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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윤하의 딸을 만나러 가는 길 (12)
저녁식사를 마쳤을 만한 늦은 저녁이면 우리 동네 사람들은 산책을 많이 한다. 공원이나 하천변을 거니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도 그들 틈에서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 어제 저녁, 공원에서는 이웃 주민 두 명을 만났다. 일부러 연락하며 볼 만큼 가깝게 지내는 이들은 아니지만, 길에서 부딪치면 인사를 나누고, 이렇게 산책길에 우연히 만나기라도 하면, 함께 걸으며 사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 사이라서 반가웠다. 그러나 흥미로운 화제 거리가 없어, 그들과 이야기 나누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어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한 명은 너무 남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태도 때문에 호감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다. 유명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에 대한 자부심이 커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남편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다. 자기 남편이 얼마나 회사에 일찍 출근하는지, 일이 얼마나 많은지……. 너무 유치해서 기억에도 남지 않는 수다를, 그녀는 듣는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는지, 재미없어 하는지도 헤아리지 않고 풀어놓는다.
게다가 그녀는 자기 남편이 다니는 회사를 지칭할 때마다 “우리 00기업 사람들은…” 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어떻게 남편이 다니는 회사가 자기 회사처럼 생각되는지 참 이해가 안 간다. 물론, 남편이 명문대 출신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마치 그 대학을 나온 것처럼 잘난 척을 한다는 사람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가정주부라는 것이다.
나도 결혼 전에는 그럴 줄 알았다. ‘부부 일심동체’는 실제로 존재하는 감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편의 일이 나의 일처럼 여겨질 거라고 믿으며 결혼을 했다. 나는 아이의 임신과 출산, 양육으로 꼼짝없이 집안에 붙잡힌 신세가 되었지만, 남편은 이런 상황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자기 일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일이 내 일이 되지는 않았다. 남편이 내 몫까지 하는 거라고, 그가 더 잘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뒷받침해 주는 것이 나의 운동이니, 이렇게 살자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남편의 일이 곧 내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로 알고 있는 이 말을 내면화하려고 애써도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 “좋아서 이렇게 사는 게 아니에요. 남편의 인생은 남편의 인생이고 제 인생은 제 인생이에요." © 일다
나는 점점 더 고립감에 사로잡혀갔다. 아이가 잠든 곁에서 빨래를 개면서 한 번씩 고개를 들어 베란다 창을 바라보면, 빨래 줄에서 펄럭이는 기저귀들 틈으로 언뜻언뜻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럴 때면, ‘결국 이렇게 살다 죽는구나!’하며, 꼭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칭찬했다. 한 번은 남편과 함께 일하는 동료여성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모두들 언니가 참 대단하다고 해요. 운동권 여성과 결혼해서 저렇게 남자가 활동을 잘 하는 거라고 하죠.”
나는 이 말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미혼이고 나와 나이가 비슷한 이 여성이 나처럼 실수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좋아서 이렇게 사는 게 아니에요. 남편의 인생은 남편의 인생이고 제 인생은 제 인생이에요. 남편이 일을 잘한다고 해서 그것이 저를 행복하게 만들진 못해요. 남편이 제 인생을 살아줄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000씨도 제 말을 잘 기억하세요. 그래서 자기 일을 절대로 놓지 않길 바래요.”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나 했을까? 아무튼 내게서 들은 이 말을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남편에게 했던 모양이다. 어떤 마음으로, 또 어떤 식으로 했는지 모르지만, 남편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내가 사람들 앞에서 ‘남편이 내 몫까지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게 행복하다’고 우아하고 고상하게 말하길 바랐던 것 같다. 그러나 만약 내가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면, 그것은 우아한 것이 아니라 위선이고, 고상한 것이 아니라 가식이다.
그는 “다들 너를 얼마나 칭찬하는데, 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니?” 하고 펄쩍거리며 내게 따졌다. 그런 그에게 지지 않고, 당연하다고, 어떻게 당신의 인생이 내 인생이 될 수 있냐고? 나는 내 인생을 살고 당신은 당신 인생을 사는 거라며,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더랬다. 그때 전남편에게 ‘그래서 당신은 아내 몫까지 살아야지 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느냐고?’ 물어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는 이 질문에 뭐라 답했을까?
확실히 ‘부부 일심동체’라는 말은 이데올로기가 분명하다. 이 말로 이득을 보는 쪽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득 보는 쪽이 유포시키고 조장한 허위의식이라고 한다면 지나칠까? 그것을 잘 내면화한 여성들을 손가락질하고 싶지 않지만, 정말 그들의 남편들도 이렇게 생각하며 사는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유리할 때는 ‘부부 일심동체’를 주장하다가도 불리해지면 하나같이, “나는 모르는 일이다. 부인이 혼자 한 일”라면서 ‘부부 이심이체’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부부는 일심동체니까, 내가 다 뒤집어쓰고 남편을 살리자’며, 남자를 대신해 기꺼이 똥물을 뒤집어쓰는 여성들이 안타깝기보다는 한심스러울 뿐이다.
누구의 부인, 혹은 누구의 엄마라는 타이틀이 아니라 작고 하찮아 보이더라도 자기 일과 자기 인생 이야기를 주변 여성들과 나눌 수 있기를 나는 꿈꾼다. 그런 유쾌한 수다를 꿈꾼다. (윤하) *여성주의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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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를 마쳤을 만한 늦은 저녁이면 우리 동네 사람들은 산책을 많이 한다. 공원이나 하천변을 거니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도 그들 틈에서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 어제 저녁, 공원에서는 이웃 주민 두 명을 만났다. 일부러 연락하며 볼 만큼 가깝게 지내는 이들은 아니지만, 길에서 부딪치면 인사를 나누고, 이렇게 산책길에 우연히 만나기라도 하면, 함께 걸으며 사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 사이라서 반가웠다. 그러나 흥미로운 화제 거리가 없어, 그들과 이야기 나누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어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한 명은 너무 남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태도 때문에 호감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다. 유명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에 대한 자부심이 커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남편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다. 자기 남편이 얼마나 회사에 일찍 출근하는지, 일이 얼마나 많은지……. 너무 유치해서 기억에도 남지 않는 수다를, 그녀는 듣는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는지, 재미없어 하는지도 헤아리지 않고 풀어놓는다.
게다가 그녀는 자기 남편이 다니는 회사를 지칭할 때마다 “우리 00기업 사람들은…” 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어떻게 남편이 다니는 회사가 자기 회사처럼 생각되는지 참 이해가 안 간다. 물론, 남편이 명문대 출신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마치 그 대학을 나온 것처럼 잘난 척을 한다는 사람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가정주부라는 것이다.
나도 결혼 전에는 그럴 줄 알았다. ‘부부 일심동체’는 실제로 존재하는 감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편의 일이 나의 일처럼 여겨질 거라고 믿으며 결혼을 했다. 나는 아이의 임신과 출산, 양육으로 꼼짝없이 집안에 붙잡힌 신세가 되었지만, 남편은 이런 상황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자기 일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일이 내 일이 되지는 않았다. 남편이 내 몫까지 하는 거라고, 그가 더 잘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뒷받침해 주는 것이 나의 운동이니, 이렇게 살자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남편의 일이 곧 내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로 알고 있는 이 말을 내면화하려고 애써도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 “좋아서 이렇게 사는 게 아니에요. 남편의 인생은 남편의 인생이고 제 인생은 제 인생이에요." © 일다
나는 점점 더 고립감에 사로잡혀갔다. 아이가 잠든 곁에서 빨래를 개면서 한 번씩 고개를 들어 베란다 창을 바라보면, 빨래 줄에서 펄럭이는 기저귀들 틈으로 언뜻언뜻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럴 때면, ‘결국 이렇게 살다 죽는구나!’하며, 꼭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칭찬했다. 한 번은 남편과 함께 일하는 동료여성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모두들 언니가 참 대단하다고 해요. 운동권 여성과 결혼해서 저렇게 남자가 활동을 잘 하는 거라고 하죠.”
나는 이 말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미혼이고 나와 나이가 비슷한 이 여성이 나처럼 실수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좋아서 이렇게 사는 게 아니에요. 남편의 인생은 남편의 인생이고 제 인생은 제 인생이에요. 남편이 일을 잘한다고 해서 그것이 저를 행복하게 만들진 못해요. 남편이 제 인생을 살아줄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000씨도 제 말을 잘 기억하세요. 그래서 자기 일을 절대로 놓지 않길 바래요.”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나 했을까? 아무튼 내게서 들은 이 말을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남편에게 했던 모양이다. 어떤 마음으로, 또 어떤 식으로 했는지 모르지만, 남편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내가 사람들 앞에서 ‘남편이 내 몫까지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게 행복하다’고 우아하고 고상하게 말하길 바랐던 것 같다. 그러나 만약 내가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면, 그것은 우아한 것이 아니라 위선이고, 고상한 것이 아니라 가식이다.
그는 “다들 너를 얼마나 칭찬하는데, 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니?” 하고 펄쩍거리며 내게 따졌다. 그런 그에게 지지 않고, 당연하다고, 어떻게 당신의 인생이 내 인생이 될 수 있냐고? 나는 내 인생을 살고 당신은 당신 인생을 사는 거라며,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더랬다. 그때 전남편에게 ‘그래서 당신은 아내 몫까지 살아야지 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느냐고?’ 물어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는 이 질문에 뭐라 답했을까?
확실히 ‘부부 일심동체’라는 말은 이데올로기가 분명하다. 이 말로 이득을 보는 쪽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득 보는 쪽이 유포시키고 조장한 허위의식이라고 한다면 지나칠까? 그것을 잘 내면화한 여성들을 손가락질하고 싶지 않지만, 정말 그들의 남편들도 이렇게 생각하며 사는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유리할 때는 ‘부부 일심동체’를 주장하다가도 불리해지면 하나같이, “나는 모르는 일이다. 부인이 혼자 한 일”라면서 ‘부부 이심이체’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부부는 일심동체니까, 내가 다 뒤집어쓰고 남편을 살리자’며, 남자를 대신해 기꺼이 똥물을 뒤집어쓰는 여성들이 안타깝기보다는 한심스러울 뿐이다.
누구의 부인, 혹은 누구의 엄마라는 타이틀이 아니라 작고 하찮아 보이더라도 자기 일과 자기 인생 이야기를 주변 여성들과 나눌 수 있기를 나는 꿈꾼다. 그런 유쾌한 수다를 꿈꾼다. (윤하) *여성주의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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