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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딸을 만나러 가는 길 (14)
만나고 싶지 않다는 딸의 편지를 받고도 매달리지 않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아휴! 아이를 키우지 않아, 모성애라고는 없어서…” 라고 탄식의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이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딸과 관계를 풀어나가는 것도 서툴렀던 것 같다.
많은 여성학자들은 주장한다. 모성애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고. 그렇다면 나도 모성애가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1년 반 남짓 되는 양육을 경험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모성애는 이 정도의 경험으로는 충분하게 형성되지 않나 보다.
만나고 싶지 않다는 아이의 편지를 받고도 찾아가 나를 설명하지 않았고, 만나야 한다며 쫓아다니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심한 말을 한 것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는 심하게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아이에게 냉담해지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정을 떼려고 그랬구나’ 생각하니 이해가 안 되지도 않았다.
게다가 아이가 현재 함께 살고 있는 부모에게 지금처럼 관심과 배려를 받으며 살길 원한다면, 나를 안 만나는 것이 유리하겠다는 생각도 했다. 또 친엄마를 만나면서 사는 것이 그쪽 부모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모를까 그것을 원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아이가 믿을 사람은 지금 부모밖에 없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야 현재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더 반듯하게 생활하려고 노력할 테니 말이다. 나는 아이가 현재 가족들로부터 겉돌거나 불편한 상황이 되는 걸 결코 원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정리를 했지만, 정작 아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손녀딸의 편지를 보고 이렇게 있을 수 없다며, 당장 만나야겠다고 펄쩍거리셨다. 어머니는 자주 ‘놓칠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놓친다’는 말은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표현이었다. 이 말만큼 손녀딸을 만나지 못하게 된 어머니의 안타까운 마음이 잘 표현된 단어는 없겠다 싶다.
자녀를 다섯이나 낳고 기르셨기 때문일까? 아니면 특별히 자녀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였을까? 몇 번이고 손녀를 당장 만나러 가겠다는 걸 “제발 그냥 좀 놔둬라”, “입시를 앞둔 아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말라”며, 어머니를 주저앉히는 데 난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이혼할 당시는 당신 마음대로 행동하셨던 어머니가 다행히 이번에는 내 허락 없이 행동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난 어머니와 약속을 했다. “지금은 그냥 참고 계세요. 대입시험이 끝나면 그때는 마음대로 하세요.” 어머니는 내 이 말을 여러 차례 다짐 받고 나서야 잠잠해지셨다. 그러다가도 불쑥 손녀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흥분하기를 반복했고, 난 그런 어머니를 잡아끌기를 반복하며 몇 해가 지났다. 그러는 사이에도 어머니는 손녀에게 생일선물을 보내셨다.
그러다 기다리던 바로 그 대학입시가 끝난 어느 날, 어머니는 단 걸음에 손녀를 찾아가 다시 선물을 안겨주고 졸업식날에는 꽃다발까지 배달시켰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확인한 것은 할머니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싸늘한 대답이 전부였다. 그런 어머니는 “내 이 억울한 사정은 하늘이나 땅이 알지, 어디 가서 이 억울함을 푸냐?” 하시며, 너무 마음아파 하셨다. 사실, 이 말은 내가 해야 할 말이 아닐까 싶은데, 어머니는 아이의 냉정한 태도에 나보다 더 발을 동동 구르셨다.
이런 상황에도 손녀를 당장 만나러 가야겠다고 하시는 어머니께 나는 제발 그만 하라고,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냐고 소리를 질렀다.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어머니는 겨우 잠잠해지셨다. 그러나 여전히 어머니와의 대화는 늘 딸아이 이야기로 흐른다. 그러면 나는 “또 그 소리!”하며 언성을 높이고, 어머니는 “다시는 안 그러겠다”며 도리질을 치신다. 이럴 때마다 마음으로는 어머니가 안타깝고 죄송스럽다.
오늘도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는 슬그머니 딸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런 어머니께, “엄마! 엄마는 내가 더 좋아? 손녀가 더 좋아?”라고 물었다. 내 질문에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손녀가 더 좋지. 너무 예쁘지 않니? 뭐든지 다 해주고 싶지.” 하시는 거다. 그 말을 하는 어머니의 표정 속에는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난 그냥 슬프게 웃었다.
어머니께서 내 딸에게 보이는 사랑이 바로 '모성애'가 아닐까 싶다. 나는 가끔씩 이 일은 내 일이 아니라 마치 어머니의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딸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의 감정은 어머니의 모성애와는 다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런 모성애를 내면화하고 싶지 않다. 어머니가 손녀에게 하는 방식으로 나와 딸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와 딸의 관계가 엄마라는 이름으로, 혹은 딸이라는 이름으로 만나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딸과의 관계에서 진실로 서로의 인생에 격려가 되고 진정한 지지자가 될 수 있길 바란다. 서로의 인간성에 바탕한 신뢰의 관계를, 그래서 모성애적인 관계보다 더욱 힘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길 바란다. 그것이 실패해, 어머니 말씀대로 정말 딸을 ‘놓친다’ 하더라도 여전히 '모성애'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길 바란다. (윤하)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인터넷 저널 <일다> 바로가기
만나고 싶지 않다는 딸의 편지를 받고도 매달리지 않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아휴! 아이를 키우지 않아, 모성애라고는 없어서…” 라고 탄식의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이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딸과 관계를 풀어나가는 것도 서툴렀던 것 같다.
많은 여성학자들은 주장한다. 모성애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고. 그렇다면 나도 모성애가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1년 반 남짓 되는 양육을 경험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모성애는 이 정도의 경험으로는 충분하게 형성되지 않나 보다.
만나고 싶지 않다는 아이의 편지를 받고도 찾아가 나를 설명하지 않았고, 만나야 한다며 쫓아다니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심한 말을 한 것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는 심하게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아이에게 냉담해지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정을 떼려고 그랬구나’ 생각하니 이해가 안 되지도 않았다.
게다가 아이가 현재 함께 살고 있는 부모에게 지금처럼 관심과 배려를 받으며 살길 원한다면, 나를 안 만나는 것이 유리하겠다는 생각도 했다. 또 친엄마를 만나면서 사는 것이 그쪽 부모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모를까 그것을 원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아이가 믿을 사람은 지금 부모밖에 없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야 현재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더 반듯하게 생활하려고 노력할 테니 말이다. 나는 아이가 현재 가족들로부터 겉돌거나 불편한 상황이 되는 걸 결코 원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정리를 했지만, 정작 아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손녀딸의 편지를 보고 이렇게 있을 수 없다며, 당장 만나야겠다고 펄쩍거리셨다. 어머니는 자주 ‘놓칠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놓친다’는 말은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표현이었다. 이 말만큼 손녀딸을 만나지 못하게 된 어머니의 안타까운 마음이 잘 표현된 단어는 없겠다 싶다.
자녀를 다섯이나 낳고 기르셨기 때문일까? 아니면 특별히 자녀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였을까? 몇 번이고 손녀를 당장 만나러 가겠다는 걸 “제발 그냥 좀 놔둬라”, “입시를 앞둔 아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말라”며, 어머니를 주저앉히는 데 난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이혼할 당시는 당신 마음대로 행동하셨던 어머니가 다행히 이번에는 내 허락 없이 행동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난 어머니와 약속을 했다. “지금은 그냥 참고 계세요. 대입시험이 끝나면 그때는 마음대로 하세요.” 어머니는 내 이 말을 여러 차례 다짐 받고 나서야 잠잠해지셨다. 그러다가도 불쑥 손녀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흥분하기를 반복했고, 난 그런 어머니를 잡아끌기를 반복하며 몇 해가 지났다. 그러는 사이에도 어머니는 손녀에게 생일선물을 보내셨다.
그러다 기다리던 바로 그 대학입시가 끝난 어느 날, 어머니는 단 걸음에 손녀를 찾아가 다시 선물을 안겨주고 졸업식날에는 꽃다발까지 배달시켰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확인한 것은 할머니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싸늘한 대답이 전부였다. 그런 어머니는 “내 이 억울한 사정은 하늘이나 땅이 알지, 어디 가서 이 억울함을 푸냐?” 하시며, 너무 마음아파 하셨다. 사실, 이 말은 내가 해야 할 말이 아닐까 싶은데, 어머니는 아이의 냉정한 태도에 나보다 더 발을 동동 구르셨다.
이런 상황에도 손녀를 당장 만나러 가야겠다고 하시는 어머니께 나는 제발 그만 하라고,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냐고 소리를 질렀다.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어머니는 겨우 잠잠해지셨다. 그러나 여전히 어머니와의 대화는 늘 딸아이 이야기로 흐른다. 그러면 나는 “또 그 소리!”하며 언성을 높이고, 어머니는 “다시는 안 그러겠다”며 도리질을 치신다. 이럴 때마다 마음으로는 어머니가 안타깝고 죄송스럽다.
오늘도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는 슬그머니 딸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런 어머니께, “엄마! 엄마는 내가 더 좋아? 손녀가 더 좋아?”라고 물었다. 내 질문에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손녀가 더 좋지. 너무 예쁘지 않니? 뭐든지 다 해주고 싶지.” 하시는 거다. 그 말을 하는 어머니의 표정 속에는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난 그냥 슬프게 웃었다.
어머니께서 내 딸에게 보이는 사랑이 바로 '모성애'가 아닐까 싶다. 나는 가끔씩 이 일은 내 일이 아니라 마치 어머니의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딸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의 감정은 어머니의 모성애와는 다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런 모성애를 내면화하고 싶지 않다. 어머니가 손녀에게 하는 방식으로 나와 딸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와 딸의 관계가 엄마라는 이름으로, 혹은 딸이라는 이름으로 만나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딸과의 관계에서 진실로 서로의 인생에 격려가 되고 진정한 지지자가 될 수 있길 바란다. 서로의 인간성에 바탕한 신뢰의 관계를, 그래서 모성애적인 관계보다 더욱 힘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길 바란다. 그것이 실패해, 어머니 말씀대로 정말 딸을 ‘놓친다’ 하더라도 여전히 '모성애'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길 바란다. (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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