 데서 두 차례에 걸쳐 굿을 해야 한다고 했고, 나는 첫 번째 굿을 하기로 한, 그 물 좋다는 부산 어느 바닷가까지 따라갔다.
 
돼지 머리를 올려놓고 구멍에 바람을 막아야 한다며 콧구멍, 귓구멍 등에 돈을 꽂으라는 말은 그래도 애교가 있었다. 손바닥을 비비며 굽실굽실 머리를 조아리던 어머니의 모습도 애처로울 뿐이지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온 곳을 데리고 다니며 이혼을 하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건만, 끄떡도 하지 않는 듯한 내 태도가 거슬렸던지 서울행 기차를 기다리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무당의 집에서 그녀는 부적을 쥐어주며 내게 말했다.
 
“이혼하면 너도 나처럼 무당이 될 거야! 이렇게 팔자 센 게 좋아?”
 
나는 그 때는 정말 코웃음을 쳤다. 강도 높은 이런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자, 그녀는 한층 수위를 높여,
 
"네가 이혼을 하면 네 엄마가 미칠 수도 있어! 넌 엄마가 미치는 꼴 보고 싶어?"
 
나는 그 말에는 눈꼬리를 높였지만, 다른 말없이 어머니와 그녀의 집을 나와 기차역으로 향했다. 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도 차표를 끊고 개찰을 마친 후, 승강장에 서 있을 때까지도 나는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치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셨는지 어머니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사람이 진짜 초라해지는 것은 이혼을 해서가 아니었다. 이런 구차함들이 이혼을 더욱 비참하고 초라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참고 있던 분노가, 역겨움이 목을 치밀어 올랐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주머니에서 부적을 꺼내 벅벅 찢어버렸다. 마침 지나가는 화물열차가 일으키는 소용돌이 바람 속에서, 부적조각들은 새처럼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흩어지는 부적조각들을 거머쥐기 위해 허우적거리며 쩔쩔 매시는 어머니를 보자, 더 이상, 정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기어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주위 사람들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통곡을 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서러워서가 아니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구차해질 수 있다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기차 간 내내 어머니는 눈물을 찍으셨고 난 그때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 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다는 굿판에도 가지 않았다. 물론, 나는 이혼을 했고, 이혼한지 18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무당이 되지 않았고, 어머니도 미치지 않고 유쾌하게 잘 살고 계신다. 그날 부적을 찢어버리면서, 난 내 인생을 무엇에도 걸지 않으리라고 결심을 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이혼은 더 이상 구차해지지 않기 위해서조차 꼭 해야 되는 것이 되어갔다.
 
그렇게 이혼을 했다. 난 한 번도 재판장에 나가지 않았는데 재판은 끝이 났다. 그것이 결정 나는 데만도 꼬박 1년이 걸렸고, 너무나 지루하고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혼을 하고 그것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항상 이혼하길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그때 좀 더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이혼과 관련된 문제들을 스스로 헤쳐 나갔었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하는 것이다.
 
난 오늘도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는다. 오래 전, ‘가운데 가르마를 타지 말라’던 무당의 말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빗을 잘 잡아 똑바로 '가운데 가르마'를 탄다. (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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